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보다 국민 여러분, 특히 서민 여러분께 즐거움과 기쁨을 드리지 못해서 정말 마음이 아픕니다. 서민들은 장사가 안된다고 울상이고, 택시기사들도 손님이 없어 시름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특히 잦은 비와 냉해로 자식같은 농사를 망치고 절망에 빠진 농민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여기에 태풍까지 겹쳐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수재민들의 고통을 생각하면 밤잠을 이룰 수 없습니다.
일부 지역의 아파트값이 천정부지로 뛰면서 서민들은 삶의 의욕마저 위협받고 있습니다. 사정이 이런데도 대통령은 정치권, 그리고 언론과 싸움만 하는 것으로 비쳐지고 있습니다. 여기에다 제 주변사람의 비리 의혹마저 터져나왔으니 차마 국민 여러분을 대할 면목이 없습니다. 정말 송구스럽습니다."
노무현대통령의 13일 국회 시정연설의 도입부이다. 지난 10일 재신임 선언을 하면서 그 근거로 밝힌 '축적된 국민들의 불신'의 실체를 대통령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스스로 밝힌 셈이다. 아울러 대통령이 시정연설을 그동안의 경제 실정에 대한 '대국민 사죄'로 시작했다는 대목은 더없이 다행스런 일이라 하겠다.
***"실업자 시절보다도 힘이 빠진다"**
기자에게 오랜 친구가 있다. 고교동창으로 40대중반에, 아내와 두 자녀와 가정을 꾸리고 있는 모 자동차메이커의 직원이다. 그는 친구들 사이에서 '딸깍발이'로 불릴 정도로 10원짜리 하나 '공것'도 싫어하고 일에만 열심인 말 그대로 '성실한 국민'이다.
노대통령의 '재신임' 선언이 있은 지난 10일 밤, 이 친구가 몇달만에 "술이나 한 잔 하자"고 찾아왔다. 요즘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 술을 일절 입에 대지 않고 있던 그였으나 이날은 먼저 술을 청했다.
술잔이 몇 순배 돌자 그는 이런 얘기를 했다.
"정말 요즘처럼 허망한 느낌이 드는 때도 없다. IMF사태후 직장을 잃고 2년여간 실직자 생활을 할 때도 비록 힘은 들었지만 지금처럼 힘이 빠지지는 않았다."
그는 IMF사태때 직장을 잃은 쓰라린 경험이 있다. 다니던 자동차회사가 매출격감으로 전체직원의 3분의 1을 정리했을 때였다. 그후 그는 2년여간 사실상의 실질자 생활을 하다가, 경기가 살아나면서 다니던 회사에 재취업할 수 있었다. 그의 두드러진 성실성 때문에 회사가 우선적으로 재고용했던 것이다.
"며칠 전 퇴근후 아내에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너도 알다시피 직장생활을 한 지 지난 20년간 내 딴에는 정말 한눈 팔지 않고 열심히 살았다. 우리 아내도 정말 열심이었다. 내가 순대를 좋아해 퇴근후 '우리 애들 데리고 시장 가서 순대라도 먹자'라고 하면 '한푼이라도 아껴야 한다'며 비토를 놓을 정도로 정말 한 푼도 허투르게 쓰지 않고 성실하게 살림을 했다. 하지만 요즘은 가장으로서 아내를 대할 면목이 없어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술 한잔을 들이킨 그는 허망함을 느끼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우리집 식구들의 가장 큰 소원이 아파트에서 사는 것이다. 지금 살고 있는 서울시 외곽의 연립주택이 너무 낡아 불편한 게 한두가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조금이라도 교육여건이 나은 곳으로 옮겨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도 들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한푼이라도 아끼고 조금이라도 더 저축을 해가면 아파트로 옮길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포기하다시피 한 상태다. 아파트값이 천정부지로 오르는 판에, 1억여원 정도 하는 연립주택 팔아갖고 어디로 갈 수 있겠나.
그렇다고 해 내 나이 40대 중반에 건강마저 좋지 못해 내일 어떻게 될 줄 모르는 판에 은행 빚을 내 무리해 이사를 갈 수도 없고...지난 20년간 뼈 빠지게 열심히 살아온 결과가 이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자 온 몸에 힘이 빠져 일할 맛이 안난다. 아내와 아이들 볼 낯도 없고..."
***"아, 내 아이들도 결국 나처럼 살 수밖에 없겠구나"**
이 친구는 지난 대선때 정말 '열성 노사모'였다.
어려운 살림에도 눈 질끈 감고 돼지저금통도 보내고 노무현후보에게 한표라도 더 표를 모으기 위해 직장내에서도 '찍힐' 정도로 노후보 지지를 외쳤던 친구였다. 대선막판에는 자신이 사는 연립주택 입구에 노무현 후보 사진을 붙여놓아 여러차례 논란도 겪었다 했다.
