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왜곡된 역사 속에서, 지금까지의 한일 관계는 효용을 다했다. 그러나 예고된 갈등이었다. 일본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35년, 8.15 광복과 분단체제, 그 이후 70년의 강고한 구 체제 시스템 속에서 우리 내부 깊숙이 침투해 들어와 알게 모르게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그 안에 우리 내부의 모순과 고뇌가 응축되어 있다. 이 모순과 고뇌를 탐구하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한 개인사를 통해 시대와 사회를 비추는 거울 역할을 하는 것이 문학의 영역일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외세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생존이 우선이었던 관계로 자기 자신을 앞세우지 못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잊어버렸고 안일했다. 그러다보니 역사는 박물관에 소장된 문화재인 양 화석화되고, 현대의 역사는 더군다나 묻혔다.
기자 출신 이계홍 작가의 실록소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은 그런 배경에서 나왔다. 이 소설은 2016년 10월호부터 2019년 6월호까지 문예월간 '월간문학'에 연재되었던 소설이다. 월간문학 연재를 마친 뒤 많은 부분을 수정 보완해 프레시안에 재수록한다.
이 연재물은 이른바 '팩션(Faction)'이다. 팩트와 픽션의 사이 어디에서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덧붙인 '논픽션' 형식의 소설이다. 필자는 취재의 일환으로 일제강점기 말 일본 육사 출신 젊은 생도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어지러운 시대, 그 안에서 제국주의 광풍에 휘말린 젊은이들의 시각을 잡아내려 했다. 이계홍은 "일본의 극우 정권이 일제강점기의 역사적 사실들까지도 왜곡하는 역사 모독에 대해 하나의 담론시장을 형성하자는 데 목적이 있다"고 했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은 총 33회로 나뉘어 연재될 예정이다.(편집자)
제3장 폐허에 피어오르는 사랑
모두 이시하라 상 집으로 모이기로 모의했는데 사고가 터졌다. 항공사관학교 3년 생도 홍태화가 종적을 감춰버린 것이다. 그가 사라졌으니 남아있는 생도들이 힘들게 되었다. 홍태화는 장지성과 같은 광주고보 1년 선후배 사이였다. 장지성이 몇 살 늦게 초등학교를 들어가서 나이는 그가 더 많았다.
조선인 생도들은 동구대 블랙리스트에 올라있었다. 그래서 뭉쳐있지 않으면 위험했다. 엉뚱하게도 패전 보복의 타깃이 되어있는 것이다. 극단주의자들의 행동이 불안한데 홍태화가 사라지니 장지성에게 의혹의 시선이 쏟아졌다. 동구대원 두 명이 찾아와 그에게 따졌다.
“그의 소재지를 대라.”
“나도 찾고 있는 중이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대원이 그의 어깨를 짓누르며 위협했다.
“앉아있어. 대지 않으면 네가 다친다.”
그들이 방안을 샅샅이 뒤지는 동안 장지성은 꼼짝 못하고 자리에 앉아있었다.
“서투른 짓 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그자를 데려다 놔. 조선인 몇 놈 사라진 것 알고 있을 거야. 그자를 데려다 놔.”
뚜렷한 물증을 발견하지 못하자 그들이 이렇게 위협하고 사라졌다. 며칠 뒤 오카다가 찾아왔다.
“홍태화가 여학생 집으로 도망갔다.”
“뭐, 여학생? 지금이 어느땐데 연애질이야?”
“여학생 어머니가 편찮다는 말을 듣고 나갔댄다.”
그가 낭만주의자라는 걸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는 매사 어려운 일도 쉽게 보는 친구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오카다가 말했다.
“너희들 어떻게든 학교를 빠져나가라.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도쿄 시내도 안심할 수 없으니 조심해. 동구대가 시내에도 뻗쳤다는구나. 폭력 갱단이 돼버렸어.”
“그가 돌아올 때까지 꼼짝하지 않는 게 낫겠어.”
장지성은 생도 기숙사에 눌러있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소노 아사코의 집은 미군기의 폭격으로 지붕 한쪽이 날아가고 그녀 어머니는 허리가 다쳐 움직이지 못했다. 병원은 부상자들로 넘쳐났고, 어머니는 대기자 중에서도 한참 뒷줄에 서있었다. 모든 환자들이 절박한 상황이어서 중간에 끼어들 수도 없었다.
“얘야, 집으로 돌아가는 게 낫겠다. 집에서 치료하는 것이 더 쉬울 거야.”
통증을 참으며 어머니가 말하자 아사코는 미나미 여사를 부축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막막했다. 한 여름인지라 어머니의 허리 환부는 괴사가 진행중이었다. 파괴된 집과 널부러진 가재도구, 통증을 못이긴 엄마의 신음소리로 인해 아사코는 절망상태였다. 상황을 헤쳐 나가기엔 열일곱 살의 소녀로서는 힘겨운 일이었다. 휴교령이 내려져서 집에서 가사를 돌보고 있는 것이 그나마 도움이 되었지만 모든 것이 역부족이었다.
-태화 짱, 집으로 와줘요. 집은 폭격을 맞았고, 엄마는 부상으로 움직이지 못해요. 간호가 힘겨워요.
그녀는 홍태화에게 구호 요청 편지를 보냈다. 홍태화는 편지를 받자마자 숲속 교정 뒷담을 뛰어넘어 그녀 집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발이 묶였다. 그가 돌아오지 않자 조선인 생도들이 인질이 되어버렸다. 홍태화가 돌아올 때까지 교내 기숙사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며칠이 지나자 홍태화가 아사코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불안하다. 오빠가 학교에 다녀오면 안되겠니?”
“그러겠어요? 하지만 다시 돌아올 수 있죠? 무서워요.”
“물론. 붕대랑 소독제랑 구비해놓았으니까 어머니 상처는 조금씩 진정될 거야. 생도들 데리고 나올게. 힘들면 유우키 씨한테 알려.”
“센베이집도 문 닫았잖아요.”
그녀 집은 유우키 씨 집과 조그만 언덕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 완만한 언덕은 잡초와 키작은 잡목이 우거져서 편안함을 주었고, 그래서 산책 코스로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그 언덕에서 아사코는 홍태화를 만났다. 홍태화는 장지성을 따라 유우키 씨 집에 놀러갔다가 황혼녘, 언덕에 올랐었다. 그 언덕에서 둘은 운명적으로 만났다.
학교로 되돌아간 홍태화는 동포 2세 오카다를 불러냈다. 일본인 생도들은 그를 의심하지 않았고, 조선인 생도들도 그를 믿었다. 말하자면 그가 브릿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장지성을 불러달라.”
“일이 벌어졌다. 너희들은 더욱 감시받고 있어. 너희들 때문에 동구대원들끼리 내분이 일어나기도 했지. 강경파와 온건파가 대립한 거야. 그래서 지금 살벌해. 누군가 걸려들면 뼈도 추리지 못할 거야. 위험한 짓은 안하는 게 좋아.”
“마지막 부탁이야. 앞으로 이런 심부름 시킬 일도 다신 없지 않겠어?”
