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왜곡된 역사 속에서, 지금까지의 한일 관계는 효용을 다했다. 그러나 예고된 갈등이었다. 일본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35년, 8.15 광복과 분단체제, 그 이후 70년의 강고한 구 체제 시스템 속에서 우리 내부 깊숙이 침투해 들어와 알게 모르게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그 안에 우리 내부의 모순과 고뇌가 응축되어 있다. 이 모순과 고뇌를 탐구하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한 개인사를 통해 시대와 사회를 비추는 거울 역할을 하는 것이 문학의 영역일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외세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생존이 우선이었던 관계로 자기 자신을 앞세우지 못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잊어버렸고 안일했다. 그러다보니 역사는 박물관에 소장된 문화재인 양 화석화되고, 현대의 역사는 더군다나 묻혔다.
기자 출신 이계홍 작가의 실록소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은 그런 배경에서 나왔다. 이 소설은 2016년 10월호부터 2019년 6월호까지 문예월간 '월간문학'에 연재되었던 소설이다. 월간문학 연재를 마친 뒤 많은 부분을 수정 보완해 프레시안에 재수록한다.
이 연재물은 이른바 '팩션(Faction)'이다. 팩트와 픽션의 사이 어디에서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덧붙인 '논픽션' 형식의 소설이다. 필자는 취재의 일환으로 일제강점기 말 일본 육사 출신 젊은 생도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어지러운 시대, 그 안에서 제국주의 광풍에 휘말린 젊은이들의 시각을 잡아내려 했다. 이계홍은 "일본의 극우 정권이 일제강점기의 역사적 사실들까지도 왜곡하는 역사 모독에 대해 하나의 담론시장을 형성하자는 데 목적이 있다"고 했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은 총 33회로 나뉘어 연재될 예정이다.(편집자)
제25장 외줄 타듯 살얼음 딛듯
성산포 일원에서 작전을 마치고 귀대하던 오민균 대대장이 생각이 난 듯 인근 해녀회관을 찾았다. 매일 비상상황에 대비하다 보니 한동안 잊었지만 해안도로를 돌면서 불현듯 그녀가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다.
해녀회관은 문이 굳게 잠겨있었다. 유리창이 여러 장 깨져서 드센 바람이 안으로 소리를 내며 빨려들어갔다. 회관은 진작부터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마침 바다 쪽에서 나이 든 해녀가 물질을 하고 오는지 태왁을 걸머지고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오민균이 여인에게 다가가 물었다.
“여기 해녀회관의 임순심씨를 찾아 왔습니다.”
단박에 그녀가 경계의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다. 사십 중반쯤 되어보이는 여인이었다.
“저번에 찾아왔던 사람입니다. 알고 지내던 사람입니다.”
“그란디 무사마씸(왜요)? 알고 지내는디 안부도 모른다마씸?”
“그동안 바빠서 찾지 못했는데, 지나는 길에 한번 만나보고 가려구요.”
“아, 기(그렇구나). 한디 다 모사뿌릿소(부숴버렸소). 잊어뿔고 가소.”
여인이 구멍이 숭숭 난 길가의 큰 돌덩어리에 걸터앉아 길게 한숨을 내뿜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상대방이 알아듣기 좋게 육지 말씨로 떠듬떠듬 말했다.
“죽었습니다.”
“네?”
오민균은 잘못 들었나 싶었다. 제주땅에서는 죽음이 일상사가 되었지만, 그것은 그녀와는 무관한 일로 생각되었다. 제주 사건과는 연관되는 것이 없었고, 또 그녀는 굳굳하게 사선을 넘어온 사람이다. 실로 끈질기에 부여잡은 생명줄이다. 소만국경-북만주-사할린-홋카이도-혼슈-그리고 부산을 거쳐 제주에 안착하기까지 죽음의 고비를 수도 없이 넘었지만 기적처럼 살아나왔다. 일본군의 성놀이개가 되고, 소련군 초병에게까지 몸을 빼앗기고, 무수히 죽고 죽이는 전선을 넘었지만 불사신처럼 살아 돌아왔다. 그런데 제주에서 흔적도 없어 죽어나간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해녀가 말했다.
“청년단이 폭도대 연락책을 잡는다고 추격하다가 임가라는 처니, 일본에서 군수공장 다니다가 왔다는 그 처니와 상준이가 연애질을 했다 하지 않았겠소? 둘이서 바닷가 구렁창에서 사랑을 나누는디 청년단이 쫓아가 상준이를 죽이고, 순심이도 죽였다는 것이요. 고상준이가 폭도대 투쟁대장이었지. 상준이와 엮여서 죽은 거라우. 불쌍한 처니지. 어찌어찌 제주 섬까지 들어와서 살아볼 요량이었던 것 같은디, 요 난리의 희생물이 되었소. 집도 절도 없다고 해서 길자가 데려온 모냥인데, 죽어삐렀소. 폭도대를 사랑한 것이 죄제. 험지에서 사랑하면 너무나 위험한 일이제... 참으로 정숙하고, 참한 색시였는디...”
여인이 허리에 매단 조그만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더니 그 속에서 한 개비를 뽑아 입에 물고 성냥불을 붙여 깊게 빨아들였다. 휴우-, 한숨과 함께 담배 연기가 무심하게 하늘로 피어올랐다. 그녀가 의심스런 눈을 풀고 오민균에게 물었다.
“처니와 어떤 사이요?”
“해방을 맞아 일본에서 같이 들어왔습니다.”
“아, 생각나는구먼. 처니를 만나기 위해 제주 부대로 역부러 전근왔다는 사람이구먼? 그러면 상준이한티 가기 전에 진작에 불러냈어야제? 군인이었으면 보호받았을 틴디...”
마을에는 그렇게 소문이 난 모양이었다. 그는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무덤은 어디 있습니까.”
“이 난리에 뫼는 어디에 쓸 수 있습니까. 꼬실라버리고는 그만이지요. 모두가 허망하고 허망한 일이요...”
“집을 안내해줄 수 있습니까.”
“늦었소. 답답한 양반아, 오실라면 진작에 왔어야지. 그 집엔 아무도 없소.”
“길자씨라도 만나보고 싶군요.”
“그 여자 죽었다니까. 그 처니가 죽었는디, 길자가 온전하겠소? 동생을 죽인 청년단에게 쫓아갔다가 맞아 죽었지. 인자는 그 집 씨가 말랐소. 고적하게 되었소. 의가 좋은 남매였는디...”
그는 쓸쓸하게 여인과 헤어졌다. 발걸음은 한없이 무거웠다. 그동안 임순심에게 이렇다 할 위로 한마디 해준 것이 없다는 자책 때문에 가슴이 멍멍했다. 불행한 사람에게는 불행만 계속 이어지는 악순환. 길을 가다 보면 지전(紙錢)을 자주 줍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지전은 커녕 매번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이 있다. 주의력 부족이라도 임순심에게는 그것이 아니다. 착하고 순결해서 바라보기만 해도 눈부신 여자가 아닌가. 그런데 왜 그녀에게만 불행이 비껴가지 않을까. 왜 세상이 이렇게 불공평한가... 그는 귀대하면서 절망과 생의 허무에 젖었다.
제주 군정장관의 이중성인가, 미국의 이중정책인가
9연대 장교단은 회담을 하기 위해 떠나는 연대장 사열을 특별히 준비하고 있었다. 평상시 같으면 그냥 지나칠 수 있는데, 이번의 출장은 특별한 것이 있었다. 성공하면 제주도 안정의 시발점이 된다. 반대로 실패하면 사태는 헝클어지고, 더 깊은 수렁에 빠질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그는 우익 진영과 경찰에게 공격당하고 영창에 갇히거나 쫓겨날 것이다. 목숨마저 담보할 수 없다.
김익창은 마음의 준비를 했으나 막상 부딪치자 착잡했다. 생각해보니 맨스필드 제주 군정장관이 긴장하고 주저했던 것도 이해가 되었다.
“연대장 각하, 모두가 반대하는 비현실적인 일에 너무 깊숙이 말려들어간 것이 아닐까요?”
맨스필드가 말했던 것을 생각하며 김익창이 오전부터 불러들인 오민균을 바라보았다.
“맨스필드는 말이야, 상부로부터의 문책을 두려워하고 있더군. 제주 민심은 맨스필드 군정관 편이라고 두둔해주었지. 하지만 민심은 비현실적이라는 것이래. 미군정 사람들도 그의 편이 아니니까 상당히 외로운가 봐.”
그렇게 말해놓고 그는 장식없는 연대장실을 서성거렸다. 오민균도 의자에서 일어나 그의 뒤를 밟으며 말했다.
