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영 대법원장이 신임 대법관을 과거와 똑같은 방식으로 추진하려 하자, 제청 자문위원으로 참가했던 위원들이 회의도중 퇴장한 뒤 사퇴하고 대법관 후보로 추천된 판사까지 대법원의 전횡을 비판하며 사표를 제출하는 등 갈등이 일파만파로 확산되고 있다.
***12일 자문위원 중도퇴장 사건**
갈등은 오는 9월11일 퇴임하는 서성 대법관의 후임 인선을 위해 12일 오후 대법원 6층 회의실에서 처음 열린 대법관 제청자문위원회에서부터 표출됐다.
개혁성향의 박재승 대한변협 회장은 “대법원장이 제시한 3명의 후보외에 다른 사람들을 추천할 여지가 없는 현재의 자문위원회에는 참여할 의미가 없다"며 회의도중에 사퇴한 뒤 팩스로 자문위원 사임계까지 제출했다. 박재승 회장이 책임맡고 있는 대한변협은 회의 전에 최병모 민변회장과 박시환 서울지법 부장판사 2명을 추천했었다.
최종영 대법원장은 그러나 이들 추천을 무시하고, 김용담 광주고법원장(사시 11회), 김동건 광주고법원장(11회), 이근웅 대전고법원장(10회) 등 세명의 현직법관을 대법관 후보로 자문위에 추천했다.
이같은 최대법원장의 추천에 대해 이날 회의에 참석했던 강금실 법무장관도 "다양한 후보가 논의돼야 한다"는 반대입장을 밝힌 뒤 회의도중 다른 업무를 이유로 퇴장했다.
***박시환 판사 사퇴하며 "대법원 한치도 변하지 않아 절망"**
대한변협에서 대법관 후보로 추천 받았던 박시환 서울지법판사(사시 21기)도 13일 ‘법관직 사직의 변’이라는 사퇴이유서를 발표하며 판사직에서 전격 사퇴했다.
박판사는“근래 십수년 사이에 몇 차례 우리 사회 전체가 크게 개혁과 도약을 이루는 전환의 계기를 맞았을 때에도 우리 사법부는 외부의 흐름에 밀려 마지못하여 변신의 흉내만을 내었을 뿐 그 속내에서는 아무런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 채 과거 암울하던 권위주의 정권 시대 사법의 기본 구조를 지금 이 시점까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박판사는 “그 결과 사법부에 대한 국민의 기대는 아쉬움과 실망을 넘어 분노와 절망의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고 사법 개혁에 대한 국민의 요구는 이제는 아무도 거스를 수 없는 큰 물결이 되어 사법부를 옥죄고 있다”고 비판했다.
박 판사는 “법원 안팎의 법조인은 물론 온 국민과 각종 사회단체에서 하나같이 새 대법관은 완전히 새로운 기준과 방식으로 선임되어야 함을 외쳤고, 대다수의 국민과 법관들은 이번의 대법관 선임은 완전히는 아니라 할지라도 어느 정도는 새로운 방식과 기준에 의하여 선임될 것이라는 강한 기대 속에 대법관 선임 절차를 기다려 왔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이제 그 기대를 철저히 저버릴 것으로 예상되는 지금의 상황에 대하여 나는 허탈감과 참담함에 몸이 떨린다"며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러한 모든 결과에 대하여는 18여년간 사법부에 법관으로 몸담아 온 나 자신 역시 그에 대한 책임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며, 그 동안의 비겁한 타협과 안일한 외면, 무책임한 침묵에 대하여 자괴심과 죄송스런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고 사퇴이유를 밝혔다.
***박시환 판사, "대법관이 마지막 승진코스처럼 돼선 안돼"**
박 판사는 13일 오후 프레시안과의 통화에서 “추천을 받은 당사자로서 사표를 낸 데 대해 일부에서는 ‘대법관 후보에서 탈락한 것에 대한 불만’이라는 오해도 있는 것으로 안다”면서 “그러나 아무리 사법개혁이라고 해도 현재로서 내가 추천된 것은 기수로 보더라도 일종의 상징성이었다는 점에서 현실성 없는 추천”이라며 세간의 억측을 일축했다.