그는 귀국하면 두 번 다시 일본에 오겠나 싶었다. 어떻게든 탈출해야 한다. 기숙사로 돌아갔다 나온 오카다가 변소 뒤로 가라고 알리고 사라졌다. 그곳에 장지성이 와있었다.
“당장 귀교해.”
장지성은 그를 만나자마자 호통부터 쳤다.
“불가피한 일이 생겼다.”
“이런 상황에서 여학생이나 만나러 다니고. 단체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 알고 있지? 다른 생도들 생각도 좀 하라구.”
엉뚱한 생각을 하고, 엉뚱한 행동을 하는 자유인. 그래서 본의아니게 오해를 사는 친구였다.
“여학생 데리고 구경다닌 것이 아니야.”
그때 불쑥 몇 놈이 그들 앞에 나타났다.
“이 새끼들, 여기 숨어있군.”
경단 동구대원들이었다. 순찰을 돌다 두런거리는 소리에 덮친 것이다. 장지성은 기숙사로 돌아가고, 홍태화는 학교 영창에 갇혔다. 학교 무단이탈 죄목이었다. 조선인 생도들의 탈출 시도는 좌절되었다. 며칠 후 장지성은 밤늦은 시각 오민균을 찾았다.
“이시하라 선생 댁을 집결지로 삼는다. 내일 결행할테니까 오 생도가 일학년 생도를 인솔해오도록.”
“그 시간 홍태화 선배가 석방되겠습니까.”
“홍태화가 잡혀있으니까 결행하는 거야. 그놈들은 홍태화 때문에 우리가 더 이상 불필요한 행동을 하지 못할 것으로 보고 있지. 그걸 이용하는 거야.”
“선배를 볼모로 잡고 나가는 건 의리없은 일 아닙니까?”
“그는 무슨 수를 쓰든 빠져나올 친구야. 그 때문에 우리가 묶여있다는 건 더 말이 안돼. 내일 저녁식사를 마치고 일석점호 시간대 어수선한 틈을 타서 빠져나가자구. 개별행동이야. 일차 목표지점은 이시하라 선생 댁이고. 만약을 대비해 유우키씨 집을 이용하자.”
다음날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일석점호가 시작되었다. 각방에서 관등성명을 대느라 시끌벅적했다. 그 시간 오카다가 칼을 맞았다는 소식이 퍼졌다. 이중첩자 노릇했다는 것이고, 밀대에 대한 응징이라고 했다. 교내가 더욱 어수선했다. 더 이상 머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장지성은 권총을 옆구리에 찌르고 군도를 배낭에 숨겨넣은 뒤 창문을 뛰어넘어 관목 숲으로 내달렸다. 숲 가장자리에 이르러 돌담을 가볍게 타고 넘었다. 이시하라 선생 댁에는 벌써 이성유가 당도해 있었다.
“다른 생도들은?”
“각자도생이야. 오카다가 칼을 맞았다는 말을 듣고 그냥 결행했지.”
서재에 있던 이시하라 상은 내내 표정이 어두웠다.
“보다시피 동이 트기 전이 어둡소. 지금이 가장 위험한 때니 각자 신변에 신경써야 할 것이오. 치안이 극도로 취약해졌소. 패전을 국민들이 받아들이지 않소. 귀국선을 준비해야 하지 않겠소?”
“정기 여객선은 안되니까 밀선을 구하려고 합니다.”
이정길이 여자복장을 하고 나타났다. 그는 여자 옷차림으로 변장해도 어울렸다.
“그렇게까지 하고 올 필요가 있었나?”
“다 빠져나가니 경계가 심해서 감시망 뚫기가 어려웠지. 몇 명이 다쳤을 거야. 포기한 생도들도 있어. 난 식당 아줌마 옷을 빌려입고 왔어.”
오민균은 그때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나가이 군, 스기하라 대장은 시내 본부에 있나?”
오민균은 신주쿠의 나가이 집을 찾아갔다. 나가이는 오민균과 같은 구대 소속의 벗이었다. 동구대 멤버였으나 조직이 폭력화하자 탈퇴했다. 2년 선배 스기하라는 동구대 대장이었다.
“그래. 요즘은 학교보다 시내 본부에 있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
“어떻게?”
“폭력조직과 연결되고 있다. 야쿠자 조직들이다.”
“스기하라 대장을 만나게 해다오.”
“왜?”
“인사하고 떠나야지.”
“허튼 짓 하지 마라. 어제 조선인 생도를 제압했다는 얘길 들었다. 습격을 했다가 도리어 당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을 데리고 가야지. 그가 조병헌이야.”
“친구의 의리를 철칙으로 알지만 나설 때 나서라.”
나가이는 오민균과의 의리를 생각했다. 육사에 갓 입학하자 20km 단축 마라톤 대회가 열렸다. 모두들 다퉈 달리다가 나가이가 15km 지점에서 쓰러졌다. 헉헉거리기만 할 뿐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 저만치 앞서 달리던 오민균이 뛰다 말고 되돌아와 그를 부축하고 뛰었다. 힘겨워하는 그를 부축하고 오민균은 끝내 완주했다. 등수에 관계없이 성취해냈다는 것이 화제가 되어 이 소식이 육사 교내에 널리 회자되었다. 의리와 전우애는 군의 최상의 가치이자 덕목이라는 평가 아래 오민균이 표창을 받았다. 그 이후 둘은 누구보다 가깝게 지냈다.
“조선인 생도들이 무사히 귀국해야 한다. 그도 데리고 나가야 할 것 아닌가.”
“동구대 본부는 메이지 신궁 옆 숲에 있다.”
“입구까지만 안내해달라.”
나가이는 메이지 신궁 뒷골목 숲으로 오민균을 안내했다.
“너는 이쯤에서 돌아가라. 데려다 준 것이 화근이 될 수 있으니까.”
그도 오카다가 밀대 혐의로 칼을 맞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가이를 돌려보내고 그는 동구대 본부로 사용하고 있는 절로 들어섰다. 사찰은 폭격을 맞아 대웅전의 한 귀퉁이가 떨어져나가 황량했다. 대웅전의 대(臺)에 있는 촛대, 놋그릇, 천불상이 나동그라져 있었다.
“겁도 없군.”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서 손톱깎이로 손톱을 밀고 있던 스기하라가 실내로 들어서는 오민균을 노려보며 뇌까렸다. 그는 오민균의 위아래를 눈으로 샅샅이 훑었다. 장교복을 입고 허리에 군도를 찬 것이 벌써 장교가 된 행색이었다. 하긴 몇 개월 후면 임관을 앞두고 있는 처지인데, 무조건 항복을 한 바람에 졸지에 장교가 나가리가 되어버린 처지다. 나라의 패망과 함께 장교 자리가 무위로 돌아갔으니 가짜 장교로라도 행세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만큼 일본 육사 생도들은 장교에 대한 집착이 강했다. 어두침침한 귀퉁이 소파엔 세 명의 대원이 서로 붙어앉아 졸고 있었다. 뒷골목의 양아치 쯤으로 보이는데, 밤새 놀음을 했거나 갈보 집에서 몸을 탕진하고 돌아온 건달들일 것이었다.
“스기하라 선배님, 조선인 생도를 찾으러 왔습니다.”
오민균이 꼿꼿이 선 자세로 말했다.
“우리가 데리고 있다고? 근거가 있나?”
