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 이후 이해할 수 없는 논의들이 이어졌다. 정치권을 배제한 개혁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주목받았다. 유재원 한국외대 명예교수는 촛불을 높이 평가하는 인터뷰 말미에 "우리 국민은 불의에 저항해 무너뜨리는 데까지는 열심인데 그다음의 제도 개혁은 정치인에게 맡기는 경향이 있다. 그래선 안 된다"고 말했다. 촛불에 참여했던 많은 주변 사람들도 유사한 얘기들을 많이 했다. "정치권이 개입되면 될 것도 안 된다"면서 말이다.
물론 정치권을 불신하는 태도야 백번 이해한다. 하지만 촛불처럼 일상을 초월한 순간이 중요한 만큼 일상의 의회정치도 중요하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언제까지 시민들을 광장정치로만 내몰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매번 국민들이 거리에 나와 자신들의 목소리를 외쳐야만 유지될 수 있는 사회는 불안정한 사회이다. 광장의 방식으로는 절대 국가를 통치할 수 없다. 2016~2017년의 촛불은 박근혜 퇴진을 중심으로 한 촛불이기에 광장정치가 가능했을 뿐이다. 임대료상한제, 등록금 인하, 주거비 부담 완화, 음주운전 처벌 강화 같은 의제들을 가지고 광장정치가 지속될 수 있을 것이라 믿는 건 공상일 뿐이다.
촛불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도 같은 시민이다. 수많은 시민들이 거리에 나와 촛불을 들고 박근혜 정권 퇴진을 외치고 새로운 나라에 대한 희망을 얘기했다. 하지만 이에 동의하지 않는 시민들도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모두 한국사회를 구성하는 시민이다. 사법독립, 정치개혁, 박근혜 퇴진 등 촛불집회에서 나온 모든 주장들이 다 설득력 있고 맞는 얘기지만 이는 시스템 안에서 바뀌어야만 지속될 수 있는 가치가 있다.
시민들 사이에 대화와 타협을 강조하는 제도가 바로 서지 않고 일부의 주장이 사회를 지배하는 방식으로 제도가 구성된다? 반대의 경우엔 어떻게 할 것인가. 태극기부대와 자유한국당 지지자들이 촛불에 참여한 인원만큼 많이 거리로 나와 반동의 정치를 외치고 그 압박으로 사회가 거꾸로 간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럼 또 광장에서 맞불집회를 놓고 난장판 싸움을 벌여야 하는가? 우리는 되는데 상대는 왜 안 되는가? 그리고 시민들 사이의 직접적인 갈등 해결을 맡아서 하는 곳이 의회 아니었던가? 사회의 많은 결정은 광장이 아니라 의회에서 결정되는 게 맞다.
촛불의 결과로 직접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100일 대국민 보고대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국민은 주권자로서 평소에 정치를 그냥 구경만 하고 있다가 선거 때 한번 행사하는 이런 간접민주주의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 … 직접민주주의를 국민께서 요구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도 이런 국민의 집단지성과 함께 나가는 것이 성공의 길이라고 생각한다." 간접민주주의를 비판하고 직접민주주의를 받아 안겠다는 말이다. 이를 받아 직접민주주의 예찬론자들도 많이들 직접민주주의를 주장하곤 했다.
우리가 아는 직접민주주의는 허상이다. 우리는 보통 그리스의 민주주의가 모든 시민이 한 자리에서 모여서 모든 것을 결정하는 직접민주주의라고 믿는다. 더 나아가 이러한 방식이 가장 좋은 방식이지만 인구가 많고 모두가 참여할 공간을 마련하기 어려워 지금 같은 대의민주주의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러한 믿음은 사실이 아니다. 모든 시민이 모여서 모든 것을 결정하는, 우리가 믿는 그 민주주의는 존재하지 않았다.
고대 아테네 역시 민회가 모든 권력을 가지지는 않았다. 즉, 시민들이 한 자리에서 모여서 모든 걸 결정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중요한 일들은 평의회, 법정, 입법위원회, 행정관 등 다른 기관들에 의해 수행됐다. 그 기관들의 구성원들은 추첨을 통해 선출됐다. "오늘의 통치자가 내일의 피치자가 되는 것", 교체성이 아테네 민주주의의 핵심이었지 모두 모여서 다 같이 결정하자는 건 핵심이 아니었다.