“각하, 여기까지 왔습니다. 용기란 두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김익창이 품에 품고 있던 메모지를 오민균에게 내밀었다. 김익창이 맨스필드와 회합을 가진 뒤 작성한 메모였다.
-제주 9연대장은 폭도와의 평화회담에 필요한 일체의 권한행사에서 미군정장관 딘 장군을 대리한다
-폭도들의 살인 방화 등 범법자에 대한 재판에서 극형을 면할 수 있는 징벌을 약속한다
-기타 범죄에 대해서는 가능한 관용을 베푼다
-서면으로 조인된 약속의 이행은 미 군정장관 이름으로 책임진다
무장자위대들을 배려한 메모였다. 김익창의 공이 들어간 성과물이었다. 맨스필드로부터 약속을 받아냈지만 그는 이것을 무장대에게 그대로 제시할 생각은 없었다. 필요한 것만 내놓을 것이다.
“이렇게 약속을 받아오긴 했는데 아쉬운 것이 있어.”
“더 첨언할 것이 있나요?”
“그의 서명을 받아와야 하는데 받아 적어오기만 했단 말일세.”
“메모가 증명서 아닙니까. 제주 군정장관과 중앙 군정장관의 지시로 추진하는 일이라는 건 아는 사람은 아는 일이죠. 서명이 들어가고 안들어가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지요. 메모 자체가 중요하지요.”
“나이브하게 생각했어. 경무부의 생각이 다르고, 미군정 지휘부의 생각이 다르니까, 그래서 이유를 달아 비틀어버릴 수 있어.”
“그렇다면야 그것이 아니어도 비토할 이유는 많지요. 너무 연연해하지 마십시오.”
“국방경비대 정보팀도 우호적이진 않아. 서명 여부를 살피고 따질 거야. 그자들은 쥐새끼들이거든. 비틀어버릴 수 있는 근거만을 찾거든.”
그래서 조그만 것에도 신경이 쓰였는데, 서두른 바람에 소소한 것을 놓쳤다는 뜻이다. 평소 덤벙대던 연대장 치고 사려깊은 태도였다. 하긴 경찰은 모든 사안을 대결구도로 보았다. 좌익과 우익, 경찰과 폭도대, 적과 동지, 미국과 소련... 그러면서 이승만 박사를 추앙했다.
해방이 되자 일제 치하에서 독립운동가를 잡으러 다니던 고등계 형사나 고급관료, 일제에 유착해 돈을 모은 부호들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마땅한 후견인을 찾아나서고 있었다. 오랜 기간 미국에 머물러 국내 물정 모르는 이승만이 힘이 되어준다면 사후(事後) 보장은 물론 함께 권력을 향유할 수 있다. 73세 노령의 이승만은 다행히 국내 기반이 취약했다. 그로서도 자신을 뒷받침해줄 세력을 확실하게 잡는 일이 급선무였다. 그는 영어를 잘 하는 한국인 중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미국적 정서가 풍부하고 영어가 능통하니 미국이 위임하는 한국통치의 적임자로 나설 수 있었다. 미국인의 감정과 의도를 누구보다 간파할 수 있는 자질은 무엇보다 권력의 중심부에 설 수 있는 양호한 조건을 갖춘 셈이었다.
현실주의적 판단능력이 뛰어난 친일세력은 이런 이승만을 전후방에서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이승만을 통해 전비(前非)를 세탁하면서 숨통을 열어갈 수가 있는데, 다행히 국방경비대에도 일본군 정보대와 헌병대 출신을 중심으로 이승만에게 충성하는 세력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그중 김창동 같은 관동군 출신 정보 실무자들이 군부 내에서 확실한 주도 세력을 형성했다. 분단 상황은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이들이 활동할 최적의 환경이었다. 말이 빨갱이지 그들은 빨갱이를 빌미삼아 이승만의 반대자를 제거하는 역할에 충실했다. 경찰과 군 정보대는 서로 경쟁적 위치에 섰고, 성과를 올리기 위해 "내가 조작하면 다 조작될 수 있다"는 신념으로 국내 상황을 주도해 나갔다.
그들은 김익창이 추진하는 무장대와의 화평 협상도 은밀하게 체크하고 있었다. 미군정은 정보가 멋대로 가공돼 전달되는 바람에 자신들이 지침을 주었으면서도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경찰과 군 정보대가 미국과 민주주의를 위한 일이라며 경쟁적으로 반도 체포 작전에 나서니 미국 입장에서 나쁠 것이 없었다. 이는 미군 강경파가 바라는 조건이기도 해서 경찰과 군 정보대가 신뢰를 받는 근거가 되었다.
“두렵네.”
그러면서 군복 안주머니에서 메모지를 한 장 꺼내 오민균에게 내밀었다. 회담 타결 후의 이행 수칙이었다.
-회담타결 즉시 전투중지
-완전 무장해제
-범법자의 자수와 범법행위의 장소‧일자‧범행자 명단 제출
-죄질이 엄중한 폭도 이외에는 생업에 종사토록 보장
오민균도 이미 아는 것들이었다. 그는 거듭 확인하고 위안을 받고 싶은 모양이었다.
“이것을 토대로 합의문을 작성하면 되는 것입니다.”
“저놈들이 회담을 비틀거나 또다른 요구를 해오면 어떡하지?”
“칼자루는 연대장 각하께서 쥐고 있습니다. 저 자들이 칼날을 잡고 있습니다. 시간도 우리 편입니다.”
“대대장을 보면 내가 듬직해진단 말이야.”
연병장으로 나서자 700여 장병들이 대오를 갖춰 정렬해 있었다. 연대병력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인원이었다. 모병이 채워지지 않아 100명부터 시작한 병력이었다. 그는 오픈 스리쿼터에 올라 1중대부터 차례로 사열을 받고, 지프로 갈아타고 정문을 나섰다. 김익창, 오민균, 그리고 운전병, 세 사람이었다. 부릉부릉 가파른 산길을 오르자 낡은 지프는 헐떡거렸다. 연대장이 물었다.
“폭도 조직이 단일조직인지 복수조직인지 헷갈리네.“
여러 조직 이름이 거론되고 있는 데다 두목으로 지목된 자도 몇 명이고, 그것도 가명을 쓰는 자가 있으니 혼선이 빚어졌다. 무장자위대는 경찰을 교란시키기 위해 조직 자체를 자주 교체 편성하고, 공격 목표도 수시로 변경했다. 성동격서(聲東擊西)가 주요 전술이었다.
“제가 아는 한은 정통입니다.”
오민균이 적 주력과 예비협상을 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는 연대장이 준 협상의 지침보다 더 깊은 내용을 합의했다. 현호진과의 인과관계가 바탕이 되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현호영이 가교역할을 한 셈이었다. 합의서엔 ①무장대의 협상 책임자는 전도(全島)의 폭도의 행동을 결정할 수 있는 최고 권한을 가진 자라야 한다 ②회담에서 결정한 사항은 즉각 실행되어야 한다 ③회의 내용을 타인의 동의를 필요로 하는 자는 제외한다... 즉, 최고 의사결정권자가 나서야 한다고 못박은 것이다.
반도측은 ①9연대장이 직접 회담에 나와야 한다 ②수행원이 2인 이하라야 한다 ③장소와 시일은 무장대가 결정하되, 장소는 무장대 진영이라야 한다고 요구했다.
연대장은 그들이 정한 장소에서 만나야 한다는 요구도 큰 틀에서 수용했다. 폭도가 대명천지 공개된 장소에서 협상에 임할 리는 없기 때문이다.
미군 정보팀과 경찰 쪽에서는 폭도들과 1대1 회담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받아들이면 폭도를 인정하는 셈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격식을 이유로 방치하면? 살육은 계속될 것이다.
“여기까지 온 건 어찌됐건 맨스필드 군정장관의 업적이 크네.”
김익창이 덜커덩거리는 지프에 몸을 맡긴 채 말했다. 스스로 자기 최면을 거는 것이다. 맨스필드는 돌파구를 찾고자 여러 경로를 살핀 끝에 무장자위대와 대화가 통한다는 9연대장에게 임무를 부여했다. 그리고 오민균과 현호진이 막후 역할을 했다. 그같은 결정으로 오늘 화평회담에 임하는 것이다. 당당한 임무 아닌가...
“그런데 말이야. 맨스필드가 때로 이중성을 가진 인물이 아닌가, 의심이 가는 때가 있거든?”
“그도 고민이 없을 수 없겠죠. 그래서 고마운 사람입니다. 오해를 받으면서까지 연대장 각하의 화평 선무정책을 지지해주니까요.”
“안한 것만도 못하게 된다면? 약자의 길은 언제나 조마조마하네. 옳은 길도 시혜를 바라고 사는 운명이야. 그것이 인생이고 세상살이 같아.”