“스기하라 대장이 더 잘 알 것입니다. 조병헌 생도가 붙잡혀 왔습니다.”
“조 세이또! 소노 이누노 코가 후자케루?(조 생도? 그런 개자식이 까불어?)”
“우리의 갈 길을 막는 것은 전승국 포고령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해방이 되었으니 우리는 자유의 몸입니다.”
“포고령? 그딴 것도 있나? 조 세이또가 우리를 습격했다. 용서할 수 없다.”
“봉변을 당한 조선인 생도가 여럿입니다. 그것을 멈추라고 찾은 것입니다. 트집을 잡아 패는 것은 비겁합니다.”
“이제 육사 생도가 아니잖나. 건달일 뿐이야!”
“육사생도건 아니건 조선인들이 당하고 있습니다. 나도 타격 대상이 돼있습니다.”
“그래서 호랑이굴에 들어왔다?”
“조병헌 생도를 내놓으십시오.”
오민균은 어려운 것일수록 정면 돌파해야 한다고 믿었다. 험하고 힘들지라도 누군가 해야 할 일이라면 나서야 한다.
“돌아가라.”
스기하라가 상대하지 않겠다는 듯 몸을 돌려앉았다.
“조 생도를 내놓으세요. 그는 어떤 누구에게도 위해를 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대일본제국에 반역을 했던 거야? 대일본제국 세금으로 학교 다니고 책과 공책을 지급받고, 월급까지 받고, 그렇게 천황폐하의 은총을 받은 놈들이 반란을 꾸몄던 거야? 위선자고 배신자 아닌가. 대가를 치러야지. 무사히 돌아간다는 것이 말이 돼?”
스기하라가 다시 몸을 돌려앉더니 오민균을 노려보았다.
“조선민족이 대일본제국의 전쟁 승리를 위해 바친 희생은 큽니다. 그렇다고 어떤 보상을 바란 것도 아닙니다. 이제 제 자리에 돌아왔으니 우린 자유롭게 조국으로 돌아갈 권리가 있습니다. 당연한 절차고 순서입니다.”
“해방? 독립? 그리고 신생정부를 차린다? 웃기는 놈이군.”
“원점으로 돌아갔으니 제자리로 돌아가야 한다니까요. 우리 가는 길을 막는 것은 전승국 포고령에 위배됩니다. 그것을 주지하고 경고합니다!”
“빠가야로! 포고령, 포고령하는데 뭘 믿고 떠드냐? 그건 나와는 상관이 없다. 좋게 말할 때 나가라. 내 말 못알아 듣겠나?”
“뒷골목 조무래기들 데려다 놓고 무슨 짓입니까. 육사 생도가 깡패 두목이 되는 겁니까?”
건너편 소파 쪽에서 모욕을 느꼈던지 대원 중 한놈이 대번에 달려왔다.
“너 우리를 뒷골목 조무래기라고 했나?”
그와 동시에 그가 달려들어 주먹을 뻗었으나 오민균이 먼저 가라테 일격으로 그를 쓰러뜨렸다. 그가 개구리처럼 죽 뻗었다. 그러자 다른 두 놈이 달려왔다. 오민균은 단도를 든 한 놈을 잡아 바닥에 매다꼰고, 다른 놈을 하이킥으로 걷어차 눕혔다. 일시에 그는 사무실을 평정해버렸다. 오민균은 청주고보 시절 검도 대표였고, 유도와 가라데 유단자였다.
“못난 놈들, 물러가라!”
스기하라가 대원들을 향해 소리쳤다. 대원이 일어나 비실비실 빈 구석쪽으로 가는데 한 놈이 기분 나빴던지 뒤돌아 서서 다시 달려들었다.
“멈춰 서!”
오민균이 끄떡없이 버티고 서서 소리치자 공격하려다 말고 그가 제풀에 자리에 멈춰섰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스기하라가 그에게 다가가 발길로 걷어찼다.
“못난 새끼, 나가!”
그들이 입구 쪽으로 물러났다. 스기하라가 오민균을 노려보더니 옆구리에 찬 칼을 뽑아 책상에 내리찍었다. 꽂힌 칼이 파르르 떨었다. 오민균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버티고 서있었다.
“네 실력은 안다만 여기가 어디라고 객기를 부리나?”
“불의를 피하면 생도가 아닙니다.”
“건방진 자식! 조센징한테도 정의감이 있나?”
“저를 욕해도 되지만, 민족은 욕하면 참을 수 없습니다!”
“네가 일학년 생도들의 리더라는 말은 알고 있다만 이렇게 건방진 줄은 몰랐다. 죽기 싫으면 돌아가라! 너의 용기를 생각해서 돌려보내준다.”
“그렇게 못합니다! 조병헌을 내놓십시오.”
그러면서 책상에 꽂혀있는 단도를 뽑아들었다. 스기하라를 공격하는 줄 알고 입구쪽에 서있던 대원들이 각목을 들고 쫓아왔다.
“추태 보이지 마라. 물러나라.”
스기하라가 그들을 제지했다. 그는 오민균의 실력을 간파하고 있었다. 몽둥이를 들어도 이길 수 없는데, 게다가 오민균은 지금 칼을 쥐고 있다.
“무기 내려놓아라.”
오민균이 스기하라의 말을 묵살하고 자신의 손을 책상에 올려놓고 손등을 내리찍었다. 배짱은 배짱으로 맞선다. 피가 솟구쳤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고 버텼다.
“저는 선배님이 우리를 놓아주기 전에는 여기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무모한 짓 거두어 주십시오.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스기하라가 다가오더니 그의 손등에 꽂힌 단도를 뽑아 구석으로 던졌다.
“나가이와 친하나?”
“친구입니다.”
“과연 듣던대로다. 역시 육사 생도답다. 니가 내 자존심을 지켰다. 육사 생도의 기래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일본 놈 열 놈이 조선놈 한 놈을 당하지 못한단 말이 맞구나. 대신 일본 놈 한 놈이 조선 놈 열 놈을 이긴단 말이야, 하하하...”
스기하라가 커다랗게 웃으며 그의 등을 토닥거렸다. 그가 책상으로 가더니 서랍에서 붕대와 아까징키를 가져와 내밀었다.
“약을 바르고 붕대로 감아라. 네 뜻 알겠다. 조 생도는 비겁하게 먼저 센팅을 날렸다. 남자들 세계에서는 완력의 사용이 본능 속에 숨어 있지. 승자가 되기 위한 방법으로 휘슬이 울리기 전에 먼저 선제공격을 감행하지. 그러나 그건 일본 육사생도에게선 찾아볼 수 반칙이다. 그 자는 뒷골목 조무래기 수준의 똘마니를 먼저 공격했다. 육사 선배로서, 그리고 사나이로서 용서할 수 없지. 그래서 잡아두었다. 너 정도였다면 놓아주었을 것이다. 너를 보고 풀어준다. 데리고 가라.”
그는 승복할 것은 깨끗이 승복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는 남자의 기질을 그런 결단을 통해 과시하고 있었다. 오민균은 지하실에 감금되어있는 조병헌을 데리고 나왔다.
“태화 짱, 많이 기다렸어요. 어떻게 빠져나왔어요?”
