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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넓고 사람 적은 곳

[김기협의 퇴각일기] 스무 번째 이야기

네이멍구(內蒙古)는 중국의 성급(省級) 소수민족자치구의 하나다. 면적은 118만여 평방킬로미터로 중국 육지면적의 12.3%를 점하는데 인구는 약 2500만 명으로 1.8%에 불과하다. 한랭-건조 지역이어서 농업이 빈약하기 때문에 인구밀도가 낮은 것이다.

'내’몽골이 있다면 ‘외’몽골도 있을 것 아닌가. '몽골인민공화국'으로 알려져 있다가 1992년 '인민'을 떼고 '몽골(Mongolia)'로 이름을 바꾼, 중국과 러시아 사이에 끼어있는 나라가 외몽골이다. 몽골의 면적은 156만여 평방킬로미터로 네이멍구보다 크지만, 인구는 300만 명이 안 된다. 외몽골의 기후가 내몽골보다 더 한랭-건조한 이유도 있지만, 외부로부터의 인구 유입이 적은 까닭이 더 크다. 네이멍구 자치구 인구의 80%가 한족이고 몽골족은 17%에 불과한 반면 몽골은 인구의 95%가 몽골족이다.

몽골 지역을 내-외로 구분하는 것은 명(明)나라 이래의 관행이다. 원(元)나라 잔여세력이 고비사막 북쪽의 막북(漠北)으로 옮겨가 북원(北元)의 깃발을 지키며 명나라에 저항한 것이 외몽골이였고, 사막 남쪽의 부족들은 명나라 통치에 순응해서 내몽골이 되었다. 청(淸)나라는 몽골족을 우대해서 몽골족 대부분이 순응했지만, 내몽골 지역이 6개 맹(猛)과 49개 기(旗)로 정연하게 조직된 데 비하면 외몽골 지역은 방치되어 있었다. '猛(멍)'과 '旗(치)'는 아직도 네이멍구에서 지방 조직 단위의 이름에 쓰이고 있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 왕조가 끝날 때는 내몽골 지역에 이미 한족이 많이 살고 있었다. 그래서 초기의 중화민국에서는 내몽골 지역을 하나의 행정단위로 묶지 않고 여러 개 성에 분속시켰다. (외몽골은 중국에서 떨어져 독립했다.) 내몽골을 하나로 묶인 것은 1930년대 초 일본제국의 괴뢰정부 몽강연합(蒙疆聯合)에서였다. 만주족이 한족에 대항하도록 만주국을 세운 것과 같은 목적으로 만든 것이다. 일본인이 물러간 후 1947년 4월 지역 민족대표 393인이 모여 네이멍구 자치정부를 세웠고, 이것이 중화인민공화국에 편입되었다.

지난 주말에 다녀온 곳은 네이멍구 자치구의 동북쪽 끝인 후룬베얼(呼伦贝尔) 시였다. 자치구를 구성하는 9개 시(市) 3개 맹(猛)의 하나인데, '시'라는 이름이 무색한 초원지대다. 한반도보다 넓은 면적에 인구는 약 250만 명. 몽골, 러시아와 국경이 마주치는 3국 접경지역이다.

금요일 아침 일찍 연길역에서 탄 기차가 창춘(長春)을 지나 바이청(白城)에서 네이멍구로 접어들 무렵 해가 졌다. 그곳까지는 농지와 숲의 풍경이 크게 바뀌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새벽빛에 잠이 깨어 차창 밖을 내다보고 "초원지대란 게 이런 데구나!” 알게 되었다. 녹색 풀밭이 일망무제로 펼쳐져 있고 밭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나무는 이따금 덤불이 보일 뿐, 숲다운 숲이 없었다. 하이랄(海拉尔)역까지 서너 시간 달리는 동안 마을과 공장이 몇 군데 나타났지만 도시라고 할 만한 곳은 없었다.

