우리는 기후위기를 헤쳐나갈 수 있을까? 미국이 파리협약 탈퇴를 통보하면서 온실가스 배출제로가 얼마나 험난한 길인지 새삼스레 확인하게 되었다. 솔직히 기후정의운동이 주장하는 탄소예산을 기초로 역사적 책임에 입각하여 온실가스 배출제로로 가는 길은 가늠하기 쉽지 않다. 그렇다고 불충분한 파리협약, 탈정치화 된 기후위기 담론에서 맴돌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히려 기후정의가 제기하는 문제들, 기후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넘어야할 장벽을 논의하는 계기로 삼는 게 낫지 싶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기후정의는 사회운동 속에서 시스템 전환을 촉구하는 언어로서 계속 소환될 것이기 때문이다. 기후정의에 무엇이 담겨있는지, 혹은 무엇을 담을 것인지를 이야기하기 위해 세부적인 쟁점들을 따져야 한다. 폭넓은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우선 생각해볼 것을 몇 가지 꺼내 본다.
먼저 탄소예산(carbon budget) 설정과 관련해서 1.5~2℃ 기온 상승 억제 목표와 더불어 달성 확률, 배출제로 시점, 중간 목표 등을 따져봐야 한다. 기후체계의 복잡성, 파국적인 결과의 가능성을 고려할 때 평균 기온 상승 억제 목표는 최대한 낮추고 달성 확률은 높이는 것이 기후정의의 원칙에 부합한다. 따라서 통상적으로 제시되는 50%, 66% 확률이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탄소예산을 추산했다고 해도 배출제로 시점, 그리고 중간 목표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감축 경로가 달라지게 된다. 아울러 온실가스 배출량 감축 모델의 가정도 꼼꼼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 예컨대,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의 IAM(Integrated Assessment Model, 기후변화의 경제적 영향 평가 모델)은 아직 개발되지 않거나 상용화가 불확실한 기술을 포함시켜서 배출 흡수(negative emission)의 가능성 높인다는 비판을 받는다. 또한 현재의 사회경제구조를 불변의 것으로 가정한 뒤 공급 측면을 강조할 뿐, 에너지·소비 축소와 같은 수요 측면의 변화는 중요하게 고려하지 않는다. 즉 주류적인 모델은 기술과 시장에 대한 낙관주의에 기대어 사회경제모델의 전환을 통한 기후위기 대응의 가능성을 배제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주어진 것이 아닌 선택의 대상으로 탄소예산과 배출제로 경로에 대한 논의를 더 할 수 있다.
탄소예산의 윤곽이 잡히면 잔존 배출량을 배분하는 문제를 풀어야한다. 탄소예산은 배출전망치(BAU)나 기준점(과거 특정연도) 대비 감축이 아닌 배출제로로 논의의 방향을 이끈다. 그러나 탄소예산을 배분하는 기준이 곧바로 도출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역사적 책임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대두된다. 그동안 '공동의 차별화된 책임'의 해석을 놓고 선진국과 개도국 간, 그리고 선진국과 개도국 각자의 진영 내부에서 치열한 다툼이 진행되는 가운데 기후정의는 역사적 책임을 원칙으로 내세웠다. 다만 역사적 책임으로 모든 것이 풀리지는 않는데, 핵심적인 쟁점 중 하나는 온실가스 배출의 파급 효과를 인식하지 못한 시점에서 배출 행위에 대한 책임 부과 문제다. 주로 선발 산업국이 역사적 책임을 줄이기 위해 이 문제를 제기해왔지만 현재적 기준으로 과거 세대의 행위에 윤리적 책임을 부과하는 것이 간단한 문제는 아니기에 논란의 여지가 남아있다. 즉 역사적 책임의 시점은 산업화가 시작된 시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고 온실가스 효과에 대한 논쟁이 어느 정도 매듭지어진 1980년대까지 내려올 수도 있다.
시점이 중요한 이유는 탄소예산을 할당하는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흔히 기후정의 논의에서 배출량 할당은 감축과 수렴(contraction and convergence) 원칙에 따라 장기적인 수렴을 목표로 하는데, 1인당 동일 누적 배출량을 산정하는 출발점에 따라 자연스럽게 탄소예산의 할당량이 달라진다. 역사적 책임의 시점을 앞당길수록 선발 산업국은 더 과감하게 1인당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여야하고 후발국에게 할당되는 잔존 배출량은 증가하게 된다.