소노 아사코가 마당으로 달려나와 홍태화의 목에 감기듯이 엉겼다.
“석방되었어. 어머니는?”
그는 미나미 여사의 부상이 걱정이었다.
“엄마는 여전해요. 차도가 없어요. 하지만 태화짱을 얼마나 기다렸다구요.”
방으로 들어서니 지붕이 뚫리고, 하늘이 환히 내다보였다. 햇살의 미립자가 방안으로 뻗어내려 무수한 먼지가 떠있었다. 처음 보았던 그대로 벽체는 허물어져 밖이 훤히 내다보였다. 다다미는 헤지고 미닫이 문도 망가져있었다. 일본집의 미닫이 문은 안방과 뒷방 사이에 형식적으로 칸막이한 문이라서 본래 튼튼하지 못했다. 그러나 주택의 골조는 망가지지 않았다. 목조건물은 콘크리트 집보다 내구성이 강해서 폭격이 휩쓸고 지나갔어도 형체는 온전했다. 미나미 여사가 누웠던 자리에서 반쯤 일어나 앉았다.
“아사코 짱이 우리 태화 짱 얼마나 기다렸다구요.”
“어머니, 그대로 누워 계세요.”
“글쎄, 나야야 할텐데.... 통증이 심해요. 학교가 폐교되었다구요?”
“네. 폐교되었습니다. 항복 조인에서 맨먼저 조인한 항목입니다. 교내에서 사고가 빈발하자 긴급 교무위원회를 열고 학생들을 묶어두지 않기로 결정하고 우리를 풀어주었습니다. 그래도 아직 남아있는 생도들이 있습니다.”
“갑작스런 일이라 당장 갈 곳이 없을 테니까.... 조선인 생도들 모두 나왔겠지요?”
“각자 행동을 하기로 하고 헤어졌습니다. 먼저 탈출한 생도들도 있었구요.”
잔류자 모두 도쿄역으로 출발했지만 그는 일행으로부터 빠져나와 아사코 집으로 왔다.
미나미 여사는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훔쳤다. 새파란 사십대의 중년인데 눈 주변이 다크 서클처럼 검은 것이 내려앉아 있어서 나이보다 훨씬 늙어보였다. 누렇게 뜬 피부로 인해 그동안 급식 상태가 좋지 못하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모두 전쟁이 남겨준 상처라고 생각하니 홍태화는 가슴이 저렸다. 그는 그녀를 보살펴주고 떠나리라 마음 먹었다.
“와줘서 고마워요. 군인의 길을 가지 않아도 되니 아사코가 안심이에요. 나도 그렇고요.”
미나미 여사는 벌써 그를 사위로 생각하고 있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홍태화는 애초에 군인의 길을 가려고 생각하지 않았다. 교사를 꿈꾸었다. 그런데 광주고보 담임 선생님이 진로를 결정했다. 성적 좋고 신체 건강하니 일본 육사를 지망하라고 했다. 옷을 제공하고, 월급까지 주는 국비장학생이니 상급학교에 진학시켜줄 경제력이 못되는 집안에서는 그 길이 최상의 길이라고 했다. 뚜렷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진학한 것이 아니라 특전이 있기 때문에 일본 육사에 진학한 셈이었다. 그리고 일본의 패망과 조국의 해방과 독립을 맞았다. 해방과 독립. 처음엔 실감이 나지 않았다. 제 자리에 돌려지고 마는데도 왜 이렇게 모두 총동원되어 처절하게 망가지고 파괴도욌을까. 돌이켜보니 그간의 과정이 꼭 소꿉놀이한 것 같고, 어느 먼 행성에 갔다 온 기분이었다.
얻은 것이 무엇인가. 무슨 행복을 주었나. 승전의 기쁨은 한때의 마약과 같은 것, 그러나 지금은 패전의 내상(內傷)과 허무 속에 모두가 넋을 잃고 있다. 아시아 평화를 위해 전쟁을 했다고? 대동아공영권을 위해? 야마토다마시(大和魂)를 위해? 그 이름으로 끊임없이 희생을 강요했다? 주술 치고는 도무지 섞갈리는 주술이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이길 거부하고, 짐승으로 살도록 몰아가는 사기 행위다. 그런데도 성전이라고 외친다. 그것이 아니라고 외치면 도리어 범죄가 된다. 살육을 말하면 범죄자로 몰아 처단한다. 이래저래 죽는다. 그러면 어떻게 살라는 것이지? 누가 이런 사기의 그물을 깔았을까.
그런데 문제는 패전이 신민 자신들의 과오 때문에 온 것처럼 그들 스스로 죄송하고 황송해한다. 적을 더 죽이지 못하고, 식민지 백성을 더 약탈하고 성노예로 보내지 못했다고 후회한다. 그렇게 하지 못해서 억울해한다. 그래서 ‘덴노헤이카(천황폐하)’에 끝없는 불충을 저지른 것만 같다. 내 목숨 내놓지 못해 미안하고, 타인의 목숨을 불구덩이 속에 더 쳐넣지 못해서 또 미안하다. 패배는 오직 내 탓이고, 덴노헤이카는 위대하며, 터럭 끝도 다쳐선 안되는 영험한 성상이자 불사신이다.
일본군은 ‘덴노헤이카 반자이!’를 외치며 “도츠케키!” 부르짖으면 모든 적은 도망간다고 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렇게 ‘반자이 어텍’을 믿었다. 그러나 자고 나니 일본군 시체가 쌓였다. 반자이 어텍이 계속될수록 시체는 수북히 쌓였다. 식민지 백성들이 총알받이가 되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사체가 쌓일수록 천황에게 미안하기만 하다.
이런 사기극이 어디 있나. 새파란 젊은이와 식민지 청년들이 죽음의 행진을 하면서도 미안하다니? 지구보다 무거운 무게의 목숨을 스스로 내던지고도 미안하다니? 시체가 층층이 더 쌓이지 못해서 미안하다니? 더 많이 목숨을 내놓지 못한 게 패배를 불러왔다고 엎드려 통곡하다니? 그들 심리의 근저에 무슨 마귀가 붙었길래 이런 광기에 사로잡혀 있는가.
그런데 지금 집단 허무에 젖어서 공황 상태에 빠져있다. 사기 친 천황과 그 부역자들을 끌어내 토막내 죽여도 부족할 판에 여전히 그들에게 황공하다며 패닉 상태에 빠져있다. 이것이 사람이 지배하는 국가인가. 합리적 사고인가. 더많이 잡아다 죽인 식민지 백성을 향해 ‘통석의 념’을 가진다는 수사적 레토릭 하나로 모든 것이 용서되고 이해되는가. 이런 개같은 위선이 어디 있나.
한꺼풀 벗기면 금방 들통날 위선을 그들은 왜 정당화하며 슬퍼할까. 미친 듯이 패배를 괴로워할까. 괴로워하면서 이빨을 무는 저 모습은 무엇인가. 마구 내달리던 누우떼들이 그 관성으로 모두 강물에 뛰어들듯이 집단 투신하는 저 자해의 모습은 어디서 연원하는가. 그것이 ‘야마도다마시’라는 것인가. 그것이 자부심인가. 그것이 제국주의 팽창 야욕의 거울인가. 그러면 앞으로도 변함없이 그것을 정당화하며 그 짓을 반복할 것인가. 기회가 오면 언제든지 다시 불장난을 저지를 것이라는 암시를 내외에 천명하는 것인가.
