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대통령은 신년사에서 "올해를 정치개혁의 원년으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여야 구분없이 정치권에 대해 환멸감을 느끼는 국민이 60%전후에 달할 정도로 정치적 환멸감이 급팽창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정치개혁의 시급성을 언급한 대통령의 화두 설정은 맞는 것이다.
그러나 세간 일각에서는 "지난해가 정치불황이었다면 올해는 정치공황이 오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큰 것도 사실이다. 정치권이 새해 한국에 던져주는 불확실성과 불안감이 얼마나 큰가를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정치개혁이냐, 정치공황이냐.' 2004년 새해의 최대 정치화두인 셈이다.
***정치개혁이냐 정치공황이냐**
'정치공황'이란 말 그대로 정치권이 아노미(무정부)적 대혼란을 야기할 것이라는 우려다. 노대통령의 끈임없는 '재신임' 발언과, 한나라당 등 야당의 '대통령 하야' 공세가 맞물려 야기하고 있는 불안이자 불확실성이다. '도 아니면 모' 식의 극한적 정치대립이 4월 총선이라는 정치일정과 맞물려 수습불능의 대폭발을 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다.
정치공황은 아울러 사회적-경제적 대혼란을 걱정하는 우려이기도 하다. "이런 식으로 다른나라들이 모두 경제에 매진하는 데 한국만 정치투쟁에 여념없다가는 한국경제가 세계경제의 외곽으로 밀려나면서 몰락하는 게 아니냐" "마주보고 달려오는 기관차격인 여야가 격돌해 대통령 하야 같은 전무후무한 정치공황이라도 발발한다면, 북핵을 비롯해 경제위기, 사회갈등 등 각종 현안을 안고 있는 한국은 그대로 침몰하는 게 아니냐"는 식의 우려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나타나듯, 아직 다수국민은 정치공황을 결코 원치않고 있다.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대해선 불만이 크나 그렇다고 대통령 중도하야 같은 극한적 상황도 바라지 않고 있는 것이다. 가뜩이나 고달픈 일상에 힘든 국민이 정치라는 또하나의 고민거리를 떠안고 속을 끓이고 있는 개탄스런 상황이다.
***盧, 비판적 지지층의 등을 돌려야**
결론부터 말한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정치공황 사태는 막아야 한다. 하지만 정치공황 차단여부의 칼자루를 쥐고 있는 쪽은 다름아닌 정치불안의 진앙인 정치권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아직도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 정치권이라는 최일선 정치주체들이 근원적으로 변화하지 않는 한 정치공황 위기는 시한폭탄처럼 끊임없이 똑딱거릴 것이라는 얘기다.
따라서 정치공황을 막기 위해선 정치주체들의 근원적 변화, 말 그대로 '자성적(自省的) 정치개혁'이 요구된다.
우선 노대통령의 경우부터 살펴보자. 노대통령은 우선적으로 왜 지난 대선때 50%에 육박했고, 취임직후 80%에 달했던 지지율이 지금 20~30%대로 급락했는가에 대한 혹독한 자성을 해야 한다.
노대통령의 현 지지율은 지난 대선때 노대통령을 찍었던 '비판적 진보층'과, 지난 대선때 노대통령을 찍지는 않았으나 대선후 힘을 실어주었던 '비판적 보수층'이 등을 돌렸다는 얘기다. 이들 '비판적 진보층'과 '비판적 보수층'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비판적 지지층'이라 명명할 수 있으며, 국민의 50~60%를 차지하는 이들 비판적 지지층은 곧바로 각종 여론조사에서 '현재 찍을 정당이 없다'고 답하는 '무당파층'과 일치한다.