‘생각이 많을수록 복잡해지니 편안한 마음으로 가십시오. 이미 화살은 시위를 떠났습니다.”
“나는 어젯밤 유서를 써놓고 왔네.”
“이해합니다. 반란군 소굴에 들어간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입니까. 그러나 만약 폭도들이 각하를 위해한다면 저희에게 타격의 명분이 주어지고, 막강한 군 화기로 초토화시켜버릴 수 있는 이유가 됩니다.”
“나의 희생을 딛고 일어선단 말이지?”
“불행히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자들이 그렇게 어리석을 리는 없습니다. 그들을 가장 이해하는 우군을 적으로 돌릴만큼 어리석지 않을 거니까요. 오히려 각하의 확고한 신념과 결단력과 용기를 높이 살 것입니다.”
“그들에게 칭찬받을 이유는 없고, 다만 우리 쪽으로부터의 공격이 사실은 더 두렵네.”
“좀더 설득해야 하는 아쉬움은 있군요. 그러나 아름다운 임무입니다. 역사에 순명하는 일입니다.”
“역사의 순명, 상당히 철학적이군. 하여튼지간에 제주도의 봄날씨는 참 상쾌하단 말이야.”
그가 말을 바꾼 뒤 감회어린 시선으로 눈 앞에 펼쳐진 산야를 바라보았다. 산골짜기에서 꿩이 푸드득 날았다.
“저기 내 술안주가 사라지는군.”
그는 유머를 잃지 않았다. 이 점을 노리고 오민균이 말했다.
“연대장 각하, 저는 여기서 하산하는 것이 낫겠습니다.”
연대장이 놀라 뒷좌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새삼스럽게 왜 그러지?”
“CIC와 업무조정이 가능한 정보장교가 적임자입니다. 그가 보증인이 될 수 있으니까요. 이동락 중위를 부르겠습니다.”
오민균은 연대장이 불안해하는 만큼 회담을 공식 확인해줄 공적 담당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협상장에서 현호진을 만나는 것이 아무래도 꺼림칙했다. 밀사는 밀사로 끝나야 한다.
“CIC 놈들...” 더 이상 말하려다 말고 그는 말을 바꾸었다. “그래, 알겠네. 운전병은 지금 내려가서 이동락 중위를 모시고 오라. 우리는 여기서 기다리겠다.”
두 사람은 지프에서 내렸다. 명령을 받고 운전병이 차를 반대 방향으로 돌리더니 쏜살같이 계곡 아래로 내려갔다. 두 사람은 천천히 비탈길을 따라 내려갔다. 이동락 중위를 태우고 올 차량을 가능한 한 아래쪽에서 맞이할 생각이었다. 그만큼 적의 소굴로 들어가는 것이 심리적 압박을 주었다.
“오 소령, 적의 생각이 바른가?”
연대장이 새삼스럽게 물었다.
“연대장 각하, 이 전쟁은 단순한 좌우 대결이나, 경찰과 주민간의 대결로 보시면 안됩니다.”
“그럼 뭔가.”
“진정한 해방과 독립과 연관된 대결입니다. 역사성을 갖고 있습니다.”
“역사성이라... 나는 그렇게 깊게 생각하지 않네. 하지만 착잡하군.”
“제주도라는 좁은 섬에서 민족의 싹을 키운다고 생각하십시오.”
“역사성, 민족의 싹... 비약 아닌가? 대대장의 상상력은 어디까지인가.”
“간단히 볼 문제가 아니라서 그렇습니다. 제주 도민은 민족반역자들이 미 제국주의의 주구가 되어 양민을 억압하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저항의 명분이 일차적으로는 공권력의 횡포지만, 그 뒤에 거대한 국제적 음모가 있다고 봅니다. 그 음모 때문에 소박하게 살아가는 공동체의 자주성이 훼손되고 있다는 것이죠. 평화롭게 사는데 국내의 탐욕 집단과 미 제국주의자가 결탁해 살육전을 벌이고 있다는 겁니다. 일본 제국주의의 변형된 얼굴입니다. 여기서 공산주의는 갖다 붙이는 명분일 뿐입니다. 지엽적이고 부수적이라는 것이죠. 저는 제주 인민의 세계관에 가닿아야 제주 문제가 풀린다고 봅니다. 공포와 무력으로 제압한다고 해서 그들 내면까지 정복할 수 없으니까요. 그들의 내면 속엔 아나키스트의 본성이 담겨 있습니다.“
“오 소령은 아나키스트 중독자군. 아나키즘을 너무 단순화시켜서 보는 것은 아닌가?”
“맞습니다. 단편적으로 알 뿐입니다. 다만 제가 존경하는 이시하라 선생의 말씀을 새기고 있습니다. 평화로운 것은 평화롭게 살도록 두어야 한다고 봅니다.”
“너무도 단순명쾌한 명제군.”
숲 사이로 푸른 바다가 보였고, 음지의 산귀퉁이엔 지지 않은 철쭉 군락이 산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일일이 눈여겨 숲을 바라본 김익창의 얼굴에 쓸쓸한 기색이 감돌았다. 풀잎 하나, 나무 하나를 새롭게 보는 눈빛이었다.
“연대장 각하, 동물의 세계에 펭귄 현상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연대장의 긴장한 모습을 풀어주고자 오민균이 화제를 돌렸다.
“펭귄 현상?”
“네. 일종의 동조 현상이죠. 우두머리 펭귄이 빙산 아래로 뛰어내리면 다른 펭귄들도 덩달아 뒤따라 뛰어내린다는 것입니다. 믿고 따르는 동조 현상이죠. 그런 우두머리가 선택되기까지는 평소 그의 용기와 힘과 지혜를 다른 펭귄들이 본다고 합니다. 믿고 따를 만한 지도력과 용기와 헌신성이 있는가, 그가 하는 행동이 과연 옳은가... 지도자가 오판하면 모두 죽게 되니 관찰 과정을 거친다는 것이죠.”
“우리에게 그런 지도자가 있을까. 어떻게 생각하나.”
“제가 묻고 싶습니다.”
“우리나라에선 지도자가 탄생할 수 없어. 어떤 나폴레옹도 쫄따구가 되고 말아. 세에서 밀린다 싶으면 외부세력까지 끌어들여서 박살내버리니까. 이익 앞에서는 쥐새끼보다 더한 야비한 모습을 보여주니까. 마못보다도 못해.”
“마못이라뇨?”
“초원에서 땅굴을 파고 사는 다람쥐과의 동물이지. 그것들도 펭귄 우두머리처럼 대장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네. 대장은 초원의 언덕에 올라 멀리 보며 적이 있나 없나를 살피고, 안심이 된다 싶으면 휘하 졸개들에게 활동 범위를 알려주네. 그의 동작 하나가 마못 무리의 생존의 근거가 되는 거야. 그가 오판하면 천적들에게 잡혀먹히게 되니 판단력 빠르고 용감하고 영명해야 돼. 난 김달삼을 평가하지 않지만, 그자에겐 그런 면모가 있지 않나 생각하네.”
“그들은 그렇게 상징 조작을 만들어내겠죠. 지도자를 추대해 종교화하고 신앙화하는 겁니다. 단결의 정점이 없으면 망하게 되니까요. 하지만 적장을 그렇게 평가하시면 오해받지 않겠습니까?”
“신뢰없이는 만날 수 없지. 리더쉽이 뭔가. 먼저 고통받고 먼저 눈물짓고, 먼저 아우르는 힘 아니겠나. 규범적 삶만이 도덕적 우위에 있다고 볼 수 없어. 행동하는 양심으로 앞서나가야지.”
“칭찬을 하시니 각하가 더 위험해보입니다? 저를 의심하시더니...”
“난 경상도 보수 본산이야. 아량과 포용과 헌신이라는 보수의 가치에 충실하다네.”
“경상도가 사회주의 본산 아닌가요?”
“그렇지. 그들의 주력은 지금 태백산맥으로 일제히 숨어들어가 버렸네. 10.1대구사건 이후 모두 빨치산이 되었어.”
“저는 각하가 펭귄 대장, 마못 대장 같습니다.“
“나를 더욱 못된 길로 가도록 밀어붙이는군.”
그러나 그는 싫지 않은 기색으로 가볍게 웃으며 다르게 말했다.
“어쨌든 저 자들이 무엇이든 대대장이 좋아하는 ‘역사의 길’로 가면 되는 것이지?”
“그렇습니다. 당연히 역사의 길이죠. 외롭지만 가야 할 길입니다.”
“하지만 역사, 역사 하는데, 그건 관념이야. 약자나 패배주의자가 펴보는 자기위안서야. 현실은 약자들이 당하고 있다는 사실이지.”
지프가 부릉부릉 소리를 높여 산 위로 맹렬히 올라오고 있었다. 연대장은 정보장교 이동락과 함께 산 위로 올라가고, 오민균은 반대편으로 걸어서 부대로 내려왔다.