홍태화는 한동안 함정에 빠진 듯 고뇌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몸부림을 쳤으나 뚜렷이 머리에 남는 것은 없었다. 다만 꼭 어린아이 소꿉장난을 하다 나온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서 혼란스러웠다. 그런데 지금 현실은 사랑하는 소녀의 상처받은 영혼과 몸의 부상으로 신음하는 그 어머니가 있다. 그의 실존의 모든 것이 되어있다.
“집이 누추해서 미안해요. 내가 집을 잘못 건사해서 미안하군요.”
미나미 여사가 생각에 잠겨있는 홍태화에게 부끄럽다는 듯이 말하고 자리를 내주었다.
“그건 어머니 잘못이 아닙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집을 멋지게 수리해드릴 게요.”
그녀에겐 몸의 상처보다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 더 시급하다. 희망을 심어주는 일이 긴요하다. 그래서 집을 새롭게 단장해주고 싶었다.
“오빠가 집을 고쳐준다구 했나요?”
사과를 깎던 아사코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지. 어머니를 행복하게 해드릴 거야.”
그는 아사코와 함께 그들이 처음 만났던 언덕으로 올라갔다. 언덕길 양옆으로 잡초가 무성해 바람이 지날 적마다 물결처럼 출렁거렸다. 폐허 위에서도 언덕의 풍경은 아름다웠다. 잡초를 헤치고 커다란 스기나무가 서있는 그늘 아래 앉자 아늑한 보금자리에 숨어든 것같다. 아사코는 홍태화에게 몸을 맡겼다. 열일곱의 향기가 그의 코에 스쳤다. 그는 그녀 허리를 안았다.
“난 언덕에 올라오면 슬퍼져요.”
그녀의 가냘픈 입술이 꽃잎과 같았다.
“오빠와 헤어질 것만 같은 운명인 것 같아서 숨이 막힐 때가 있어요.”
홍태화는 아무말없이 그녀를 안았다. 사실은 그 역시도 미래가 불확실했다. 이 험난한 시기, 어떻게 이 소녀를 조선 반도까지 데려갈 것인가...
아사코는 홍태화를 만난 일을 되짚었다. 유우키 씨는 센베이를 구워 팔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시내 폭격이 심한 이후부터 일손을 놓고 있었다. 그러나 가족들이 먹을 수 있을만큼 센베이를 구워 비상식품으로 쓰고 있었다. 아사코 집도 별도로 식사준비를 할 수 없어서 유우키 씨 댁의 신세를 졌다. 폭격이 거듭될수록 시장을 보아오는 일이 힘들어서 언덕의 풀숲을 헤치며 유유키 씨 집으로 찾아갔다. 어렵게 가져온 센베이를 분말 우유를 물에 풀어서 찍어먹거나 다꾸앙과 함께 먹으며 나날을 견뎠다. 모녀는 그렇게 힘겹게 연명하고 있었다.
그날도 아사코는 유우키 씨 집에서 네 펙의 센베이를 구해 언덕을 올랐다. 잡초가 무성한 언덕을 오를 때면 아사코는 웬지 눈물이 났다. 풀더미 속에 묻혀 실컷 울고 싶었다. 폭격기가 무섭게 허공을 가르고 쏜살같이 지나가면 어디선가 쿵 대지가 무너지는 소리가 났고, 멀리 산너머에서 검은 연기가 솟아오르고, 그런 다음 무서울 정도로 적막이 흐른다. 폭격기가 하늘에 남긴 흰 띠가 묽어지면서 사라지는 모습이 한없이 슬펐다. 그리고 언덕 아래로 쏟아지는 햇살들, 흡사 빛의 폭포수 같은데 그 빛속에 잠겨있는 도시는 너무도 황막하다.
아사코는 언덕을 오르다 말고 홍태화와 시선이 마주쳤다. 홍태화는 언덕 위에서 피부가 하얗고 코가 우뚝 선 소녀가 눈물 머금은 채로 언덕을 오르는 모습을 아까부터 지켜보고 있었다.
“꼭 서양 인형 같구나.”
그가 말하자 아사코가 놀라지 않고 스스럼없이 대답했다.
“애들이 아이노코라고 해요.”
“그래? 집이 이 근방이니?”
“저 아래예요.”
그녀가 올라온 반대 방향의 언덕 아래를 눈으로 가리켰다.
“슬픈 일이 있니?”
그녀는 대답 대신 홍태화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조금만 건드려도 눈물이 툭 떨어뜨릴 것만 같았다.
“그냥 슬퍼요.”
“일루 와. 풀밭에 같이 앉자.”
그녀가 스스럼없이 그의 요구를 따랐다.
“아이노코라고 했지?”
“네. 일미(日美) 혼혈이에요.”
홍태화는 아이노코란 말에 스민 차별의식과 요즘 유독 민족주의를 내세우는 일본사회를 생각했다. 근래에 아이노코에 대한 편견이 심했다. 일본은 본래 혈통을 중시하는 민족이 아니었다. 때문에 혼혈에 대한 거부감을 보이지 않았다. 하체가 짧고 안짱다리에 치아가 고르지 못한 토종에 비해 아이노코는 키가 크고 하체가 길고 이목구비가 시원시원하다. 그래서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일본이란 나라는 성윤리나 문화의 수용 측면이 개방적이고 모방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다. 그만큼 외향성이 짙다. 그러나 지금은 독일의 예에서처럼 혈통이 강조되는 민족주의 정서가 만연했다. 귀축영미(鬼畜英美)라는 전쟁 현실도 감안되었을 것이다. 아사코는 본의아니게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일본 군국주의의 피해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학교에서도 배척되고, 왕따 당했다.
“너희 나이 때는 모든 것이 슬프고 아프고 아름답지. 웃음도 많고....”
홍태화는 그녀의 슬픔을 소년기의 감수성으로 받아들였다.
“육사 생도세요?”
그의 제복을 보고 아사코는 그의 신분을 알아차렸다. 슬펐던 감정들이 사라지고 홍태화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풀밭에 앉은 그녀 시야에 어느새 평소에는 그냥 스치고 지나쳤던 풀꽃들이 새삼스럽게 소담하게 피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를 의식하자 잊었던 풀들의 존재도 새로워지는 것이었다. 발 아래 덩굴을 끌고온 나팔꽃이 잡초들을 붙들고 어디론가 뻗어나가고 있고, 이곳저곳에 쑥부쟁이 쇠무릎 패랭이꽃이 예쁘게 피어있었다. 세상에나. 그동안 보지 못했던 들꽃들이 여기저기 생명력을 지니고 피어있는 것이 너무도 새로웠다. 저런 여린 풀들도 꽃을 피우고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는데, 내가 이게 뭐람.
“육사 생도 럭비대회에 응원을 간 적이 있어요. 요요기연병장에요.”
“그래? 그럼 넌 나도 보았겠구나.”
“보지 못해서 미안해요.”