한편 기준으로서 1인당 동일 배출량에 대한 문제제기도 가능하다. 온실가스 배출량과 흡수량에 영향을 미치는 지리적 요인을 고려하지 않고 일률적으로 1인당 배출량을 설정하는 것이 타당한지, 더 부유하고 앞선 기술을 가지고 있는 국가가 더 큰 책임을 지는 게 합당한 원칙은 아닌지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또한 국외 사업을 통한 상쇄 인정 여부가 논란이 된 것에 비해 수출입이 온실가스 배출량 할당에 갖는 함의는 거의 논의되지 않고 있다. 다시 말해 중국산 제품이 한국에서 소비될 때, 이 제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발생한 온실가스를 전적으로 중국에 귀속시키는 것이 맞느냐는 질문에 아직 뚜렷한 답이 제시되지 않고 있다.
한 국가 내에서 온실가스를 감축할 때에도 차별화된 감축 책임의 문제가 제기된다. 전환·산업·건물·수송 등 부문 간 또는 기업·가정 등 행위자 간 배출량 감축 속도, 탄소예산 배분을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아직 구체적으로 이야기되지 않은 것들이 많다. 계층별 온실가스 배출량 차이를 반영한 감축 계획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전환 비용 부과가 연료빈곤(fuel poverty) 확산과 같은 역진적인 효과를 내지 않도록 설계되어야한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생계형 배출과 사치형 배출의 경계 또는 기본 필요(basic needs)의 범위는 반복적으로 제기될 수 있는 문제다.
한편 기후정의의 시각은 더욱 적극적인 기후변화 적응 대책을 요구한다. 홍수, 연안 침수, 폭염 및 한파, 사회기반시설의 훼손, 건강 악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기후변화의 피해가 차별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재난 취약성 논의에 따르면, 기후변화로 인한 피해는 기후위험에 대한 노출, 피해 민감성, 적응 능력에 따라 달라진다. 각각은 하위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 적응 능력은 보험, 지식과 같은 대비 능력(ability to prepare), 소득, 이동성, 사회적 네트워크 등 재난 발생 시 즉각적인 대응을 하는 데 영향을 미치는 대응 능력(ability to respond), 나아가 재난 이후의 복구 능력(ability to recover)을 포괄한다. 이와 같은 취약성 개념과 연결되면서 기후정의는 가시화된 피해의 불평등을 넘어서서 잠재적인 피해의 불평등 문제를 더 적극적으로 조명할 수 있게 된다. 즉 빈곤, 사회적 배제, 공간적 불평등으로 인해 재난 대응력이 약화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사전 예방의 차원에서 포괄적인 복지 정책을 펼 필요성이 제기된다.
기후정의의 시각에서 보면 한국의 기후정책은 암담한 수준이다. 얼마 전 발표된 제2차 기후변화대응 기본계획은 기후정의에 무감각한 현실을 잘 보여준다. 단적으로 2030년 온실가스 감축 목표는 2017년 배출량 대비 24.4% 감축 수준인 5억 3600만 톤가량으로 탄소예산 문제의식은 찾아볼 수 없다. 참고로 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1950~2050년 1인당 동일 누적 배출량을 기준으로 1.5℃(50%)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한국은 2032~33년까지 배출제로를 달성하고 2050년에는 739MtCO2 만큼 흡수해야한다(이창훈 외. 2019. 지속가능발전과 에너지·산업 전환: 기후변화 정책목표 1.5도 대응을 중심으로). 현재 정부는 이 거대한 도전을 외면하는 대신 신시장·신산업 창출, 탄소 포집·활용·저장(CCUS) 통합실증사업과 같은 기술에 대한 기대를 키우고 있다. 그리고 기후변화 적응 대책은 야외근로자 쉼터, 쪽방 주민 물품 지원, 에너지 바우처 수준에 머물러 있다.
경제위기와 겹쳐진 기후위기는 사회 불평등을 가속화해 사회정의의 토대를 허무는 계기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기후위기 대응은 사회정의를 재확립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탄소예산과 기후정의는 기후위기의 뿌리를 추적하고 근원적인 해결책을 찾을 것을 촉구하고 있다. 다만 그 안에 무엇을 담을 것인지, 아직 불확정적인 곳들도 존재한다. 달리 이야기하면, 기후정의운동은 기후위기가 어느 방향으로 전개될 것인지, 그 불확실한 미래를 결정하는 요인으로 부상하고 있다. 결코 쉬운 길은 아니다. 하지만 파국의 길을 선택할 것이 아닌 이상, 실현 가능성을 회의하기 전에 기후정의와 현실 사이의 거대한 간극을 직시하고 메워갈 방안을 찾아가는 게 나을 것이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기후위기는 시작되었고 기후위기와 기후불평등이 해소되지 않는 한 기후정의의 요구는 계속 분출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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