가는 길에 제일 먼저 탄복한 것은 철도의 수준이었다. 연길에서 창춘까지는 고속철 아닌 옛날 철로로 나가는데, 대부분 구간이 전철화되지 않은 단선이었다. 창춘에서 기관차를 바꿔 달고 서북쪽으로 달리기 시작해서 하이랄까지 전철화된 복선으로 우리 경부선 수준이었다. 인구가 적은 지역이므로 정비 수준이 낮을 것을 예상했는데 뜻밖이었다. 지나가는 기차는 대부분 화물열차였다.

우리가 탄 기차는 관광 전용열차였다. 이튿날 저녁 관광이 끝날 때까지 이 열차는 차고에서 대기할 것이므로 꼭 필요하지 않은 짐은 찻간에 두고 가도 된다는 안내가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쓸 식량과 식기를 차에 두고 내렸다.(3박 4일 일정 중 2박 2일이 25시간씩 걸리는 기차 칸 안에서였다.) 역에서 나오다가 기차시간표를 보니 관광 전용열차가 여러 편이 들어오게 되어 있었다. 이 지역 관광 진흥을 위해 철도를 비롯한 여러 당국의 협력이 있는 모양이다. 우리 기차에서 함께 내린 500명이 10개 버스에 나눠 타고 따로따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늦은 아침을 먹은 후 하이랄을 떠나 후룬호(呼伦湖)를 구경한 다음 만저우리(滿洲里)로 가서 오후를 보냈다. <바이두백과>의 '후룬베얼' 기사 첫머리에 시 면적 25만여 평방킬로미터 중 12만6천 평방킬로미터가 산림, 10만 평방킬로미터가 초원, 2만 평방킬로미터가 습지이며, 5백여 개 호수가 있어서 중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온전한 생태계가 갖춰져 있다고 했다. 가장 큰 호수인 후룬호는 수면 면적이 2339 평방킬로미터에 달하는 바다처럼 망망한 호수다. 우리 귀에 익은 동정호(洞庭湖), 파양호(鄱陽湖) 등과 맞먹는 크기다. 물속에 들어가 노는 사람들이 조금 있었다. 일교차가 큰 곳이라 새벽의 13도에서 한낮에는 30도 가까이 올라가 있고 햇볕이 쨍쨍해서 물놀이에 좋은 날씨였다.

▲수평선 너머가 가물가물한 후룬호 풍경. ⓒ바이두백과

▲하이랄 강. 해발 500미터가 넘는 고원지대지만 지형이 평탄해서 강이 구불구불 흘러가고 강변에 잘 보존된 습지도 많다. ⓒ바이두백과

▲초원이 녹색으로 보이는 기간은 연중 얼마 안 된다고 한다. 대부분 기간은 누런 색깔이거나 눈에 덮여 있다고. ⓒ바이두백과

만저우리. 여행 계획을 세우며 제일 흥미가 끌린 곳이다. 이 방면에 화물열차가 많은 것은 만저우리를 통해 시베리아로 오가는 화물 때문일 것이다. '만저우리'라는 기차역과 도시의 이름은 1901년 동청철로(東清鐵路)의 개통 때 만들어진 것이다. 러시아는 1891년부터 시베리아횡단철도 건설을 시작하고 있었는데, 1896년 이후 청나라에 대한 영향력이 커지면서 동청철로 개설권을 따냈다. 시베리아철도로부터 치타에서 갈라져 나온 철로가 중국으로 국경을 넘을 때 "여기가 만주(Manchuria)다!" 한 데서 그 이름이 나왔다고.

▲치타-블라디보스토크 간의 거리가 중국의 동북지방을 통과함으로써 많이 짧아진다. ⓒ위키피디아

연변 길거리의 표지판과 간판에는 조선어와 한어(漢語)가 함께 적혀 있다. 모든 소수민족 자치구역의 제도요 관습이다. 하이랄 거리의 간판에도 몽골어와 한어가 나란히 적혀 있다. 그런데 만저우리에서는 여기에 러시아어가 보태져 있었다. 30만 가까운 인구로 하이랄과 나란히 이 지역 최대 도시인 만저우리는 러시아와의 관계 위에서 태어난 도시다. 중국의 내륙 국경도시 가운데 통관 교통량이 가장 큰 곳이라고 한다.