그는 자신이 노사모가 된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정치도 모르고 관심도 없었다. 하지만 단하나, '내 아이들은 나보다 나은 환경에서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에 세상의 모든 것을 바꿔보자는 노무현 후보에게 기대를 걸었고, 그의 당선을 위해 내 범위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다했다."
그는 그러나 요즘은 '아이들의 미래'를 절망했다.
"잠자는 아이들 얼굴을 들여다 보고 있노라면, '아, 이 애들도 결국 나처럼 살 수밖에 없겠구나'라는 좌절감에 젖어들어 절로 눈물이 난다. 애들한테 남들처럼 과외 한번 제대로 시켜주지 못하고, 남들처럼 변변한 재산도 물려주지 못할 테니, 아이들이 나보다 나은 환경에서 산다는 것은 불가능해보인다.
특히 이같은 일이 노무현정부 들어 전보다 한층 심화됐다는 사실에 깊은 절망감을 느낀다. 아무리 유능한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경제를 하루아침에 좋게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은 내가 누구보다 잘 알고, 이해한다. 하지만 '상대적 빈곤'이 심화되는 것만은 막을 수 있는 것 아닌가. 아파트값이 연일 천정부지로 올라 가진사람은 더욱 풍요로와지고, 못가진자는 절망하는 현실은 막을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런데도 연일 대책을 쏟아내어도 아파트값은 보란듯 폭등하고, 정부가 기껏 내놓은 대책이라는 것이 '학원단지' 운운하는 것이다 보니 열불이 터질 일이다. 이러라고 노무현후보를 대통령 만든 것은 아닌데 말이다."
***우리는 지금 최악의 코스인 중남미화로 직행중**
노대통령은 13일 시정연설에서 '아파트값'과 '사교육'에 대해 두가지 약속을 했다.
"부동산가격은 반드시 안정시키겠습니다. 주택가격 안정은 서민생활 그 자체입니다. 서민생활을 위해서도, 우리 경제를 위해서도 부동산 투기는 결코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지금 정부는 종합적인 부동산대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도 부족할 때에는 강력한 '토지공개념 제도'의 도입도 검토하겠습니다."
"사교육비 문제는 서민생활의 안정을 위해서 반드시 해결해야 합니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지난 수십년동안 해결되지 못한 문제입니다. 그렇다고 손놓고 있진 않습니다. 연말까지 대책을 내놓겠습니다. 그리고 근본적인 교육혁신 방안도 함께 마련하겠습니다."
내 '성실한 친구'가 느끼는 절망에 대한 해답을 내놓겠다는 약속이다. 아니, 지난대선때 노대통령을 적극지지했다가 지금 등을 돌린 유권자들에게 내놓는 약속일 것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을 비롯한 지금 많은 경제전문가들은 말한다. "지금 한국이 맞이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절대빈곤의 문제가 아니라 상대빈곤의 문제다"라고.
IMF사태후 가진이들은 정말 살기 좋아졌다. IMF직후 30% 고금리시절에 엄청난 '금리차익'을 챙겼고, 그후 '묻지마 투자' 시절에는 거액의 '투자차익'을 챙길 수 있었고, 이번에는 '아파트차익'을 챙기고 있다. 반면에 없는이들은 3번의 '기회'에 모두 소외됐고, 가진이들과의 '거리'는 따라가기 불가능할 정도로 벌어졌다. 상대빈곤의 심화이자, 전형적인 '중남미화'이다.
이같은 중남미화는 중산층 붕괴를 의미하며, 아울러 중산층 붕괴는 내수경제 붕괴를 의미한다. 한 나라의 경제기반이 총체적으로 붕괴된다는 의미다.
또한 아파트값 폭등과 사교육 절대화는 계층상승을 근원적으로 차단하는 최악의 정치-사회적 상황 악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내 친구가 다시 희망을 말할 때에만 '재신임'**
대통령이 재신임을 선언했다. 하지만 재신임은 노대통령의 시정연설에서 나타났듯 참여정부 초기의 '경제 실정'에 대한 철저한 자기반성과, 같은 실수를 되출이하자 않겠다는 단호한 실천이 전제됐을 때에만 의미있는 작업이다.
대통령의 재신임 선언이 단순한 정치적 위기 탈피책이 아닌, 한국사회가 직면한 총체적 위기 돌파를 위한 자기혁신의 과정이기를 기대하고 주문한다. 내 친구같은 '평범하지만 성실한 국민'이 눈물을 흘리는 대신 다시 희망을 말할 때 비로소 노대통령은 '재신임'을 받는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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