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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조선족' 사회를 다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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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조선족' 사회를 다시 생각한다

[김기협의 퇴각일기] 스물네 번째 이야기

158일간의 연변 체류를 마치고 돌아왔다. 14년 만의 장기체류였다. 작년에도 4개월가량 연변에서 지냈지만 애초에 두 달 정도 지내려고 갔다가 길어진 것이었다. 이번에는 처음부터 5개월 체류 목표였고, 때문에 그곳 생활 여건에 관한 생각을 많이 할 수 있었다.

14년 동안 연변의 생활 여건 변화는 한국보다 훨씬 더 컸다. 변화의 대부분이 좋은 쪽이다. 14년 전에는 연변 생활에 한국보다 불편하고 괴로운 면이 더 컸는데 지금은 뒤집어졌다. 지금도 불편한 점이 여러 가지 있기는 하지만 편하고 이로운 면이 압도적으로 느껴진다. 귀국 길에 오르며 연변 생활의 좋은 점에 관한 생각을 정리해 봤다.

첫째, 깨끗해졌다. 가로와 하천 정비, 공원과 산책로 조성 등 공공사업도 많았거니와, 무엇보다 큰 차이는 공기의 질에서 느낀다. 이 차이를 가져온 대표적 조치는 '도시난방공사'의 설치다. 아파트 단지별로 하던 난방을 도시 단위의 중앙난방으로 바꾼 것이다. 10월 중순에서 4월 중순까지 난방 기간 동안 도시를 뒤덮던 그을음이 사라졌다. 새벽이나 저녁녘 낮게 걸린 햇빛을 선명하게 느끼는 것은 유별난 즐거움이다. 3~4월 근교의 밭에서 옥수숫대를 태울 때는 따로 경보를 낼 만큼 깨끗한 공기가 표준이 되었다.

둘째, 먹고 살기 좋다. 14년 전에 비하면 식재료 값이 많이 올랐지만 한국에 비하면 훨씬 싸다. 그리고 값이 오른 만큼 유통경로가 정비되어 재료 구하기가 쉽고 편해졌다. 특히 온갖 신선한 채소의 값이 비현실적으로 싸게 느껴져 물어보니 농가의 경작에 넉넉한 보조금이 따르기 때문에 내다 파는 것은 오히려 사소한 부수입처럼 되었다고 한다. 망고 등 각종 남방 과일도 국내시장이기 때문에 싼값으로 공급이 원활하다고 한다.

셋째, 사회 전체의 생활 수준이 향상되었다. 물론 빈부격차가 없을 리 없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중산층'의 범위가 크게 늘어난 것으로 느껴진다. 가난에 찌든 사람들의 모습이 길거리에서도 그리 많이 보이지 않는다. 연변에서는 조선족에 비해 한족의 생활 수준이 낮은 것으로 오랫동안 인식되어 왔는데, 그 인식이 많이 바뀌었다. 특히 두 차례 단체관광을 다니면서 이 변화를 실감할 수 있었다. 택시기사나 상점 점원, 음식점 종업원 등 서비스업 종사자들의 태도도 예전보다 편안하게 느껴진다.

그동안 중국 사회가 얼마나 어떻게 좋아졌는지 확실한 판단을 할 근거는 되지 못한다. 그렇다고 나 개인의 취향에 따른 소감만도 아니다. 분명한 것은 조선족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을 바꿀 필요다. 십여 년 전까지 나는 조선족 사회를 내려다봤다. 우리 민족 중 운이 나빠 불우한 위치에 빠진 집단으로 보고 한국 사회가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대등한 입장에서 도움을 주고받을 상대로 마주 보게 되었다.

지금도 많은 조선족 일꾼이 한국에서 3D 업종에 종사하고 있다. 그러나 연금과 보조금 인상 등 중국의 사회안전망 확충에 따라 그들의 배경 조건이 바뀌어 왔다. 노후를 위해 열심히 일해 둬야겠다던 아내도 이제 연금만으로 생계를 걱정하지 않게 되었다고 느긋해졌다.

민족 사회의 장래에 대한 조선족 사회의 역할에 관해 새로 생각할 것이 많다. 한반도 평화의 정착 과정에서, 그리고 그다음 단계에서 조선족 사회의 역할이 크게 늘어날 것이다. 그 생각의 출발점으로 작년에 쓴 글 하나를 아래 붙인다. 연변을 찾아온 한국 방문단에게 조선족 사회의 성격을 설명하기 위해 쓴 글이다.

중국의 조선족 사회

강이 국경 등 영역의 경계로 많이 이용되는 것은 구획선으로서 편의성 때문이지 자연의 장벽이어서가 아니다. 강의 양쪽 기슭은 비슷한 자연조건을 갖추고 있고, 아주 큰 강이 아니면 양쪽 사이의 이동도 그리 어렵지 않다. 두만강과 압록강의 양안은 고려시대까지 같은 생활권으로 소통하고 있었다.

조선시대에 와서 두 강이 중국과의 국경선이 되고 행정력에 의해 생활권이 구분되었다. 행정력의 구속에도 불구하고 이런저런 이유로 강을 건너가 사는 사람들이 늘 있었지만, 그 사람들은 건너간 쪽 사회에 동화-편입되었지, 조선 땅에 중국인 사회가 생기거나 중국 땅에 조선인 사회가 생겨나지는 않았다. 특히 병자호란을 전후해서 많은 조선인이 중국으로 건너갔어도 그곳에 조선인 사회를 남기지는 않았다.