우리는 통치의 관점에서 민주주의를 바라봐야 한다. 모든 사람이 모여서 모든 것을 결정하는 통치체제는 존재한 적이 없었다. 현대의 시민들은 장소, 인구수 등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대의민주주의를 하는 게 아니다. 나눠진 의견들을 집약하고 더 중요한 의제를 대화와 타협을 통해 선택하는 것을 더 잘할 수 있는 제도가 대의민주주의이기 때문에 대의민주주의를 하는 것이다.
더 나은 정치를 위해서는 의회가 바로서야 한다.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은 "촛불과 광장에서의 민주적 열정이 어떻게 하면 정당정치를 좋게 만드는 문제로 연결될 수 있는지를 고민하지 않고, 광장 안에 시민참여의 에너지를 가두어 두려는 것은 결코 좋은 결과를 낳지 못한다"고 말했다. 정치혐오로 인해 현실적으로 불필요한 직접민주주의 논쟁을 하기 보다는 어떻게 시민들이 선출한 대표들이 공익에 헌신하게 만들지 고민하는 게 더 생산적인 논쟁이다.
이런 논의 자체를 의회주의라 폄하할 이유가 없다. 의회 밖에 있는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정치를 해야 한다는 주장도 많이 있다. 하지만 의회가 바로 서지 않고 어떤 정치를 논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시스템의 정상화다. 연동형비례대표제를 통해 시민들의 의견이 국회로 반영될 수 있도록 해야 하고, 정치장벽을 낮춰 많은 시민들이 정치의 문턱을 넘을 수 있도록 해야 하고, 다양한 정당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경쟁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시민참여를 포함한 대의민주주의의 빈틈을 메우는 많은 것들이 좋은 정치를 만드는 것보다 덜 중요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좋은 정치를 만드는 것보다 중요한 건 없다.
하지만 의회가 바로서야 한다는 것이 의회정치에만 매몰될 말은 아니다. 의회정치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조직은 정당이다. 다양한 정당들이 수많은 지역과 시민들의 의지를 모아내고 경쟁해 사회의 중요한 선택들을 결정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정당활동과 지역활동이 결합돼야만 의회정치가 바로 설 수 있다.
의회를 바로 세우기 위해선 정치혐오 문화를 극복해야 한다. 하지만 비판만으로는 정치혐오 문화를 극복할 수 없다. 앞선 글에서 언급했지만 정치혐오 확산에 대한 책임은 기성정치인, 언론, 교육에 있다. 이들은 정치혐오를 만들고 확산시키며 시민들을 정치와 멀어지게 하고 시민들이 눈감은 그 순간 자신들의 이익을 공고히 하는 장벽을 쌓고 있다. 물론 이들은 비판받아 마땅하고 많은 시민들이 정치혐오 확산의 메커니즘을 알아야 하는 것도 맞다. 하지만 이들을 비판한다고 정치혐오는 저절로 극복되지 않는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정치혐오를 극복하려면 다른 사례를 보여주는 수밖에 없다. 정치가 더러워 시민들이 정치를 혐오하는 것인가, 시민들이 정치를 혐오해서 정치가 더러워지는 것인가? 지금은 이 악순환이 돌고 돌아 누가 원인인지 파악하기 어려운 상태다. 이 무한의 고리를 끊어내려면 해결할 수 있는 지점부터 해결해나가는 것이 맞다. 정치혐오는 없앨 수 없다.
앞서 말했듯 정치혐오는 수많은 사회의 기득권들이 앞을 다투며 조장하는 문화다. 하지만 정치는 바꿀 수 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는다. 지역에서부터 기득권과 거리를 둔 청년정치인들이 갈등을 다루는 예술이라는 정치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 될 거라 생각한다.
정치에 도전하고자 하는 청년들이 정치혐오의 장벽 앞에서 좌절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장벽은 기득권이 몇십 년 동안 쌓아온 것이기에 만만하지도 않고 한순간에 무너지지도 않는다. 많은 정당들이 ‘정치혐오 극복과 의회 정치의 정상화’라는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흔들리지 않는 의지를 가진 청년정치인들을 많이 양성해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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