건어물상회의 청사진
“진미호 사장이 요즘 보이지 않습네다.”
사진봉은 보헤미안에서 현문선 사장을 만났다. 사실은 현문선 사장도 진미호 사장 배재정을 찾고 있는 중이었다. 풍문에는 여수와 목포로 나갔다는 소식이 들렸지만 확인된 것은 없었다. 그는 제주 읍내에서 가장 활동적이었고, 해상봉쇄를 뚫고 먼 바다로 나가는 바다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해양학교 기관과 출신이어서 동력선을 부리는 데 그만한 기술력을 가진 사람도 없었다.
“고 자가 거래선을 육지 쪽으로 튼 모양이디오?”
“그런 것 같소. 여긴 배겨낼 수가 없으니까.”
그 말은 사진봉이 들으라고 한 말이었다. 사진봉은 불쾌했지만 참았다. 시비하거나 다툴 대상이 아니라고 본 것이다. 현 사장은 그대로 불쾌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들의 등쌀에 어느 누군들 제주항 주변에서 얼쩡거릴 수 있는가.
“고래서 나두 생각이 있습네다. 현 사장님의 고충도 있으니까니 고런 것은 점차 해결될 거우다. 제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현 사장님이 갖고 있는 일도리 소금창고 있디요?”
“네. 있소이다.” 현문선 사장은 엉뚱한 질문이라서 되물었다. “왜 그러시오?”
“지금 비어 있디요?”
“그렇소. 빈 창고로 남아있소.”
“고걸 나한테 넘기시오.”
현문선이 조금 놀란 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사진봉이 천천히 말했다.
“현 사장님, 우리가 이래 살 수는 없습네다. 자립해야디요. 고 창고에 건어물 공장을 차리고자 합네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는 없으니까니 건어물 공장 차려서 썩어나가는 물고기들 말려서 육지로 보내야디요. 사업 되지 않갔습네까? 내 깊이 생각했습네다. 오신애를 가슴 졸이게 살게 할 수 없디요. 청년단 또한 이래 살 수 없지 않가시오? 주민들 고만 괴롭혀야디오.”
듣던 중 반가운 말이었다. 이 자가 이런 생각까지 다 하다니. 현문선은 속으로 놀랐다. 그리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일전쌍조(一箭雙雕)고 일거양득이다. 화살 한 대로 두 마리 꿩을 잡는 것이다. 난리 통에 제주 인근 바다는 물반 고기반이다. 해상이 봉쇄돼 어선들이 출어를 못하고 있어서 물고기 개체수가 엄청 불어나 있었다. 근해에서 건져올린 물고기는 판로가 막혀 가정용으로 쓰는 나머지는 길가에 버리거나 퇴비로 쓰고 있었다.
“사 단장이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하셨소?”
“길가마다 생선 썩는 냄새가 꼭 여자 샅 냄새 같아서리, 칙칙하고 해서리, 제가 아이디어를 냈습네다. 그리고 이대로 살 수 없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네까. 우리가 민폐가 되고, 갈수록 아이들은 날뛰디요. 전등불에 달라붙는 불나방들 꼴이어서 명색이 단장으로서 후사를 도모해야디요.”
“잘 생각했소. 그렇다면 협조해야지요.”
“고맙습네다. 임대료는 어떻게 하길 원하십네까?”
“비어있으니 그대로 사용하시오. 좋은 길로 가겠다는데 어찌 협조하지 않겠소? 사태가 수습이 되면 그 건은 그때 얘기하기로 하고, 언제든지 사용하시오.”
“그래도 임대료 드리겠습네다. 계약서를 써야디요. 분명히 해야디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비어있으니 걱정 말고 쓰세요. 대신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뭡네까?”
사진봉이 무슨 함정이 있나 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우리 며늘아이를 찾아주시오. 비밀협상이 제대로 진행 중인지도 살펴주시오.”
사진봉의 머리에 스쳐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이 사람은 어떻게든 입산한 현호진과 선이 닿아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며느리는? 산으로 들어갔다면 며느리 동선을 알았을 것인데, 알지 못하니 입산한 건 아니다. 그렇다면? 정말 그 여자 정용팔과 눈이 맞아 도망간 것일까?...
제주 주둔 9연대장이 폭도대와 비밀협상을 진행 중이고, 사태가 어떤 방향으로 굴러갈지 몰라서 군정 지휘부는 주의깊게 지켜보고 있다고 했다. 군정의 방침은 토벌이 기본이지만, 이상주의자 맨스필드 군정관이 협상을 강조하고 있으니 상황을 좀더 지켜보고 있다고도 했다. 사진봉은 양측의 결정 여하에 따라 태도를 결정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흐름을 아는 것은 아니다. 이젠 그곳에서도 빠져나오고 싶다. 군대생활이 아니니 언제든지 독립을 해도 되는 것이 청년단의 입장이다. 그래서 업무 얘기를 계속하기로 한다.
“우리가 새로이 활로를 찾기로 했으니까니 현 사장님의 적극적인 지원과 협력이 필요합네다. 임대차 계약을 맺어야 제가 안심하갔십네다.”
이렇게 말하는데 오신애가 그들 좌석으로 다가왔다.
“사장님 오셨어요?”
그녀는 현문선을 향해 공손히 인사했다. 한복을 차려입은 태가 두드러져서 눈이 부셨다.
“응, 그래. 내가 좀 바빠서 자주 오질 못했군.”
인사를 받으며 현문선 사장이 그녀를 자리에 앉기를 권했다. 그녀가 현문선 사장 곁에 살포시 앉았다. 오신애가 현문선을 깎듯이 모시는 것이 사진봉은 낯설었다. 대개의 손님들에겐 가볍게 목례하고 차를 날라다 주는 것인데, 현문선 사장에겐 공손한 차원을 넘어 수줍음까지 보인다. 순간 그는 야릇한 질투심을 느꼈다.
“신애 어머니가 내 집안 조카요. 신애는 남편따라 서울 가서 살다가 남편이 죽자 고향에 내려와서 이렇게 고생하고 있소. 열심히 사는 모습이 보기에 좋은데, 내가 도와준 것이 없어서 늘 미안했지. 안타깝게만 바라봤소.”
사진봉은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공연히 오해했다는 생각을 하며, 제주도는 한 자리 건너면 일가붙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그럼 장인쪽 어른이시군요.”
사진봉은 얼결에 그렇게 말하려다 참았다. 아직은 그럴 처지가 못된다. 그러고 보니 그녀가 현씨 집안과 교류가 빈번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어르신은 제주의 인격자세요. 일찍이 고향에 학교를 세우셨구요. 저희는 소학교 다닐 때 어르신이 보내준 공책과 연필로 공부를 했어요. 일본에서 돈을 벌어서 제주도 어린이들에게 공책, 연필, 필통, 가방을 선물로 보내주셨어요. 그래서 어린이들에게 신화가 되셨어요.”
사진봉이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존경합네다. 사실 저도 뼈대있는 집안의 후손입니다. 아버님이 서양 문물이 들어올 적에 평양에서 천주학을 하시고, 일본놈한테 쫓겨서 만주로 도망을 가셨지요. 저는 외가에 맡겨져서 컸는데 늘 외롭고 배가 고팠습니다. 평양역으로 나와서 얼쩡거리다 여기까지 흘러왔습니다. 근본없는 자식이 아닙네다.”
그는 서울말과 평안도 말을 번갈아 썼다.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는 뜻이었다.
“내 일찍 알고 있었소.” 현 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뼈대있는 집안의 자제는 감추려 해도 숨겨지지 않지. 꼴이 어디에선가 나타나는 법이오. 사 단장이 좋은 일 하시겠다니 힘 닿는 데까지 돕겠소. 정 붙이면 다 내 고향이오.”
사진봉이 깊숙이 머리를 숙였다.
“대신 주민들에게 예를 갖춰주면 좋겠소. 같은 주민으로 살려면 주민 마음을 사야 해요.”
“무슨 뜻인지 알가습네다. 피안도 말도 사용치 않구 살아야디요.”
현문선 사장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고, 사진봉도 뒤따라 일어나 머리를 수그렸다. 현문선 사장이 중절모를 눌러쓰고 밖으로 나가자 사진봉이 말없이 다방 뒷문으로 나갔다. 뒷문쪽에는 살림집인 별채가 붙어있었다. 그가 방으로 들어서자 방안 전체에서 화장품 냄새가 짙게 풍겨왔다. 곧바로 오신애가 들어왔다.
“어르신이 당신을 곱게 봐주셔서 좋아요. 회사 차려서 자립하면 사장이 되는 거여요?”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난리통에도 무언가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지금 얼마쯤 모아져 있나?”