박 판사는 “다만 대법원장이 기득권적인 논리로 똑같은 성향의 원장 바로 아랫기수 3분을 대법관 후보로 제청한 것을 보고 절망을 느꼈기 때문에 행동으로서 사법개혁에 대한 열망을 표현했을 뿐”이라면서 “설혹 원장께서 사표를 반려하더라도 되돌릴 수 없는 행동을 한 것이기에 내가 판사직을 그만둔다는 것은 기정사실”이라고 덧붙였다.
박 판사는 “자문회의에서 실질적인 토론 끝에 대법원장의 대법관 제청이 이뤄졌다면 사표를 내지는 않았을 것이냐”는 질문에 대해 “법조개혁이 하루아침에 급격하게 이뤄지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고 다만 전향적인 자세라도 보여질 것으로 기대했는데, 이마저도 완강히 거부당한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에 사표를 낸 것”이라고 밝혔다.
박 판사는 대법관 제청 방식의 개혁의 구체적 방향에 대해 “대법원장이 이번에 제청한 분들이 부적격자라는 것이 아니다”고 전제한 뒤 “하지만 마치 법관의 마지막 승진코스처럼 여겨지는 관행을 타파하는 의미에서 열린 인사, 현행법상 변호사 자격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대법관 후보로 제청될 수 있는 다양성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가자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대법원장의 반시대적 의지에 실망하지 않을 수 없다"**
당연히 최종영 대법원장에 대한 시민단체들의 비판도 잇따랐다.
민변은 13일 '변화와 개혁을 거부하는 대법원장의 대법관 제청권 행사에 대해 참담함을 금치 못한다'는 논평을 통해 "대법원장은 국민과 언론 및 시민단체 등의 기대를 헛되게 만들고 대법관제청 자문위원회를 당장의 소나기를 피하는 식의 요식적 기구로 전락시켰다"며 "이같은 상황에서 사퇴파동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민변은 "이는 대법원장 스스로 변화와 개혁이 두렵고 사회변화에 대해서는 둔감하기 그지 없다는 사실을 자인한 것"이라며 "여전히 과거 독재정권 시절부터 이어져온 사법관료제의 전통을 수호하고야 말겠다는 대법원장의 반시대적 의지에 우리는 실망하지 않을 수 없다"고 최대법원장을 정면공박했다.
참여연대도 이날 '대법원은 언제나 자신들만의 성(城)에 갇혀 있을 것인가'라는 성명을 통해 "대법원의 구성원 모두가 진보-개혁적 인사여야 한다거나 외부에서 추천한 인사들이 후보에 오르지 않은 것을 문제삼는 것은 아니다"라며 "다만 현재의 구성원 면면과 그에 따른 판례를 통해 볼 때 대법원이 지나치게 보수화-남성화되어 있는 것은 자명하며 따라서 이번 제청과정은 기대를 철저히 저버린 것으로 어떤 변화의 흔적도 엿볼 수 없는 그야말로 구태의 반복에 다름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현 정부 임기내 14명 대법관 중 13명 임기 만료**
이번 신임 대법관 인선은 사실 차세대 대법원 구도의 밑그림을 그리는 첫 인사라는 점에서 법조계 안팎에서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현 대법원장과 대법관 14인의 임기를 보면 9월 퇴임하는 서 대법관 이외에 2004년 1인, 2005년 5인, 2006년 6인, 2009년 1인의 임기가 끝나게 돼 있어 현정권 임기중 대법관 14인중 13인이 인사 대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동안 법조계 및 시민단체, 언론등은 '법조개혁' 측면에서 재조법조계는 물론 재야법조계 및 여성계 등에서 능력있는 개혁적 인사들이 뽑혀야 한다며 모두 8명의 후보를 추천했다. 하지만 이번에 최종영 대법원장이 이를 거부함으로써 논란을 자초한 셈이다.
이같은 각계 반발에도 불구하고 최종영 대법원장이 내주초 추천 대법관 후보 3명중 1명을 예정대로 제청하게 되면, 최 대법원장은 자문위 자체를 들러리 기구로 이용했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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