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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서도 바이체커 나와야"

강원용 목사가 한국 야당에 던지는 '큰 주문'

강원용 목사는 그의 자서전 <역사의 언덕에서> 마지막 5권에서 '내가 사랑한 사람들'이라는 별도의 장(章)을 꾸려놓고 있다. 강목사는 여기서 빌리 브란트가 '독일통일의 아버지'가 되기까지에는 야당에 폰 바이체커라는 위대한 '민족적 정치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독일의 통일은 브란트 수상이 '동방정책'을 추진할 때 야당의 거센 반대를 온 몸으로 막아내며 민족적 관점에서 브란트의 동방정책을 지지한, 자신 및 소속정당의 정치적 이해를 뛰어넘은 '거목'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주장이다.

강목사는 그러나 우리나라 정치권 즉 야당에는 바이체커와 같은 '정치가'는 드물고 자신 및 소속정당의 이해관계만 앞세우는 '정략가'들만 많다고 개탄하며, "특히 우리나라와 같은 분단국가에는 바이체커 같은 정치가가 나와야만 통일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야당에 대한 '어른'의 준엄한 질책이자 주문이다.

'특검'의 수사범위와 기한연장을 앞두고 또다시 정치권이 들끓기 시작한 지금, 반드시 야당 정치인들이 일독하기를 희망하며 강목사가 쓴 '바이체커에게 배울 점'이라는 글을 싣는다. 편집자주

***바이체커에게 배울 점**

내가 바이체커를 처음 만난 것은 1969년 스웨덴 웁살라에서 모인 WCC 총회때였다. 이후 1975년까지 그와 나는 함께 WCC 실행위원으로 활동하면서 1년에 적어도 두번씩은 만났다. 1975년도에 그가 정치에 전력하기 위해 WCC를 그만 둘 때도 우리는 가급적 계속해서 만날 기회를 만들자고 약속했고, 그후 내가 유럽에 갈 때면 빠짐없이 만났다.

그는 한국에 왔을 때 나의 소개로 김대중을 만났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김대중이 정치탄압을 받고 있을 때 빌리 브란트 당수와 함께 석방을 위해 크게 노력하기도 했다.

정치인으로 그가 걸어온 행적을 지켜보아온 나는 단순한 정치인이 아닌 민족지도자로서 그의 면모에 평소 느끼는 바가 적지 않았다. 그래서 21세기를 맞이하여 새로운 정치적 지도자를 갈망하는 우리 국민들과 특히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꼭 알았으면 좋겠다고 생각되는 점을 중심으로 그에 대한 소개를 하고자 한다.

리하프트 폰 바이체커는 1920년 독일 귀족집안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에서는 그뿐만 아니라 형과 동생도 정치활동을 펼쳤는데, 세 형태의 정치노선은 조금씩 다르다.

우선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그의 형 카를은 1957년 서둑 핵무장 반대운동을 했으며 '괴팅겐 선언'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이 형은 사회민주당(SPD) 대통려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그의 동생은 자유독일당(FDP)의 지도자, 그리고 리하르트는 기독교민주당동맹(CDU)에 속하며 10년동안 대통령을 지냈다.

바이체커는 괴팅겐 대학에서 법학과 역사학을 공부했고, 옥스퍼드 대학과 그로노블 대학에서도 공부했다. 1969년 연방의회 의원에 당선되기까지 그는 평신도로서 독일 개신교연합회의 의장, 개신도 신도연합회의 의장을 지냈으며, 그 당시 세계교회협의회에서 중앙위원, 실행위원 등으로 활동하면서 나와 가까이 지냈다.

정치계에 본격 진출하면서 연방의회 부의장, 베를린 시장을 거쳐 1984년 7월 대통령에 선출되었고 이후 10년동안 대통령직에 있으면서 독일 통일을 이루어냈다. 그는 대통령 임기가 끝난 뒤에도 유럽공동체 형성에 노력을 기울였고, 유엔의 '미래를 연구하는 모임(IWG)' 공동의장을 지냈다. 그는 지금도 다방면으로 활동을 하며 한시도 사회활동을 멈추지 않고 있다.

내가 이 책에서 외국인 정치가인 바이체커를 특별히 지면을 할애하면서 소개하는 것은, 아직도 통일을 이루지 못한 우리나라 정치지도자들이 그에게서 배울 점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독일이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성취하기까지 지도자로서 그가 지켜오고 실천해온 정치철학과 행동에서 우리는 통일에 도움이 되는 뭔가를 배울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광야 40년'**

바이체커는 1985년 5월8일 독일 패전 40주년이 되는 날, 정부와 각계 지도층 인사들이 모인 국회에서 '광야 40년'이라는 제목으로 기념연설을 했다. "오늘은 독일의 패전이라는 점에서 우리에게 슬픈 날이지만, 우리 독일민족이 히틀러 정권에서 해방된 날이다"로 시작되는 이 연설은 20여개국에 번역됐을 정도로 유명하다. 이 강연 내용 중에서 특히 나의 가슴을 두드린 구절이 있다.

"우리는 과거 역사를 오늘의 시점에서 되돌아보고 그런 슬픈 역사는 되도록 빨리 잊어버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과거 역사를 덮어두게 되면 우리는 오늘의 역사를 보지 못하는 장님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아프더라도 과거의 쓰라린 역사를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되새겨서 그것이 확실하게 기억되도록 합시다. 그러면 거기서 화해라는 것이 나옵니다. 과거 청산없는 화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과거 독일과 적대관계를 가졌던 나라들이 있는데, 이들 앞에서 우리는 잘못된 우리의 과거를 마음이 아프더라도 되새기고 청산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 나라와 화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과거의 뼈아픔은 절대로 피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바이체커는 말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히틀러 정권의 최초의 피해자가 폴란드였는데, 그가 대통령이 되어서 가장 먼저 한 일이 폴란드를 방문한 일이었다. 당연히 폴란드에서는 그를 환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대접받으려고 간 것이 아니라, 폴란드 국민에게 사과하러 간 것이었기에 폴란드 국민들의 태도를 문제삼지 않았다. 그는 지금도 폴란드를 유럽공동체(EU)에 가입하도록 하는 운동을 하고 있다.