노대통령 열성지지층은 이들 '비판적 지지층'에 대해 "충성도가 약하다" "냉소주의적인 양비론에 젖어있다"고 혹평한다. 하지만 이들이야말로 지난해 기득권층의 총체적 공세에도 불구하고 노무현대통령을 만들어낸 주역이며, 대선결과에 깨끗이 승복하고 각계의 대변혁을 희망하는 합리주의 세력이다. 아울러 오는 4월 총선의 풍향을 쥐고 있는 '무서운 유권자'들이기도 하다.
노대통령이나 여당인 열린우리당 관계자들도 한결같이 이들의 마음을 되찾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선 왜 이들이 분노하고 냉담해졌는가라는 근원부터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비근한 예로 노대통령은 측근비리 문제와 관련, 더이상 '티코와 리무진' 식의 비유로 위기를 벗어나려 해선 안된다. 지난해 대선때 기득권층 진영의 이회창진영이 노무현진영보다 엄청나게 많은 자금을 사용했음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따라서 대통령의 억울한 심사는 충분히 이해가 가며, 이런 맥락에서 '티코와 리무진' 발언이 나오고 있음도 이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측근비리를 모두 '개인비리'로 돌리고, 남은 대선자금을 장수천 부채라는 '개인 빚'을 갚는 데 사용한 점까지 유야무야 넘어가려는 듯한 태도를 보여선 안된다. 노대통령이 지난 대선기간 내내 장수천 부채라는 '개인적 약점' 때문에 유형무형의 압박을 받아왔다는 정황을 1백% 이해하더라도 그렇다.
이 땅에는 4백만명에 육박하는 신용불량자가 엄존하고 있다. 아무런 빽이 없어 허구헌날 빚독촉에 시달리고 있는 이들이 대통령의 대응을 어떻게 바라볼까를 생각해야 한다. 아울러 기업으로 치면 '회사공금'에 해당하는 남은 대선자금을 개인 빚을 갚은 데 대해 시장의 경제주체들이 어떻게 생각할까도 생각해야 한다. '티코와 리무진' 논법을 떠난 통렬한 대국민사과가 요구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노대통령 핵심측근인 문재인 민정수석의 대응도 여기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최도술 비리는 모두 '개인비리'라는 식의 항변은 그가 측근비리를 예방해야 하는 민정수석이라는 자리에 있다는 점에서 볼 때 역시 '자성'을 결여하고 있는 대응방식이다. 대통령에 대한 충정이라는 측면에서는 납득이 가나, 민정수석인 그에게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 대통령을 모시는 이들의 맹성이 촉구된다는 얘기다.
이밖에 아파트건설경기라는 최악의 부양책을 통해 경기침체를 막으려다가 아파트거품을 양산한 경제팀이나, 잘못된 정책을 고집하다가 민란수준의 저항을 초래한 부안사태 책임자 등 노무현정부 관계자들의 맹성도 요구된다.
이런 제반요인이 모여 '비판적 지지층'의 이탈, '무당파' 양산이 초래됐기 때문이다.
***한나라당, '실패한 정당'이라는 혹독한 자성 필요**
국회의석 절반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국회권력'인 한나라당의 경우에게도 대통령이상의 혹독한 자성이 요구됨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한나라당은 한마디로 말해 "두번이나 대선에서 진 실패한 정치세력"이다. 따라서 당연히 어는 정당보다도 혹독한 자기변혁을 했어야 마땅했으나, 한나라당이 그동안 보여온 행태는 대통령에 대한 딴지걸기를 통한 '자기개혁 회피'였다.
그 결과 한나라당은 남탓만 하는 '네거티브 정당'의 대명사가 됐고, 국민 다수로부터 '대안세력'으로 인정받지 못하기에 이르렀다. 노대통령 지지율이 급락하고 있다는 '야당의 절대호재'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 지지율도 이에 비례해 급락하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다. 과거 30년 집권정당이던 한나라당이 영원한 야당으로 몰락할 위기에 처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은 "그래도 총선때는 보수층과 영남이 한나라당을 찍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에 사로잡혀, 최근 '살생부' 논란에서 보여지듯 국민여론을 도외시한 죽고살기식 진흙탕 싸움을 거듭하고 있고 이런 식으로 계속 나가다가는 분당사태가 불가피해 보인다.