“부족하지 않을 만큼... 그 돈으로 건어물상도 하고, 신문사도 할 거예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소문이 났어요. 저번 횟집 모임이 그거 아니었나요? 신문사 접수건?”
그는 대꾸하지 않고 현문선 사장이 말한 것을 머릿속에 되새겼다. 민심을 사야 한다. 변신을 꿈꾸는 데는 주민에 대한 예의가 선결되어야 한다...
회담장의 눈물
지프가 산비탈을 돌아 한참 올라가자 눈앞에 연대본부가 내려다 보였다. 경사진 도로를 지그재그로 오르니 시간이 걸렸을 뿐, 직선거리로 따지면 대정면 소재지와 모슬포가 바로 눈아래 있었다. 고지 건너편 양지바른 쪽에 산간마을이 숨듯이 자리잡고 있었다. 커브 길에서 소를 몰던 초부(樵夫)가 나타나더니 지프를 가로막았다. 멎은 지프 앞으로 그가 다가와서 물었다.
“9연대장 각하십니까.”
“그렇소.”
그러자 그가 품에서 때가 전 누런 천을 꺼내들어 건너편 골짜기 쪽을 향해 몇차례 머리 위로 흔들었다. 그쪽에서도 누런 깃발을 좌우로 휘날리는 신호가 돌아왔다.
“비탈로 가십시오. 마을 옆에 구억국민학교가 있습니다.”
초부는 사라지고 지프는 그가 안내해준대로 산비탈을 건너갔다. 구억국민학교와 산간마을은 제주도에서 가장 높은 고지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한라산의 밀림지대가 동북으로 길게 뻗어있는 숲속이었다. 동남쪽으로는 중문면 일대에서 해안선까지, 서남으로는 대정면 일대와 모슬포까지 조망이 훤히 트였다. 산간마을에서는 내려다 볼 수 있지만, 부대에서는 위치 파악이 어려운 지형이었다. 무장자위대는 숲 사이로 읍내와 부대를 빤히 관측하고 있었으므로 산 아래의 일거수일투족을 손안에 놓고 보는 꼴이었다.
학교 정문에는 2명의 보초가 입초하고 10여명이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보초는 일본군대 식으로 거총의 예를 취하며 김익창의 차를 학교안으로 통과시켰다. 무장대의 복장은 일본군복과 함께 일반 농민복‧작업복, 여자는 치마와 저고리 적삼 차림이었다.
“주변을 눈여겨 보고 메모할 것 있으면 하게. 필요할 때가 있을 거야.”
연대장이 이동락 중위에게 낮게 말했다. 학교는 낡은 건물 한 동과 부속건물, 풀이 자란 조그만 운동장이 들어서 아주 작고 단출했다. 현관에 지프가 멎자 한 무리의 무장대가 쏟아지듯 차 그 앞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의 시선이 일제히 김익창에게 쏟아졌다. 고도의 심리전이란 것을 그는 알아채고, 이런 때일수록 의연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느릿느릿 지프에서 내렸다. 무장대는 한 점 흐트러짐없이 그를 살피고 있었다.
김익창은 교실 한쪽 햇볕이 잘 드는 일본식 다다미 방으로 안내되었다. 교장의 내실로 쓰던 방으로 보였으나 장식은 없었다. 다다미방 중앙에는 단체 식탁인 듯 기다란 탁자가 하나 놓여있고, 그것을 가운데 놓고 8명의 폭도들이 미리 앉아있다가 그가 들어서자 일어나서 예를 갖추었다. 그 중에서도 삼십대 초반 쯤 되어 보이는 키 큰 미청년이 눈에 들어왔다.
“어서 오십시오. 외계보다 더 먼 길을 찾아주시니 고맙습니다. 저 김달삼입니다.”
그는 서울 말씨를 쓰고 있었다. 대정면 출신으로 알고 있는데 대구에서 자란 사람이었다. 동학에 고향사람이라는 동질감이 생겼다. 향토인답지 않게 그는 모던한 시를 쓰는 허무적인 도시적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가 필터가 있는 담배를 권했다. 미제 럭키스트라이크였다.
“여기서 미제담배를 얻어 피는군요. 미제(美帝)를 미워한다더니 미제(美製) 담배군.”
그가 말하자 김달삼은 조용히 웃었으나 나머지는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불쾌하다는 뜻이었다. 김익창은 여유있게 담배를 탁자에 탁탁 두드려 다진 다음 입에 물고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김달삼의 얼굴은 아무리 뜯어보아도 미남형이었다. 누구에게나 호감을 살만한 청년이었다. 겸손하고 침착해 보였다. 그밖의 인물들은 대체로 나이가 사십을 넘긴 자들로 보였다. 햇볕에 탄 검은 얼굴들에 주름살이 깊었고, 한결같이 무식해 보였다. 그들은 눈을 내리까는 듯하며 곁눈질로 김익창을 훔쳐보고 있었다. 두목이 그들에게 둘러싸여있는 것처럼 보였다.
다과 시간이 끝나자 김익창이 먼저 용건을 꺼냈다.
“귀하가 진짜 김달삼이고 실권자입니까?”
“왜 그런 말을 하십니까. 결례지 않습니까? 그걸 모르고 오셨습니까?”
당장 다른 쪽에서 반발이 나왔다. 주변의 시선들이 날카로웠다. 이럴수록 그는 배짱이 있어야 한다고 속으로 다졌다.
“나는 하도 젊고 미남이고 영화배우 같아서 내가 상상하던 범법자가 아니라고 생각되어서요.”
“범법자요? 우리가 범법자라구요?”
느닷없이 좌중에서 와크르 웃음이 터져나왔다. 긴장된 상황에서 전혀 엉뚱한 말이 나오니 그들이 먼저 웃고 마는 것이었다. 김달삼은 웃지 않았다.
“나에 대한 연대장 각하의 좋은 평판도로 이해하겠습니다. 하지만 애국심이 중요하지 외모 같은 것은 그리 중요하다고 보지 않습니다.”
“맞는 말이오. 한 사람이 백사람 천사람의 몫을 살면 애국자요.”
그때 단단한 체격의 협상자가 소리질렀다.
“협상장에 권총이 뭡니까? 연대장 각하의 허리에 찬 권총, 당장 내려놓으시오! 회담장은 비무장인데 무장이라니요? 회의 중엔 우리가 권총을 보관하겠습니다!”
김익창이 놀라지 않고 말했다.
“당신들 왜 그리 겁이 많소. 당신들 수백 명이 이 권총 한 자루 땜에 쩔쩔매오? 이 권총은 군인이 자기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자살용이기도 하니 그리 염려 마시오.”
“우린 연대장 각하의 자살도 막아야 합니다! 우리가 독박 뒤집어쓸 일 있습니까?”
김달삼이 말한 자를 바라보더니 제지했다.
“그만 하시오. 그리고 연대장 각하, 원칙대로라면 무기 휴대는 안되지요. 하지만 지금 원칙대로 되는 게 있습니까. 이해합니다.”
그가 좌중을 향해 다시 말했다.
“나머지 반은 물러나시오. 그리고 단 둘이 앉아있대도 무기는 인정하겠소.”
그는 배포가 있었다. 8명 중 반만 남고 나머지는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김익창이 권총 혁대를 풀어 통째로 건너편의 협상위원에게 건넸다. 그가 말없이 받아 밖으로 내보냈다.
“감사합니다.”
김달삼이 머리를 수그렸다. 창 밖에서는 무장자위대원들이 낡은 구구식 총을 거총한 채 일정 간격으로 순찰을 돌고, 운동장에는 팔십 여 대원들이 4열 횡대로 열을 지어 앉아 있었다. 모두가 협상을 지켜보는 모습들이었다. 김익창은 순간 저것들이 이 회담에 목을 매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교정의 무장대는 주로 농어민 장년층이었으며 여자도 꽤 있었다. 무기는 미제 카빈과 일본군 99식 소총을 휴대했는데 총기를 멘 숫자는 3분의1 쯤 되었다. 나머지 비무장자는 굴을 파는 노동자거나 땔감과 보급투쟁에 나서는 부류들일 것이었다.
김익창은 일본 유학시절 얘기, 학병 이야기를 창밖까지 들리도록 길게 늘어놓았다. 가능한 한 느긋하게 보이려는 태도였다. 그리고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알고 있다는 듯이 걱정하는 투로 말했다.
“산중생활은 의식주가 불편할텐데 어렵지 않소? 먹는 것이 가장 큰 걱정일텐데... 그런 가운데서도 서로의 통신은 어떻게 하길래 연락이 그토록 세밀하오?”
“밖에 모두 해산시키시오.”