조선 후기에 들어 두 강의 중-상류 지역에서는 농지가 부족한 조선 농민이 인구가 희박한 강 건너편에 가서 농사를 짓는 일이 차츰 생겼다. 그들은 강 속의 샛섬에서 농사를 지은 것이라고 우겼는데, 강 북쪽 지역을 가리키는 '간도(間島)'란 말이 여기서 유래한 것이라는 설명이 그럴싸하게 전해진다. 그들도 건너가서 농사만 지었을 뿐, 마을을 이루고 살지는 않았다.

조선어를 쓰고 조선문화를 지키는 조선인 마을들이 강 북쪽에 생기기 시작한 것은 1860년대였다. 조선의 연이은 흉년으로 유민이 늘어났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더 결정적 원인은 청나라의 통제 약화에 있었다. 중국은 제2차 중-영 전쟁(1858~1860)의 패전으로 위기감에 휩싸여 있었고, 동북 방면에서 러시아의 위협이 늘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만주 지역의 인구 증가를 억제해 온 종래의 봉금 정책을 완화할 필요가 있었다.

중국의 통제 약화에 따라 조선인의 이주가 1900년대 초까지 꾸준히 늘어났지만 그 구성은 하층 농민이 압도적이었다. 그러다 을사조약(1905)과 경술국치(1910)를 계기로 상류층의 망명이 크게 늘어나, 지배계층까지 포함하는 조선 사회의 축소판이 만주 땅에 만들어지게 되었다.

식민지시대(1910~1945)를 통해 만주 지역의 조선인 이주와 활동을 세 개 영역으로 나눠볼 수 있다. 첫째는 생존을 위해 농지를 찾아온 사람들이다. 둘째는 독립운동이다. 그리고 셋째는 일본의 힘에 기댄 모리배들이다. 농지를 찾아온 사람들도 두 부류로 갈라진다. 가족 단위로 옮겨온 자생적 이주민들은 강 바로 북쪽에 독립농민으로 자리 잡은 반면 1920년대 이후에는 일본 정부나 회사의 모집에 따른 집단 이주자들이 더 북쪽에 위치한 대규모 농장에 수용되었다. 독립운동은 의지할 만한 독립 농가가 많은 간도 지역에서 특히 활발하게 펼쳐졌다.

1945년 일본이 물러갈 때 만주의 조선인 집단은 곤경에 처했다. 일부 모리배들이 중국인의 혐오감을 불러일으켜 놓은 위에 중국의 토호 집단은 조선인을 배제함으로써 이득을 취하려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 집단이 지역에서 국민당 정부의 세력 기반이었기 때문에 조선인에 불리한 정책이 계속 나오게 되었다.

이 상황에서 '조선족' 사회를 옹호한 것이 공산당이었다. 일제시대에도 조선 독립운동가들이 중국공산당에 많이 의탁했기 때문에 동만주분국의 당원 대다수가 조선인이었던 적도 있다. 그리고 공산당은 대장정의 경험을 통해 소수민족과의 협력을 중시하는 노선을 세워놓고 있었다. 게다가 만주지역에서 국민당과 경쟁을 위해 조선족의 협력을 특히 필요로 했다.

해방 당시 만주에 거주한 조선인이 약 2백만 명이었는데 그중 절반은 귀국하고 절반이 남아서 조선족 사회를 지켰다. 많은 조선인 청년이 인민해방군에 입대해서 국민당에 대한 승리에 공헌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초기에 연변 조선족자치주가 특히 큰 우대를 받은 것이 이 공헌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1950년대 후반과 문화대혁명 기간 등 중국 정치가 극좌 노선으로 치우칠 때는 민족의 개별성을 묵살하는 정책으로 조선족 사회의 민족의식이 탄압받는 상황도 있었다. 지금도 조선족 사회에서는 '민족심'이라는 말을 쓰지, '민족주의'란 말을 쓰지 않는다. 그러나 탄압받던 상황도 중국 인민 전체가 탄압받던 수준을 벗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인식으로, 특별히 피해 의식을 갖는 사람은 많지 않다.

1970년대 말 이래 개혁개방의 시대에 들어와 조선족 사회의 위기는 다른 방향에서 일어났다. 이동이 쉬워지면서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는 사람이 늘어나 집거 지역의 공동화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또한 사회유동성 증가에 따라 젊은 세대에서 조선어를 버리고 중국어를 택하는 경향이 늘어나고 있다. 취업과 활동의 범위를 넓히는 데 중국어가 유리하기 때문이다.

중국 조선족 사회의 존재는 한민족에게 하나의 중요한 자산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사회의 엘리트층일수록 민족어와 민족문화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것은 민족 사회의 입장에서 아쉬운 일이다. 이 손실은 강제적 정책으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민족어와 민족문화의 가치를 키움으로써 각자가 자발적으로 아끼게 만드는 길밖에 없다.

한반도 평화의 도래는 중국 조선족에게도 취업과 활동을 위한 민족어의 가치를 늘리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와 아울러 민족문화의 가치를 조선족이 크게 인식하도록 하는 길도 더 열심히 찾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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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협

40세 나이에 교수직을 그만둔 후 20여 년간 독학으로 문명교섭사를 공부해 온 역사학자. 서울대학교 이공계 수석 입학 뒤 사학과로 전과한 독특한 이력이 있다. 프레시안 장기 연재를 바탕으로 <해방일기>, <뉴라이트 비판>, <페리스코프>,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 등의 책을 썼다. 프레시안 창간 때부터 거시적 관점에서 역사와 한국 사회를 조망하는 글을 꾸준히 쓰고 있다. <역사 앞에서>의 저자 김성칠 교수가 부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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