그러나 삼사천 명의 생도 중 그를 어떻게 알아볼 수 있겠는가. 그러나 순진한 아사코는 사실로 믿고, 그리움의 대상을 만난 것처럼 금방 그에게 끌렸다. 감수성 예민한 나이엔 어떤 무엇에도 감격하고 눈물짓는다. 아사코는 들고 온 센베이를 풀어놓았다.
“이거 비상식량일텐데 먹어도 되니?”
그가 호주머니에서 씨레이션 건빵과 초콜렛을 내놓았다. 포장을 뜯자 부스러기부터 쏟아져나왔다. 아끼느라 호주머니에 며칠째 넣어 다녔으니 바스라졌을 것이다.
“비상식품은 아껴야지. 내일을 알 수가 없잖니.”
그가 건빵가루를 손에 쏟아 입에 그대로 털어넣었다. 언제 그랬더냐 싶게 그녀가 그 모습을 보고 깔깔 웃었다. 아사코는 초콜렛을 아끼듯이 입안에 녹였다. 그는 그녀를 집에 바래다주고 학교로 돌아갔다. 아사코는 그날부터 그를 몹시 기다렸다.
“엄마가 우릴 만나게 해주었어요.”
그들은 키가 웃자란 풀숲으로 자리를 이동했다. 허리까지 자란 풀들을 쓰러뜨려 눕히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아늑한 보금자리가 되었다. 아사코가 아이처럼 뛰어들어서 자리에 풀석 앉았다. 쓰러지지 않은 풀들이 보초를 서듯 둘러서 있는 게 마치 장난치기 좋은 구석진 방에 들어온 것 같다. 포근하고 평화롭고 아늑한 고요. 언덕 아래 폭격을 맞아 까맣게 불에 탄 집들이 풀들 사이로 보였고, 그런 집들 사이로 키 큰 나무들이 무성하게 잎사귀를 늘어뜨리고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그녀의 몸을 당기자 아사코가 그대로 그에게 안겨들었다. 몸은 의외로 가벼웠다. 손가락은 길고 허리는 가늘었다. 전쟁 통에 제대로 먹지 못하고 시달린 나날을 몸이 그대로 말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가슴은 솟아있었다. 그는 그녀 입에 입술을 갖다 대고 길게 키스했다. 입술이 꽃잎처럼 부드러웠다. 키스하다 말고 그녀가 물었다.
“태화 짱은 꼭 고국으로 돌아가시겠죠?”
“그래. 전쟁은 이제 안녕이야. 영원히.”
“슬퍼요. 이별이라는 것이요.”
그는 다시 아사코의 몸을 깊게 안았다. 그녀 가슴이 새의 심장처럼 할딱거렸다. 눈은 젖어있었다. 그녀가 그의 품을 파고들면서 조그맣게 울었다.
“이별은 정말 슬퍼요.”
“걱정하지 마. 난 아아코 곁에 있을 거야.”
“꼭 그렇게 해야 해요. 태화 짱이 고국으로 돌아가면 난 숨을 못쉴 것같아요.”
“만나게 될 거야. 살아있는 한 우린 만나는 거야.”
“이별은 무서워요. 아버지와도 영영 이별했잖아요. 그 슬픔을 아시나요?”
“아버지가 왜?”
“미국인 아버지가 미국과 싸우다 죽었어요.”
“미국인 아버지?”
“아버진 귀화한 미국인이에요. 나보다 엄마가 더 슬퍼해요.”
“그래, 남편 잃은 엄마들이 더 슬프겠지.”
“우리 반 애들 반 이상이 아버지 삼촌 오빠를 잃었어요. 언니가 전선으로 끌려가서 소식을 모르는 애도 있어요.”
“우린 전쟁이 나쁘다는 걸 몰랐어.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알았으니 우린 지진아인가 보지?”
“그래요. 전쟁은 모든 걸 아프게 만들어요. 저기 봐요. 꽃과 나무와 풀과 새의 조화들. 이걸 부정하며 사는 삶이 무슨 의미가 있나요? 저는 문학을 포기했어요. 시 한 줄이 안나와요. 매일 방공호로 뛰어들고 비상식품 구하느라 쩔쩔매는데 무슨 시를 생각하겠어요?”
“문학은 그런 세상을 얘기하는 거야. 나무, 숲, 푸른 바다, 높은 하늘, 오색 무지개만이 시가 되는 건 아니지. 현실을 외면하면 문학이 의미가 없어...”
“그래요. 세상은 전쟁중인데 매화꽃이 어쩌고 난초꽃이 어쩌고, 무지개가 어쩌고, 그게 말이 되나요? 풀잎의 생명력과 이슬의 영롱함을 찾는 게 무슨 의미가 있죠? 그보다 더큰 세상의 의미가 있는데...”
그녀가 자조하듯 말하며 동의했다. 모든 사람들이 전선에서 이겼다고 환호하는데 결말은 가족 누구에게도 돌이킬 수 없는 슬픔을 안겨준다. 그런데도 괜찮다 괜찮다 말하고, 자랑스럽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사지로 몰어넣고도 신이 되어있다. 그것은 위선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엄마는요, 살아있다는 게 참을 수 없는 모욕이라고 해요. 일본여자로 태어난 게 저주스럽다고 해요. 밤이면 천지 사방에서 곡소리가 들려온다고 해요. 모두가 선택하고 모두가 영광이고, 모두가 즐겁게 맞이한 전쟁이라는데, 왜 그럴까요. 눈만 뜨면 황국의 자랑스런 신민, 덴노헤이카를 외치며 두 팔 번쩍 올려 만세를 부르죠. 그런 것들이 지금 생각하면 우스워요. 태화 짱은 그런 군인이 왜 되려고 해요?”
“글세. 굳이 말한다면 그 길밖에 없었으니까. 자기가 원하지 않는 곳에 갈 수도 있는 게 인생이지.”
“그래도 전쟁은 사람을 악마로 만들잖아요. 모두를 돌게 하잖아요.”
“맞아. 사실 우린 미친 줄도 몰랐지. 헌데 이 자리에 서고 보니 꼭 야수처럼 날뛰었던 것 같아. 그 길이 아닌데도 미친 짐승처럼 날뛰었어. 너처럼 순수의 눈으로 보면 모두 보이는데, 그게 악마의 짓이란 걸 아는데 우린 장님이 되어버렸어. 오히려 영광으로 알았지. 돌아보니 누군가에게 사기당한 기분이야. 시시하고 우스운 마술에 빠져들었다가 나온 것 같애. 싸구려 인생 같아.”
“학교에선 늘 일본인은 정직하고 질서를 잘 지키고 남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는다고 자부심을 가지라고 얘기해요. 조센징은 더럽고 야비하고 훔쳐먹고 물건을 팔면서도 남을 속인다고 조롱해요. 나도 그런 줄 알았어요. 그게 사실인가요?”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니. 더 못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데... 더 큰 악마는 왜 볼 줄 모르지?”
그는 파괴된 도시를 내려다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타도어와 데마고기는 어린 소녀의 영혼에게도 검은 망토를 씌운다.
“그런 구분들이 무서워요. 안아줘요. 그냥 슬프기만 해요.”
홍태화가 아사코를 깊숙이 끌어안자 그녀는 그의 품에서 다시 소리죽여 울었다.