회담의 핵심에서 벗어난 듯하자 김달삼이 옆의 협상자에게 지시했다. 협상자가 밖으로 나가 손짓하니 교정의 대원들이 그림자도 없이 사라졌다. 창밖에 얼쩡거리는 자들은 그대로 남았다.
“국방경비대 제9연대가 지금까지 전투를 개시하지 않는 이유를 아시오?”
김익창이 말하면서 김달삼을 쳐다보았다.
“애국 군대의 길을 가고 있다고 봅니다. 국방경비대는 우리가 궐기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를 알고 있을테니까요. 장병들이 우리에게 동정과 호의를 갖고 있는 줄 알고 있습니다.”
“맞소. 그러나 군대는 개인의 뜻에 관계없이 명령만 내리면 복종하고 전투를 하오. 만일 오늘 회담이 결렬되면 다음번에는 귀하와 내가 전투장에서 만나게 될 것이오.”
그러자 김달삼이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다분히 주변을 의식하는 태도였다.
“전 제주 도민이 우리를 지지합니다. 당신들이 포위돼있소. 협박하지 마시오!”
“협박이면 좋겠소. 내가 경찰과 당신들의 교전 상황을 보았더니 제주도에서 돌담을 방책으로 하는 사격전은 효력이 없다는 것을 알았소. 제주도에서는 박격포가 제일 좋은 무기요. 그래서 박격포부대가 들어오고 있는 중이오. 서귀포 성산포 제주북항 모슬포 앞바다는 해상 봉쇄되고 미해군 함대가 지키고 있소.”
“미제 앞잡이!” 하고 30대 중반 쯤 돼보이는 협상자가 소리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당신,우리 겁주러 왔소?”
“앉으시오.” 김달삼이 위엄있게 말하며 협상자를 주저앉혔다. “예의를 차려야 합니다. 상대방을 비굴하도록 몰아가면 우리 또한 비굴한 상대가 됩니다. 싸우려고 회담합니까?”
그때 젊은 여성 두 명이 들어와서 비워진 찻잔을 회수해 가더니 다른 찻잔을 가져와서 각자 앞에 차려놓고 차를 따랐다. 분위기가 험악해지면 진정시키려는 전략인 듯이 보였다. 그만큼 그들은 협상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김익창은 그것을 알아차리고 오히려 여유로웠다.
“다 아는 것 가지고 신경전 벌이지 맙시다. 나는 진실로 여러분이 걱정이 되어서 한 말이오.”
그러나 9연대는 이 시간 현재 박격포 1문도 갖고 있지 않았고, 보급된다는 것도 거짓말이었다.
“연대장 각하는 미군정하의 군대인데 나와의 교섭 결과에 대해 약속을 이행할 권한이 있습니까?”
“그건 염려하지 마시오. 나는 개인자격으로라도 참여하고 싶었소. 이래선 안된다고 보기 때문이오. 나는 1차부터 4차까지의 회담 제의 때와 똑같이 미군정장관의 지시에 따라 회담장에 왔으며, 내가 가진 권한은 미군정장관 딘 장군의 권한을 대표합니다. 오늘 나의 결정은 딘 군정장관의 결정이오. 그 점 분명히 보장하오. 그러면 내가 귀하에게 묻겠소. 귀하가 대표권을 가지고 있소?”
“제주도민 의거자들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미리 준비했던 노트를 들여다 보면서 연설조의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 내용은 비현실적인 내용도 있었지만 공감할 부분이 많았다. 제주도민의 억울함과 분노를 대신한다는 것인데, 민족반역자와 일제경찰, 서북청년단을 축출하고 제주 도민으로 구성된 선량한 관리와 경찰관으로 행정을 수행토록 조치하면 순종하겠다는 것이었다.
김익창이 말했다.
“해방이 되고 2년 동안 나는 미군정 하에서 군인 노릇을 하면서 미국의 자유민주주의를 배웠소. 그랬는데도 아직까지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모르겠소. 당신도 마찬가지일 거요. 그동안 공산주의 사상을 연구했다고 한들 얼마나 알겠소. 똑똑히 알지도 못하는 공산주의니 민주주의니 하면서 아까운 청춘과 생명을 버리는 일은 죄악이오. 우리가 확실히 알고 믿을 수 있는 단 한가지 사실은 권력은 미국이 쥐고 있고, 미국은 세계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전승국이란 점이오. 지금 한반도에 화력이 집중되고 있소. 참담한 현실이오. 그러니 여러분에게 억울하더라도 투항하라고 권면하는 것이오. 무기를 버리고 귀순하여 나와 합심하여 조국 건설에 매진합시다.”
“연대장 각하는 정의감이 있고, 분별력있는 사람인 줄 알았소이다. 그런데 민족 반역자나 악질 친일경찰이 자기들의 죄상을 은폐하기 위해 제주도민을 공산주의자로 덮어씌우고 있는 현실을 왜 보지 않으려 합니까? 우리들더러 꼭 공산주의자가 되라고 밀어붙이는 것이오?”
김달삼 곁에 앉아있는 협상자가 반발했다. 김달삼이 말했다.
“연대장 각하가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는 더 이상 이 회담을 진행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최후의 1인까지 싸울 것이고, 이제는 더 믿을 곳이 없으니 소련군에게 지원을 요청할 것이오. 막다른 골목에 이르면 누구 손인들 못빌리겠습니까.”
“큰일 날 소리요. 그렇게 나간다면 결국 당신들은 공산당이거나 공산당의 사주를 받고 움직였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꼴이오. 그렇게 되면 다 죽어요. 미국이 그렇게 가기를 유인하고 있는 것 모르시오? 일본에 미리 투하한 원자탄 때문에 미국에 쓰고 남은 전쟁물자가 엄청나게 많이 남아있는 것 모르시오? 이러다가 한반도가 또다른 세계 대전의 불구덩이 속으로 빠져들어갈 수 있소. 운동은 힘겹고 어렵고, 나름의 순결성과 순정성을 갖고 있어도 물러날 때는 물러날 줄 알아야 하오. 지혜가 필요한 것이 지도자의 덕목이오.”
“설교하지 마시오!”
또 옆의 협상자였다.
“그렇다면 묻겠소. 소련군에 연락할 방법이나 있소?”
“있고 말고요!”
다른 협상자가 고함치듯 외쳤다.“거 보시오. 당신들은 공산당에 물들었소.”
“몰아가지 마시오. 당신들이 그렇게 몰아간다면 그렇게 갈 수밖에 없다는 뜻이오! 당신들이 우리를 공산당에 붙으라고 계속 밀어붙이고 있는 거요!”
“큰일날 말은 삼가시오. 당신들이 공산주의자가 아니면 이렇게 어마어마한 유혈 폭동을 일으켰겠느냐는 오해가 사실로 입증돼버리오.”
“우리는 결코 공산주의자가 아닙니다. 이건 자발적 의거요! 조국해방운동이요!”
“어쨌거나 시간은 당신들 편이 아니오!”
“대표님들, 다투지들 마시오. 지금이라도 자유스럽게 살 수만 있다면 난 오늘이라도 집에 돌아가겠습니다.”
다리를 부목하고 목발을 짚은 한 여인이 서툰 걸음으로 협상장으로 들어오더니 말하고, 두 손을 모아쥐고 머리를 조아렸다. 예정에 없는 행동이었던지 좌중이 주춤 뒤로 물러앉았다. 그녀는 몇 차례고 머리를 조아리고 “제발 제발 성공시켜 주시오” 하며 기도하듯 말하고 안내자의 부축을 받아 밖으로 나갔다.
“지서 습격 등 일체의 전투행위를 중지하시오. 그래야 내가 돌아가서 설득할 수 있소.”
김익창이 밖으로 사라지는 여인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의 가슴으로 알싸하게 어떤 통증 같은 것이 훑어내리고 있었다.
“좋습니다. 그건 우리가 원하는 바요. 협상안을 가져 오셨겠죠?”
“귀하도 협상안을 준비했겠지요?”
그들은 분위기를 진정시키고 의제를 하나하나 점검해 나가기 시작했다. 김달삼이 내용을 훑어보고 말했다.
“지금 전투행위를 중단하라는 것은 무리입니다. 전 도에 연락하려면 5일이 걸립니다. 통신시설이 없기 때문에 모두 인편으로 처리해야 합니다.”
김익창은 다른 두목들이 여러 명 있어서 닷새간 통문을 돌려 의사 결정하는 시간을 벌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구심을 품었다. 그렇다면 이 자와의 협상이 의미가 있을까? 만일 다른 두목이 반대한다면? 그 중 공산주의자가 끼어있다면? 합의문은 휴지가 되고 말 것이다.
“또다른 실권자가 있어서 합의할 시간을 벌기 위해 5일이 필요한 거요?”