***민주당, 지역주의에 안주하려나**
민주당은 지난해 11월 대표경선후 '반짝' 지지율이 1위로 올라서자 신명이 났었다. 하지만 연말연초 여론조사에서 지지율이 뚝 떨어져, 다수 여론조사에서 3위로 곤두박질치자 당내에 비상이 걸렸다.
조순형 대표는 1일 김대중 전대통령에게 세배를 가 "총선전 호남 방문"을 호소했다가 퇴짜를 맞았다. 민주당 지도부가 내심 'DJ바람'에 기대어 총선을 치루려 하는 게 아니냐는 해석을 낳는 대목이다.
김대중 전대통령의 '정치적 영향력'은 아직도 지대하다. 새해 세배에 1천5백여명의 정치인들이 운집한 것만 보아도 그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이 이처럼 DJ에 기대어 총선을 치루려 한다는 '지역주의 전술'에 안주하려 하다가는 총선에서 분명 참패할 것이다.
호남지역 언론인들의 전언에 따르면, 호남의 여론은 "DJ에 대한 애정은 변함없으나 다수 민주당 현역의원들에는 환멸을 느낀다"는 것이다. 민주당 스스로의 대오각성, 환골탈태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열린우리당 '노무현 비판력' 획득해야**
열린우리당은 '신당'이되 '신당'답지 못하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원인은 여러가지겠으나 천정배 의원이 갈파했듯 '노빠당'이라는 자기한계를 긋고 있기 때문이다. 노대통령을 방어하는 것은 정신적 여당으로서 당연한 일이나 노대통령의 잘못된 정책까지 '무조건적'으로 방어하려다 보니, 노대통령 지지율과 운명을 같이하는 종속적 신세가 됐다는 지적이다.
아울러 '비리의원 7명에 대한 국회의 체포동의안 부결'과 같이 우리당이 진정 개혁정당이라면 '당론'으로 부결반대를 결정하고 '기명 투표'를 주장했어야 마땅한 절호의 기회에조차 당내 의원이 연루돼 있다는 이유로 어영부영 대처하다가 '개혁 차별성'을 상실하는 소탐대실의 결정적 우를 범하기도 했다.
열린우리당이 자신의 목표대로 총선에서 약진하기 위해선 '노빠당'이 아닌 '노무현 비판적 지지당'으로 대전환을 해야 한다. 즉 노대통령에게 등을 돌린 '비판적 지지층'을 흡입할 수 있는 '노무현 비판력'을 확보, 노대통령의 변화를 도출해 내야 한다는 얘기다.
***'코드'를 비판적 지지층에게 맞춰라**
총선은 이제 불과 1백여일 앞으로 다가왔다. 각 당은 모두 '정치개혁'을 말하고 있으나 국민 다수는 '정치공황'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국민의 이같은 우려를 불식시키고 각당이 소기의 목표와 정치개혁을 달성하기 위해선 '코드'를 소수의 맹목적 지지층이 아닌 다수의 비판적 지지층, 아니 현상황에서는 '무당파층'으로 변한 국민 다수에게 맞춰야 한다.
무당파층은 정치적 무뇌층이 아닌 정치적 숙련층이다. 웬만한 레토릭으로 속아넘어갈 층이 아니다. 이런 국민을 다시금 끌어들이기 위한 방법은 단하나 정치권의 혹독한 사즉생의 자성뿐이다. 국민을 감동시킬만한 자성을 하는 정치집단은 총선에서 기대이상의 성과를 거둘 것이다. 그러나 정치집단 전체가 감동 연출에 실패한다면 총선결과는 도토리들의 난립이고, 그는 곧 정치공황을 의미할 것이다.
판을 싹 뒤엎고 싶어하는 국민에게 부응하는 정치권의 대응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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