독일 정치인 중 바이체커만 이렇게 한 것이 아니다. 그 반대당인 사민당의 빌리 브란트도 수상이 되자마자 폴란드의 유대인 묘지에 가서 무릎 꿇고 앉아 주먹으로 땅을 치며 눈물을 흘렸다. 그런 브란트나 바이체커의 행동은 결국 지금 독일이 유럽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가질 수 있도록 한 원동력이었다. 전후 아시아에서 일본이 취해온 태도와는 너무나 대조적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가와 정략가는 어떻게 다른가**

바이체커는 정치인을 두 종류로 나누었다. 하나는 정치가(stateman)이고, 다른 하나는 정략가(politician)이다. 정치가는 민족과 다음 세대에 미칠 영향을 먼저 생각하지만, 정략가는 민족보다 자신의 정치적 이해와 소속정당의 이익부터 챙긴다.

내가 본 바이체커는 진정한 정치가였다. 그것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예는 반대당인 빌리 브란트가 수상이 되어서 이른바 '동방정책'이라는 것을 국회에 내놓았을 때였다.

야당인 바이체커가 속한 기독교민주동맹에서는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그것을 반대했다. 그런데 바이체커만이 민족문제를 먼저 생각해서 빌리 브란트를 지지했다. 그 일로 기민당은 바이체커를 협박하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며 회유책을 썼지만, 그는 끝까지 빌리 브란트를 지지하여 동방정책이 인준될 수 있도록 했다. 결국 이 동방정책이 독일이 통일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또하나, 그의 정치가의 면모를 보여주는 예가 동서독이 통일되었을 때였다. 같은 정당에 속하면서도 콜 수상과 의견이 달랐던 바이체커는 이런 주장을 했다.

"동서독이 정치적으로 통일되어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흡수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동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주고, 동포로서 대하는 것이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 헌법도 동독사람들이 동의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동독 사람들을 못한다고 무시하고, 급이 낮은 국민으로 대하면 안된다. 동독의 어려운 경제를 돕는 것도 정부가 정치적으로 해결하지 말고, 서독민의 애국심, 동포애로 해결하도록 해야 한다."

바이체커는 정부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 어디까지나 국민 모두가 함께 나누는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없이는 진정한 통일이 안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정략가만 많고 정치가는 찾기 힘들어**

우리나라에도 이런 정치가가 있어야 한다. 지금 내가 적은 것은 수많은 일화중 한 예일 뿐이다. 그른 평소 소신대로 자신이나 자기 정당의 이해보다 민족의 이해를 먼저 생각한 정치가였다. 물론 독일에도 이런 사람이 많지는 않지만, 분단국가인 우리나라에 특히 이런 정치가가 나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큰 희망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렇게 바이체커를 특별하게 얘기하는 것은, 그의 이런 자세를 받아들여 실천하는 사람이 우리나라에도 나와서 남북문제, 여야문제, 지역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에는 진정한 정치가는 찾기 힘들고 정략가들만 많다. 민족의 장래와 다음 세대를 먼저 생각하는 정치가, 그리고 민족을 위한 일이라면 소속 정당의 정략을 거부하고 반대당과 협력할 수도 있는 정치지도자를 만나고 싶다.

지난 2002년 2월2일, KBS1 텔레비전에서 '세계를 움직이는 사람들-큰 정치인 바이체커의 선택'이라는 프로그램이 방영되어 우리나라에서도 그의 정치철학을 심도있게 연구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그의 나이는 올해 여든두 살인데 아직 건강하니, 앞으로도 오래 살아서 우리나라의 통일이나 세계평화를 위해 큰 일을 해주기를 바란다.

***대통령 재직때 손수 장을 본 바이체커 부인**

바이체커에 대한 소개와 아울러 그의 부인에 대해서도 얘기하고 싶다. 바이체커가 국회의원으로 있을 때, 크리스찬 아카데미 초청으로 서울에 왔었는데 그의 부인이 아파서 예정보다 더 오래 우리 아카데미 하우스에 머물게 되었다. 그때 그 부부와 우리 부부, 이렇게 넷이 저녁 식사를 한 일이 있다.

나의 아내가 식사 도중 바이체커 부인에게 "어느 대학을 졸업했느냐?"고 물었다.

"중학생때 적성검사를 해보니까 가정일과 사회봉사가 적성이라고 나와서 대학에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여 가지 않았어요."

그 부인은 독일에서 남편 못지않게 국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다. 내가 독일에 갈 때면 거의 예외없이 그 집에 저녁식사 초대를 받는데, 일정이 맞지 않으면 조반을 함께 하기도 한다. 아침에 그 집에 가면 부인은 벌써 봉사활동을 하러 나가고 바이체커가 직접 조반을 준비해서 우리 둘이 함께 먹었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그 부인은 대통령 관저에서 생활할 때도 손수 시장에 가 장을 보곤 하여 경호원들이 당황할 때가 많았다고 한다.

나는 34년간 형식적인 절차를 무시하고 그와 친구로 지내며 우정을 나누어온 점을 다시 한번 감사하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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