“의심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그렇게 시간이 소요됩니다. 해상 봉쇄된 우도나 마라도 같은 데를 가려면 날짜가 더 걸릴 수 있습니다. 다 막고 있으니 진출로를 뚫는데도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연락체계가 좋다고 말씀하셨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만에 하나 연락이 닿지 못한 곳에서 사고가 나면 협상 파기가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럴 것 같았다. 김달삼이 다시 말했다.
“우도 주민 수백 명이 3·1사건대책위원회를 조직하고 제주읍 북국민학교 시위대에 발포한 경찰관에 항의하기 위해 우도 섬을 돌면서 시위행진을 한 적이 있지요. 시위대는 우도경찰관파견소를 찾아가 항의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은 사건발생 12일 후에야 외부에 알려졌습니다. 해상 봉쇄되었으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응원경찰대를 더 투입했으니 더 상황이 악화되었고, 주민들과 무장자위대는 고립무원이 돼있습니다. 연락이 닿는 대정면‧중문면은 즉각 전투중지하고, 그 밖의 지역은 24시간 이내로 할 수 있지만, 산간오지나 봉쇄된 외딴섬은 시일이 더 걸릴 것입니다.”
“그렇게 기준을 이중 삼중으로 설정하면 곤란합니다. 그렇다면 72시간 내로 합시다. 3일의 시간입니다.”
김달삼이 다른 협상위원과 상의하더니 답했다.
“3일, 좋습니다.”
다음으로 무장해제 문제를 다뤘다. 김달삼이 제안했다.
“먼저 비무장 주민들을 하산시켜 약속이 이행되는가 여부를 확인하고, 자유와 안전이 보장되면 전원 무장해제를 하겠습니다.”
“불안하다고 무장하고 있으면 귀순 의지가 떨어질 수밖에 없소. 목수는 못을 보면 박고 싶고, 어부는 바다에 나가면 그물을 던지고 싶은 것과 같이 누구나 총을 가지고 있으면 쏘겠다는 심리부터 생겨요. 기왕 무장해제하겠다고 하면 군말없이 하는 겁니다. 전쟁이란 사소한 데서 화근이 터져나오는 법이오. 그래서 총은 쏘는 것보다 관리가 더 어렵다고 했소.”
한참 생각하던 김달삼이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 지켜지는 것이지요?”
“물론이오.”
“정말 지켜지는 것이지요?”
그는 어린애같이 애걸하듯 물었다. 그만큼 절박하고 애절하다는 뜻이었다.
“맹세하오. 맨스필드 군정장관이 약속한 거요. 딘 장군을 대리해서요.”
김달삼이 고개를 끄덕였다. 절박한 사람은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경향이 있다. 일종의 자기합리화다. 그런 그의 얼굴이 고독해보였다. 지도자의 결단은 어려운 것이다. 그의 한마디 한마디에 조직의 생명이 담보되어 있는 것이다...
무장해제 문제도 합의가 이루어졌다. 제 3항은 폭도의 자수와 명단 작성 문제였다. 이 부분에 대해 김익창이 길게 설명하자 김달삼이 단호히 말했다.
“우리의 살인‧방화는 정당방위요!”
“법치국가에서 살인‧방화행위는 불법이며, 재판을 받아야 하오.”
“불의에 대한 저항은 정당합니다.”
김달삼은 굽히지 않았다. 김익창이 결론삼아 말했다.
“무장대사령관, 그럼 쉬운 것부터 해결합시다. 이 문제는 나중 다루기로 하지요.”
같은 것은 먼저 구하되 크게 다른 것은 뒤로 미루고, 역시 같은 것은 구하되 다른 것은 차차 변화시키자는 전략이었다. 전서에서 본 구동존이(求同存異), 구동화이(求同化異) 전법이다.
“좋습니다.” 김달삼도 힘든 것은 일단 피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제주도민으로 행정공무원을 편성하고, 민족반역자와 악질경찰, 서북청년단을 추방해주십시오.”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는 나도 받아들일 수 없소. 해방조국에서 이런 자들이 날뛴다는 건 민족정신상으로나 내 자존심상 용납할 수 없소. 나도 일본군 출신이지만 이건 아니요. 일본 육사 출신인 내 참모는 더욱 분명하오.”
그러자 박수가 터져나왔다. 김달삼도 뒤늦게 조용히 박수를 쳤다.
“서북청년단원들 중 범법자는 처벌하고 추방하겠지만, 제주도민만으로 행정기구, 경찰을 편성하는 문제는 나의 권한 밖이오. 내 개인적인 입장을 말하라고 한다면 우리 정부가 들어서면 민주주의 원칙에 입각하여 자연 그리 되지 않겠소?”
“순진한 생각입니다. 갈수록 경찰조직을 강화하는데 그들이 기득권을 내려놓겠습니까.”
“다음 조건을 들어봅시다.”
“제주도민으로 편성된 경찰이 구성될 때까지 군대가 대신 치안을 맡아주시오. 정말 억울하고 지긋지긋합니다.”
“이해하오. 그 문제는 내가 명쾌하게 답을 줄 수 있소. 평화회담이 성립되면 9연대가 치안을 담당하고, 경찰은 군대의 보조역할을 하게 되어 나의 지휘를 받게될 것이오. 경찰은 해체할 필요가 없고, 조직 개편해서 내 휘하에서 진정한 민중의 지팡이가 되도록 하겠소.”
박수가 터져나왔다. 그러나 김달삼은 냉정했다.
“그렇게 된다면야 우리가 여기 산 속에 있을 이유가 없지요. 연대장 각하의 나이브한 생각이 걱정스럽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연대장 각하의 뜻을 받아들일까요? 9연대는 마이노리티 아닙니까?”
“나에게는 맨스필드 군정장관이 있소.”
그러나 김익창도 사실은 자신이 없었다. 일종의 뻥을 친 셈이었다. 그는 모든 일을 선의로 해석하는 습성이 있었다.
“그럼 다른 조건은 무엇이지요?”
“가장 큰 조건은 앞에서 거론했다가 미뤄진 의거에 참가한 여하한 사람도 죄를 불문에 부치고, 안전한 귀가와 자유를 보장해 달라는 것입니다.”
김익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것은 그로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지금 돌아가겠소. 6시까지 연대본부에 돌아가지 않으면 부하들이 회담이 결렬된 것으로 단정하고 작전을 벌일 것이오. 화력이 집중되면 상황이 어떻게 된다는 거 알겠지요?”
일종의 겁박이었다. 회담장에 아연 긴장감이 감돌았다. 김달삼이 더 당황하는 빛을 보였다. 그는 지구보다 무거운 책임감을 갖고 있었다.
“곽일도 위원, 어떻게 생각하시오?”
김달삼이 회담자 중 한 사람을 바라보고 물었다. 몸이 말랐지만 큰 키에 귀공자형의 그는 김달삼과 비슷한 연배였지만 화석처럼 앉아서 회담 진행과정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침착하고 조용해서 김익창은 그가 회담장에 와있는 줄도 몰랐다. 그는 본명이 현호진이었다.
“잠깐 밖으로 나가시지요.”
곽일도가 제의하자 두 사람이 밖으로 나갔다. 농부들 행색의 나머지 협상자들은 멀뚱히 허공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 눈에 절망의 빛이 또렷했다. 한참만에 돌아온 두 사람이 다시 자리에 앉은 뒤 김달삼이 말문을 열었다.
“오늘 회담에 관한 연대장 각하의 성의를 근본적으로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혀 엉뚱한 발언이었다.
“나를 의심한다고요?”
“회담이 오늘 합의를 보지 못하면 두 번 다시 열리기 힘듭니다. 사실상 결렬되는 것입니다. 연대장은 회담 결렬과 토벌의 명분을 쌓기 위해 나를 찾은 것입니다. 안그렇습니까?”
그는 각오한 듯 단호하게 따졌다. 이번에는 김익창이 긴장했다.
“나를 못믿겠다고요?”
“그렇습니다.”
김익창은 눈에 힘을 주며 또박또박 말했다.
“정 그렇다면 오늘 회담의 진정성을 보여주기 위해 나의 가족을 인질로 제공하겠소. 그럼 믿겠소? 내 가족들을 인질로 데리고 있을 장소를 알려주시오. 나는 이 협상을 반드시 성공시키고 싶소.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추후에 설득해서 성사시킬 일이 있소. 나는 대한민국 국방경비대 9연대장으로서 명예를 생명보다 위중하게 여기는 지휘관이오. 나는 또 여러분의 연대장이지 적이 아니오.”
“정말입니까?”
한 협상자가 말하고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그들은 김익창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목을 걸고 있는 것 같았다. 찻잔을 나르던 여자가 울음을 삼키며 쏜살같이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것이 무슨 신호탄이라도 된 듯이 밖에서 울음소리와 함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아, 우리 연대장님, 연대장님, 우리 제주 땅에 평화가 오는 것입니까?”