▲러시아 오뚜기 인형 모양의 구조물이 만저우리의 최고 호텔 객실부라고 한다. 왼쪽으로 붙어 있는 고전적 형식 건물의 연회장에서 공연을 관람했다. ⓒ바이두백과

러시아 상품 쇼핑이 만저우리 관광의 큰 아이템이다. 한 군데 쇼핑센터에 들어가니 칸마다 예쁜 러시아 아가씨가 하나씩 있는데 그냥 서 있는 관람용 점원 같다. 한족 점원들은 열심이다. 카트를 몰고 열심히 따라다니며 열심히 권한다. 상품은 매력적인 것이 별로 없고, 초콜릿과 소시지 정도가 인기 품목이다. 중국 동북지방에 소시지(샹창, 香腸) 먹는 풍속이 있어서 연길에도 고기를 가져가면 소시지 만들어주는 가게들까지 있던데, 러시아인이 하얼빈에서 퍼뜨린 풍속이라고 한다. 만저우리를 통해 러시아에서 수입되는 품목은 대부분 목재, 광물 등 원자재이고 중국으로부터는 소비재가 많이 수출된다고 한다.

저녁식사는 러시아 가무단이 공연하는 디너쇼였다. 공연보다 식사가 재미있었다. 모처럼의 서양식 코스디너인데, 연회장에 들어가니 자리마다 여러 코스 접시가 모두 쌓여 있었다. 소시지와 샐러드에서 닭다리와 감자칩, 그리고 디저트용 과자까지. 그런대로 만족스러운 식사를 끝내고 한참 앉아 있을 때 수프(굴라시)가 나왔다.

둘째 날은 버스를 많이 탔다. 아침 일찍 출발해서 동북쪽으로 달리는데, 똑바로 뻗은 길이 100킬로미터도 넘는 것 같았다. 길 왼편 100미터쯤 거리로 나란히 쳐진 철조망이 낯익게 느껴져서 가만 생각하니 두만강변의 철조망과 같은 규격 같았다. 이따금 "국경 지역에서 무인기(無人耭, 드론)를 날리지 마시오" 같은 현수막이 걸쳐져 있었다. 러시아 쪽으로 여겨지는 마을이 저 멀리 몇 군데 보였다.

국경을 따라 달리다가 신기하게 생각된 것이, 군사시설도 군인도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몇 군데 부대가 보였는데 대부분은 경비병 막사 정도로 보였고, 좀 큰 부대도 특별한 무기를 갖춘 곳 같지 않았다. 길에서 마주친 군용차량도 몇 대 되지 않았다. 이 구역의 국경은 아르군 강(Argun, 额尔古纳河)이고 수백 킬로미터 하류에서 치타 방면으로부터 흘러오는 실카 강(Shilka)과 합류해 헤이룽장(Amur, 黑龍江)이 된다. 강에서 몇백 미터 거리에 철조망을 쳐서 그 안을 통제구역으로 하는 모양인데, '국경'의 긴장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검문이 엄격한 두만강변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

중국의 55개 소수민족 중에 '과경(跨境)'민족이 몇 있다. 국경 밖 다른 국가에 같은 민족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조선족과 몽골족이 대표적 과경민족이다. 연변의 조선족사회는 남한, 북한과 꽤 많은 교류 관계를 갖고 있는데, 네이멍구의 몽골족사회는 어떨까, 떠나기 전부터 제일 궁금한 일이었다. 몽골은 경제발전이 늦은 상태여서 한국에도 몽골인 노동자가 많이 와 있다. 산업과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고 있는 후룬베얼 등 네이멍구 지역에도 몽골인이 많이 와 있지 않을까?

