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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대통령의 신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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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대통령의 신뢰'

[데스크 칼럼]어지러운 파병 과정을 보고

노무현 정부가 18일 이라크 추가파병을 확정, 발표했다.

오래 전부터 이미 예견됐던 일이다. 이달초 김진표 경제부총리를 필두로 윤영관 외교장관, 한승주 주미대사, 정세현 통일장관, 심지어는 박승 한은총재까지 줄줄이 나서 '파병 불가피론'을 설파할 때부터 감지됐던 일이다. 관료집단의 특성상 대통령의 의중을 읽기 전이라면 불가능한 사태전개였다. 그럼에도 노대통령은 "결정된 바는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결코 조급하게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라더니...**

노대통령은 파병 발표 닷새전인 지난 13일 국회 시정연설에서도 "결코 조급하게 결정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정부는 이라크 추가 파병문제를 신중히 검토하고 있다. 지금까지 쌓아온 미국과의 우정, 그리고 경제에 미칠 영향을 우려하는 사람도 있고, 비용과 명분, 한반도의 안보를 걱정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조급하게 결정할 문제는 아니다. 여러 가지 사정을 충분히 고려하여 신중히 결정하겠다."

노대통령은 파병 발표 불과 하루 전인 17일 오후까지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파병에 반대하는 시민-종교단체 대표들을 만난 자리에서 노대통령은 이날 문화일보가 19일께 파병을 확정지을 것이라는 보도한 것과 관련 질문을 받자 "파병문제에 대해 언론에 나는 것은 부정확한 것이 많다. 추측성 보도가 심하다"고 부인했다.

이에 앞서 회동전 문화일보 기사를 접한 인사들이 "우리가 들러리가 될 수는 없다"며 회동을 취소하려 하자, 청와대는 이들 인사에게 "그 보도는 오보"라며 파병결정은 신중히 이뤄질 것이라고 설득해 이날 모임은 어렵게 성사될 수 있었다.

노대통령은 또 이날 만남에서 "파병문제에 대해서 그동안 정부내에서 진지한 논의는 없었다. 내일(18일) 안보관련장관 회의에서 처음으로 논의할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같은 말을 한 대통령이 불과 몇 시간 뒤인 이날 밤 유인태 정무수석을 통해 최병렬대표 등 4당대표에게 '보안 유지'를 부탁하며 "파병 확정"을 통고했다.

그리고 18일 아침 9시부터 1시간반 가량 짤막한 국가안전보장회의(NSC)가 요식행위로 치러진 뒤, 대통령 본인이 아닌 윤태영 대변인을 통해 '이라크 파병 확정 3개항'을 짤막하게 발표케 했다.

이어 배경설명에 나선 나종일 대통령안보보좌관은 "이제까지 생각했던 여러 가지 기준에 비춰볼 때 지금이 파병을 결정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라는 노대통령의 말을 대신 전했다.

***'신뢰의 위기' 도래**

이같은 일련의 과정은 노대통령이 처한 '말못할 어려움'을 백번 이해한다고 할지라도 해도 너무 했다. 오래 전 파병을 미국에 약속한 뒤 16일(미국 현지시간) 이라크 파병 결의안이 통과되기만을 기다려온 게 아니냐는 해석을 부인하기 어려운 '행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미 파병을 결정해놓고 몇시간 뒤 '비밀리에' 정당대표들에게 파병 확정을 통고할 것이면서, 시민-종교단체 대표들과 만난 자리에서는 "내일 안보관련장관회에서 처음으로 논의할 계획"이라고 말한 대목은 '지도자의 신뢰'라는 근본에 대한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중차대한 기만이 아닐 수 없다. 이날 회의에 참석했던 한 관계자는 "다시는 내가 청와대 말을 믿거나 청와대에서 부른다고 들어가면 사람이 아니다"라며 극한적 배신감을 토로하기까지 했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파병 배경과 관련, "미국이 우리에게 쓸 수 있는 무기는 열개나 스무개는 된다"며 '초강 미국'에 버거울 수밖에 없는 어려운 속내를 토로했다. 금융시장의 한 관계자는 "미국의 신용평가기관들이 이라크 파병을 안하면 신용등급을 한단계 낮추고 파병을 하면 한단계 올려줄 것이라는 얘기가 외국투자가들사이에 공공연히 나돌고 있다"고 전해주기도 했다. 모두가 이해가는 대목이다.

이같은 말못할 정황을 모두 이해한다 하더라도 노대통령의 파병 결정은 참여정부가 평소 그렇게 강조해온 '프로세서(과정)'에서 치명적 과오를 범했다. 여론수렴 과정을 철저히 배제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한 청와대 관계자는 "파병 자체에는 반대여론이 높으나 이라크결의안만 통과되면 파병에 찬성한다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냐"고 반문했다. 각종 조사를 통해 드러난 여론을 반영한 결정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같은 주장이 맞는다 가정하더라도 대통령의 정책결정 과정은 더없이 진지해야 하고 약속을 중시하는 모습을 보일 때에만 비로소 신뢰가 가는 법이다. 더욱이 국민의 생명과 재산, 그리고 국위에 관련한 사안에 있어서는 특히 그러하다.

더욱이 이같은 중차대한 결정을 발표하면서 대통령이 국민앞에 나서 설득을 하려는 노력 대신, 대변인을 통해 짤막한 성명을 발표토록 한 대목은 앞으로 두고두고 대통령의 신뢰 문제를 야기할 게 분명하다. 2003년 10월18일의 참담한 현주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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