“난 그렇게 갈라놓는 말들이 무서워요. 두려워요. 난 태화 짱과 헤어지면 죽어버릴 거예요.”
“우린 헤어질 수 없어. 영원히, 영원히...”
“그래요. 영원히 영원히 사랑할 거예요...”
바람이 스쳐지날 적마다 풀들이 물결처럼 출렁거렸고, 하늘은 평화롭게 푸르렀다.
이시하라 상이 조선의 청년들을 따뜻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순전히 자기 정신의 실천력 때문이었다. 생도들이 별다른 부담없이 그의 집을 찾은 것도 이런 편안한 환대 때문이었다. 그들은 마루로 나와 정오의 한때를 즐겼다. 배만 준비하면 떠난다. 그들은 조를 짜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로 했다. 그때 오민균과 조병헌이 마당으로 들어섰다.
“어떻게 된 거야?”
오민균의 한쪽 손이 붕대로 감겨져있는 것을 보고 장지성이 놀라서 물었다. 오민균은 대답없이 웃기만 했다.
“무슨 일 저지른 거야?”
“스기하라를 만났죠.”
“동구대 대장을? 그래서?”
“치기를 좀 부렸죠.”
“그 친구한테 치기가 통하나.”
“그들도 지리멸렬합니다. 내부토론 투쟁의 의제를 하나 주고 왔습니다. 약소민족에 대한 오만은 이제 맞지 않는 것이라고. 육사 생도답게 행동해야 한다고 충고해주고 왔습니다.”
“그런 충고가 통할까?”
“시정잡배처럼 나가진 못할 겁니다.”
이런 혼란기엔 저런 용기도 필요하다. 밀리고 두려워하면 더 밟는 것이 그들의 속성이다.
“자, 모두 서재로 들어오시오.”
이시하라 상이 생도들을 서재로 불러들였다. 모두 서재로 들어가 둘러앉았다.
“조선 청년들을 헤아려주시는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만 조금은 불안합니다.”
조병헌이 예를 갖춰 머리를 숙인 뒤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은혜를 받기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오. 여러분들이 내 뜻에 공감하니 그것으로 나는 족하오. 하지만 제군들, 걱정이 되지 않소? 준비 없이 해방을 맞았으니 불안하지 않아요? 나로서는 군국주의가 멸망하는 것이 기쁘지만, 세상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소. 무정부상태가 더 무서운 거요.”
“선생님, 왜 이렇게 대일본제국을 미워하고 조선에 많은 관심을 갖고 계시나요?”
그가 웃으면서 답했다.
“개인적인 연분부터 말할까요? 제주도 구좌리에 내 아내가 있소. 내가 감옥에 있을 때 고국으로 돌려보냈소. 그후 만나지 못했지. 꼭 그런 사적인 이유에서만이 아니라 내 사상의 실천 현장이 조선에 있다고 보는 사람이오. 나는 일본제국에 핍박당한 조선, 조선에 핍박당한 제주도, 이런 걸 아나키즘과 연관시켜 보아왔소. 흥미롭지 않소? 그런데 지금 한반도에 이보다 더 힘든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소.”
“힘든 일이라니요?”
“나진 청진 웅기 함흥에 벌써 소련군이 진주했다지요? 그러면 복잡해지는데... 또다시 외세라니...”
귀국하면 미래가 환히 펼쳐질 것 같은 기대를 안고 있는데 소련군이 먼저 진주하다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때 홍태화가 들어왔다. 방으로 들어서는 그를 향해 모두들 힐난했다.
“도대체 또 어디로 사라졌던 거야?”
“여학생에게 완전히 녹아버렸군.”
“일본에 눌러앉을 모양이지?”
그러나 홍태화는 대꾸하지 않고 머쓱한 표정으로 한 곳에 앉으며, 이시하라 상에게 상자를 내밀었다.
“선생님께 센베이 과자를 가지고 왔습니다.”
“유우키 씨, 지금도 센베이를 굽던가?”
장지성이 금방 표정이 달라져서 물었다.
“그래. 안녕들 하셔.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있을 일이 아니다. 귀국선이 준비될 때까지 일을 좀 해야겠어.”
“노동을 해서 노자를 벌자고?”
“폭격을 맞은 집이 많아. 그중 힘없는 모녀가 사는 집인데 집이 파괴되었어. 부인은 크게 부상 당하셨고. 소녀는 어리고... 귀국날짜만을 기다리고 있느니 그런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 돕자구.”
이시하라 상이 환히 웃으며 말했다.
“아, 그것 잘된 일이군. 나는 감옥에서 목공기술을 배웠소. 그 기술로 의자를 만들고 책상, 서가를 만들었소. 그걸 나누어주니 감옥생활이 즐거웠지. 만기 출소하는 날짜도 잊어먹을 정도였소. 봉사는 그렇게 기쁨을 주오. 나에게 연장통이 있으니 가지고 가서 쓰시오. 아름다운 기회요.”
다음날 그들은 홍태화를 따라 아사코의 집으로 향했다. 조병헌이 대번에 폭격을 맞은 지붕에 올라가 서까래가 드러난 곳에 판자를 덧대 못질하고 점토를 발랐다. 장지성은 부숴진 문짝과 복도의 다다미를 손질했다. 이정길은 주방의 싱크대를 고쳤다. 이렇게 모두들 나서자 조금씩 집꼴이 되어갔다.
“온돌방이 좋은데 일본 사람들, 다다미방을 고집한 이유가 뭘까?”
이성유가 궁금해서 이정길에게 물었다.
“일본의 여름은 덥고 습기가 많아서 환기가 잘 되도록 목조 집을 짓고 다다미를 까는 거야. 또 산에 나무가 많고, 대신 지진이 많기 때문이지. 벽돌집보다 목조건물이 더 내구성이 있다는군. 벽돌집은 지진이 나면 와르르 무너지는데 목조건물은 서로 붙잡아주는 성질이 있어서 무너지지 않는다는 거야.”
“화재엔 취약하잖나?”
“그래서 쪽바리 놈들 주의력 하나는 왔다지.”
기품있는 집안인지 방안에는 도코노마(床の間)가 차려져 있었다. 안방에 별도로 방바닥을 반자 정도 높여 단을 만들고 족자를 걸고 자기와 화병을 세워놓는 공간이었다. 난과 매화그림이 그려진 족자가 파괴되어 아무렇게나 놓여있었다.
아랫목에 미나미 여사가 죽은 듯이 누워있었다. 쿵쾅거리는 소리가 나도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오민균은 손의 부상으로 힘든 일을 하지 못하는 대신에 방안의 흩어진 가재도구들을 챙겼다. 미나미 여사를 내려다보던 오민성은 문득 고향의 어머니를 생각했다. 5남 4녀의 자식을 낳은 어머니. 방학이 되어 고향집을 찾을 때마다 어머니는 늘 배가 불러있었다.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호미를 들고 밭에 나갔다가도 어느새 부엌으로 들어와 그릇들을 달그락거렸다. 그런 가운데 밥상이 차례대로 차려졌다. 배를 뒤뚱거리면서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할아버지 밥상, 아버지 밥상, 그리고 형제들의 밥상을 차렸지만 막상 어머니의 밥그릇은 정해져 있지 않았다. 어머니가 언제 밥을 먹는지를 그는 본 적이 없었다.