“연대장님, 고맙습니다!”
저고리 차림의 여자가 회담장 안으로 달려들어 왔다. 그녀는 퉁퉁 분 젖가슴을 내보이면서 외쳤다.
“9연대장님 각하,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집으로 돌아가서 아기를 돌보게 되었습니다. 산 생활이 뜻있다지만 아이를 생각하면 하루도 사는 것이 지옥입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회담 성사를 위해 가족을 인질로 내세우겠다니 그의 진정성을 믿고 그들은 한결같이 감격하고 있었다. 농민복 차림의 남자가 들어와 울먹이며 외쳤다.
“친애하신 연대장님 각하, 우리를 보호해주십시오. 우린 외롭습니다. 너무나 외롭습니다. 굽어 살펴주십시오. 널리 굽어살펴 주십시오,”
그는 끝내 소리내어 엉엉 울었다. 김달삼이 김익창을 주시했다.
“각하의 진정성을 알았습니다. 이렇게까지 애족하시니 각하의 애국적 충정은 청사에 길이 빛날 것입니다. 저희는 노령하신 부모님과 연약한 부인과 아이들을 불편한 산에서는 더 이상 모실 수가 없습니다. 이제 안심해도 되겠지요?”
김익창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원이 약속 이행에 대해 불안해 하니 각하의 가족들을 우리가 지정하는 민가에 옮겨와 지내시도록 하겠습니다. 군인 배치를 금하시고, 대신 우리가 일정기간 경호를 하겠습니다.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김달삼이 지정한 민가는 대정면 전 면장의 집으로 김익창도 부임 초 한때 숙소로 사용했던 주택이었다.
“그것도 72시간 내로 국한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안전하게 구호된다면 내 식구들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남녀 할 것없이 회담장 앞으로 모여들어 더 크게 머리를 조아리며 울고 있었다. 그것은 가슴 밑으로부터 우러나온 괴이한 절규 같았다. 김달삼이 그들을 향해 말했다.
“아직 끝난 것이 아니오. 진정들 하세요.”
장내를 정리하고 회의가 속개됐다. 김익창이 제안했다.
“범법자의 명단을 자작성하여 책임자를 가려주시오.”
“각하, 다만 조건이 있습니다. 범법자에 대한 구속 수감은 군에서 맡아주십시오. 그러면 수용하겠습니다. 경찰은 분명히 반대합니다.”
“무슨 뜻인지 알겠소. 그러나 우리가 그런 권한이 있을지 모르겠소. 미군정과 협의할 사항 같으니 협의를 통해 최대한 반영하도록 노력하겠소.”
“범법자의 경중을 분명히 해주시오. 가능한 한 방면해서 생업에 종사토록 해주시오.”
김달삼은 이제는 간청하고 있었다.
“하지만 귀하와 다른 두목급들은 중벌을 면하기 어려울 거요.”
김달삼이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대답했다.
“받아들입니다. 우리 제주도엔 그런 전통이 있습니다.”
그가 길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구한말 제주도에 이재수 난이 있었다. 대한제국은 부족한 황실재정을 채우기 위해 무리한 징세 정책을 폈다. 조정은 제주도의 어장과 그물, 목초지, 말에게까지 세금을 매겼다. 천주교가 전파되면서 서울 조정은 조직을 갖춘 천주교의 간부급 신자들에게 봉세관의 중간 징세 역할을 맡겼다. 그러자 이들이 권한을 남용했다. 봉세관의 징세는 전국적으로 시행되었지만, 그중 제주도는 본시 가난한데다 중앙정부의 혜택이라곤 없이 받아만 가니 반발이 컸다. 조세 수탈에 저항한 민회가 열리면서 주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이때 관병이 증파되어 주동자를 체포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다. 주민과 봉세관 역할을 수행하던 천주교 신자들과 민간간의 충돌도 잦아 거기서도 사상자가 다수 발생했다.
이재수난은 제주만의 독특한 향권(향촌 사회의 권력)을 위협하는 서양종교에 대한 반감과 착취를 일삼는 봉세관의 독점적 징세권 행사와의 충돌이었다. 중앙정부로부터의 소외와 차별에 대한 저항의식도 함께 표출되었다. 이데올로기적 표현으로 보자면, 아나키즘의 한 저항 형태였다.
“증파된 관군은 대대적인 토벌에 나섰지요. 관덕정 앞에 수십 명의 시신이 놓이고, 많은 사람이 생포돼서 처형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때 시위 지도자 이재수, 오대현, 강우백 세 장수가 나서서 제주 인민을 살려주는 조건으로 목을 내놓겠다고 나섰습니다. 세 장수가 묶여서 배를 타고 한양으로 압송되어갈 때, 제주도민이 모두 제주항에 나와서 땅을 치며 통곡하며 환송했습니다. 세 장수는 한양으로 올라가 곧바로 효수되었습니다. 저 역시 제주도민을 살리는 일이라면 언제든지 목을 내놓겠습니다.”
김달삼이 창밖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고독한 그늘이 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모든 무장대의 귀순과 무장해제를 시켜준다면, 합의서에 명문화할 수는 없으나 주모자를 내 개인적으로 도외(島外)나 해외 탈출을 묵인할 수 있소.”
김익창이 말하자 모두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모슬포 항에는 나포된 일본 어선 10여척이 묶여있었다. 귀순 절차가 잘 마무리되면 9연대 장악하에 있는 어선 중 한두 척을 내줄 생각을 그는 갖고 있었다. 스스로 엉뚱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그렇게라도 하고 싶었다. 그리고 사람의 일인지라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배를 훔쳐 도망가버렸다고 하면 그만이다. 나포되지만 않으면 된다.
“남양군도 밀림으로 가서 세상이 좋아질 때까지 살다가 오는 것도 방법이겠지요. 그곳 주민들을 계몽하면서 영원히 정착해 살아도 좋을 것이고. 그러면 우리 국토가 넓혀지는 것 아니오? 내가 태평양전쟁 때 그곳에 가서 복무했소. 근심없이 평화롭게 살만한 곳이오. 그곳을 접수해 살면 우리 식민지가 하나 생기는 거요.”
“연대장 각하, 나의 실천 현장은 내 조국, 내 땅이오.” 김달삼이 낮게, 그러나 힘주어 말했다. “내 개인의 생사 문제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죽고 사는 문제는 초월했습니다. 저 사람들 중 일부 젊은이들은 실제로 배를 타고 제주도를 탈출해서 남양의 밀림지대로 가서 살겠다는 사람도 있지요. 하지만 자기들 가족이 피해를 입으니 피눈물을 쏟으며 머물러 있습니다. 복수심만이 생존의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북으로 안가겠소?”
“여기나 거기나 매한가지 아니겠습니까. 지긋지긋합니다.”
“알겠소. 하지만 오해가 있다는 건 알아두시오,”
“알고 있습니다. 사람 사는 세상이 되면 북쪽 사람들을 제가 데려오겠습니다.”
이윽고 합의문이 작성되었다. 완성된 합의문을 쥐자 김익창은 막상 허탈했다. 이런 종이 한 장 때문에 얼마나 많은 고뇌와 번민과 고통, 그리고 힘들게 멀리 돌아왔는가, 이 종잇장 하나가 그토록 아프게 하다니... 이름할 수 없는 슬픔의 인자들이 싸아하니 가슴을 훑고 지나가고 있었다. 금방 아이에게 젖을 물릴 수 있다고 기뻐하던 여자의 눈물어린 모습이 떠올랐다. 후련하고 기쁘다기보다 웬지 슬펐다.
“무장해제가 순조롭게 마무리되고 모든 약속이 준수되면 나는 자수하겠습니다. 책임을 지겠습니다. 법정에 가서 봉기 참가자들의 진정한 거사 이유, 경찰과 청년단의 만행을 만천하에 고발하겠습니다. 그동안 언론이 우리를 너무나 죽였습니다. 그들은 강자 편에만 섰습니다. 약자의 억울한 점은 눈꼽만큼도 배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더 잔혹합니다. 그래서 제가 대신 법정에서 피눈물로 호소하겠습니다. 나는 이재수가 되겠습니다.”김달삼의 목소리는 낮았으나 비장함이 서려 있었다. 회담장을 벗어나자 일몰이었다. 연대본부에 대기하고 있던 장교단과 장병들이 그를 맞았다.
“연대 내에 귀순자 수용소를 설치하라.”
그가 명령하자 장병들이 총을 높이 들어 환호했다. 승리의 환호성이었다. <참고문헌-김익렬 장군의 실록 유고 ‘4.3의 진실’ 및 민족문학대백과의 ’濟州敎難‘ 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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