현지 가이드가 명민한 몽골족 청년이어서 틈틈이 몇 가지를 물었다. 아루스(阿魯斯)라는 이름의 이 31세 청년은 매사에 자신만만한 태도였고 내 질문에 대답도 거침이 없었다. 그 거침없는 태도가 매우 인상적이어서 얘기 끝에 "당원이죠?" 물었더니, 그렇다고 한다.

20년 전의 연변 상황이 생각난다. 한국인의 중국 관광이 격증하면서 관광 가이드가 황금직종으로 떠올랐다. 공산당원으로 좋은 직장을 가진 사람들까지 많이 전업했고, 지금 연변의 사업가 중에는 그런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네이멍구의 발전은 더 늦었기 때문에 아루스 같은 유능한 청년들이 지금 관광산업에 열정적으로 뛰어들고 있는 것 같다. 집에 돌아와 <바이두백과>를 살펴보니, 내가 탄복했던 이 지역 철로 수준도 과연 2010년대 들어서야 향상된 것이었다.

몽골, 즉 외몽골에 대한 아루스의 시각은 일반 한국인이 북한을 보는 시각과 비슷한 것이었다. "그 사람들 괜히 독립했다고 후회막심하답니다. 경제가 형편없대요." 아루스는 몽골족 엘리트로서 상당한 '민족심'을 가진 것 같다. 몽골족사회의 장래 발전에 외몽골 사람들도 동참하기 바라는 뜻이 수시로 비친다. 네이멍구 지역에서 몽골족의 역할이 줄어드는 데 대한 걱정도 그 뜻에 묻어있는 것 아닐지? 연변에서도 민족심이 강한 조선족 지식인들 중에 민족정체성의 약화에 대한 걱정이 많다.

조선족 외의 소수민족 사회를 처음으로 살펴볼 기회라고 걸었던 기대는 어그러졌다. 간판마다 한어와 나란히 몽골어가 적혀 있지만 '몽골족사회'의 느낌을 이틀 동안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네이멍구 지역 중에도 후룬베얼 지역의 몽골족 비율이 낮은 편으로 10% 전후라고 한다. 초원 구석구석에는 오랜 생활관습을 지키며 사는 몽골족이 꽤 있을지 모르나, 도시는 중국 도시의 구조 위에 몽골어와 몽골 문양(紋樣)의 장식만 씌워진 것 같았다.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에도 '햇볕정책'의 원리가 적용되는 것 같다. 다양성을 배척하던 문화혁명 시기, 민족과 관련된 일체의 활동이 억압당할 때는 '민족심'이 강렬했다고 한다. 그러나 자유로운 활동이 허용되는 개혁개방 시기에 와서는 개인의 발전이 중국사회의 주류를 향하게 되면서 조선족문화에 대한 애착이 희석되어 왔다.

그래도 조선족사회의 민족심은 중국의 다른 소수민족에 비해 잘 지켜질 것 같다. 국경 너머에 있는 큰 민족집단과의 교류를 통해 민족정체성이 계속 고무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몽골공화국은 중국의 몽골족에게 큰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네이멍구 구경에 나서면서 또 하나 큰 생각거리는 중국과 북방민족들 사이의 관계다. 진한(秦漢)시대의 흉노 이래 중화제국 체제에 대한 중요한 도전이 거듭해서 북방으로부터 닥쳐온 역사. 오늘은 당장의 소감을 적기 바빠 그 주제를 젖혀놓았는데, 한 차례 따로 정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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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협

40세 나이에 교수직을 그만둔 후 20여 년간 독학으로 문명교섭사를 공부해 온 역사학자. 서울대학교 이공계 수석 입학 뒤 사학과로 전과한 독특한 이력이 있다. 프레시안 장기 연재를 바탕으로 <해방일기>, <뉴라이트 비판>, <페리스코프>,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 등의 책을 썼다. 프레시안 창간 때부터 거시적 관점에서 역사와 한국 사회를 조망하는 글을 꾸준히 쓰고 있다. <역사 앞에서>의 저자 김성칠 교수가 부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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