충북 청원군 현도면 우록리 불목, 석수정, 갈골. 마을을 감싸고 있는 고남산, 높지 않은 산이지만 산이 수려하고 인자해서 마을 사람들은 언젠가 인물이 나올 것이라고 믿었다. 어머니 또한 그것을 구체적으로 믿었다. 잘 생기고 총명하고 또래 아이들보다 몸도 큰 맏아들이 그 주인공이 되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실제로 담뱃대를 문 동네 할아버지가 지나가면서 “그놈 참 왕자 같구나. 인물이 훤해” 하는 말을 들을 때마다 충만감이 가득 찼다. 그는 어머니의 자존감의 전부였다.
오민균은 그런 어머니 생각으로 부끄러운 듯 홑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 누워있는 미나미 여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녀 옆구리가 보였다. 헐어서 고름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녀가 꼼짝하지 못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어머니, 바르게 엎디어 보세요.”
놀란 그가 미나미 여사 곁에 다가앉았다. 미나미 여사가 움직이는 듯 마는 듯하며 홑이불을 젖히며 가늘게 눈을 떴다. 그리고 이불 깃으로 환부를 가렸다.
“방치하면 큰 일 납니다. 괴사가 심합니다.”
그가 이불을 제치고 환부를 세심히 살폈다. 상처는 짓무르고 덧나있었다. 누런 고름이 옆구리를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환부를 유심히 살피던 그가 거즈로 상처 부위를 눌러 고름을 씻어내더니 환부에 입을 갖다 대 빨기 시작했다. 그가 어렸을 적 무릎이 깨져 덧나서 고름이 흘러내릴 때 어머니가 입으로 빨아서 고름을 빼주고 된장을 발라주던 생각이 떠올랐다. 신기하게도 그 며칠 후 무릎은 거짓말같이 말끔히 나았다.
미나미 여사가 부끄러운 듯 몸을 움츠렸으나 어쩔 수 없다는 듯 그가 하는대로 몸을 맡겼다. 그녀가 머리맡에 있는 타월을 집어 그에게 내밀었다. 그가 타월을 받아 빨아낸 입안의 것을 뱉어냈다. 그러기를 몇 차례. 그런 다음 멸균 거즈로 피부 표면을 깨끗이 닦아내고 소독제를 발랐다. 알콜 성분이 함유되어있기 때문에 바를 때마다 환자가 반사적으로 움찔했지만 곧바로 바른 자세를 취했다. 치료해주는 사람에 대한 예의로 통증을 견뎌내고 있었다.
“외부 세균에 감염되는 것을 막아줘야 합니다. 아카징키가 마를 때까지 말려둬야 합니다. 그러니 피부를 노출시켜야죠. 피부에 지속적으로 아카징키를 발라도 안됩니다. 딱지가 앉는 것을 봐가면서 소독해주어야 합니다.”
그는 학교에서 비상치료법 시간에 배운대로 상처 치유법을 설명했다.
“고마워요. 태화 짱의 친구인가요?”
미나미 여사가 가느다란 목소리로 물었다.
“네. 저는 일학년 생도고, 홍태화 선배는 3학년입니다. 홍 선배가 아사코 양의 집이 망가졌다고 동원령을 내렸습니다. 저희는 귀국선이 마련되는대로 고국으로 떠납니다. 시간이 남아서 달려왔습니다.”
“나 좀 일으켜 세워줄까요?”
오민균이 그녀 등에 팔을 넣어 그녀를 일으켜세웠다. 그녀 몸은 마른 수수깡처럼 가벼웠다. 벽에 등을 기댄 그녀가 가볍게 탄성을 질렀다.
“어머, 눈부신 청년이군요.”
미나미 여사가 눈에 가득 눈물을 머금고 있었다. 그 눈엔 어떤 쓸쓸함과 슬픔이 배어있었다. 한때 폭풍처럼 다가왔던 청춘의 열정이 시들어버린 자신을 돌아보고 있는지도 몰랐다.
"내 남편도 미남이었죠. 깎아놓은 듯이요. 헌데 한줌의 재로 돌아왔어요. 가지 않아도 되는 길을 가서 끝내 재로 돌아왔어요. 누구를 위해 가야 하는지도 모르고 가서 그리됐어요. 유골함을 부여안고 나는 사는 것 같지가 않았죠. 남편이 죽고 보살펴주는 사람은 없고, 돈도 떨어지고, 폭격은 계속되고, 비참한 나날이었죠. 인생의 진지함이란 찾을 수 없는 삶, 이런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여자로 사는 것이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가, 그래서 누운 채로 영영 눈을 감아버리고 싶었어요.“
그래서 치료도 포기하고 몸을 내버려두었던 것인가. 불행한 시대를 사는 현실이 괴로워서 마음도 몸도 쇠약해져가고 있었다는 것인가. 하지만 그녀만이 아니라 따지고 보면 모든 사람들이 그렇다. 누구나 불행을 달고 이 시대를 살고 있다.
“좋아질 거예요. 용기를 내십시오. 예쁜 따님이 계시잖아요.”
“저 아이도 상처받을 텐데요. 태화짱이 고국으로 돌아가면... 아이에게 희망이 있겠어요?”
“조선과 일본은 다른 나라에 비하면 지척지간입니다.”
“마음으로는 더 멀지 않나요? 행성과 행성처럼. 우리가 조선 민족에게 너무도 가혹한 짓을 했잖아요. 그러면 적이 될텐데.... 모든 이에게 상처를 주는 이런 전쟁을 왜 하죠?”
오민균은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그런 명제는 지금 이 순간 어떤 해답을 내놓을 수가 없다. 너무 크고 무거우면 그 질량감을 알 수 없듯이. 다만 그녀를 위로해주는 것밖에 없었다.
“용기를 가지십시오, 간밧떼 구다사이(힘내세요)!”
“네, 생도님도 간바레(힘내라)!”
“감사합니다.”
“정말 조선 청년들이 용기를 주네요. 이렇게 선량한 젊은이들인데... 고마워요. 생도님의 따뜻한 치료가 나를 곧 일으켜 세워줄 거예요.”
그녀가 푸른 핏줄이 도드라진 앙상한 팔을 들어올려 눈으로 살피다가 웃었다. 희망의 기운이 보이는 모양이었다.
“여사님을 보고 저희 어머니를 생각했습니다. 어머니가 제가 다쳤을 때 꼭 그런 방식으로 치료를 해주셨지요.”
“그래요. 세상에 그런 어머니를 두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요.”
홍태화가 망치와 못상자를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그가 미나미 여사를 치료해주고 있는 오민균을 바라보더니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
“어머니, 민균 짱 보기만 해도 듬직하시죠? 민균 짱이 치료했으니 금방 나을 거예요.”
“그래요. 고마운 청년이에요. 태화 짱과 마찬가지로.....”
“이웃집에서도 집 고쳐달라고 찾아왔네요. 아래쪽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집에서도요. 이러다 우리 여기 건축 토목업으로 눌러앉는 것 아닌가? 하하하”
그들은 모처럼 환하게 웃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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