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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원로'의 역사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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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원로'의 역사 증언

강원용 목사, 자서전 통해 김대중 구명비화등 공개

"나는 동서독 관계도 잘 알고 있고, 미국이 닉슨 대통령 시절에 중국·소련과 어떻게 관계를 개선했는지도 잘 알고 있어. 그 사람들이 정도라고 생각하는데, 돈과 물건을 주는 것은 으레 있는 일이야. 그것을 따지는 것은 적절치 않아.

나는 독일이 했던 방법을 본받으면 좋겠어...나는 그것이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관계개선을 해야한다고 생각해. 우리 정부에서 돈을 준 것도 마찬가지야. 돈을 얼마나 줬네를 따지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봐."

노무현 대통령이 대북 송금 특검법 수용을 놓고 고민에 빠졌던 지난 3월, 각계 원로의 조언을 듣기 위해 마련된 청와대 모임에 불참했던 강원용 평화포럼 이사장(85. 목사)은 참가 거부의 변(辯)을 이렇게 밝혔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특검법을 받아들였고 전 정권 핵심인사들의 줄소환이 있은 후 특검은 이제 남북정상회담이라는 역사 자체를 겨냥할 태세다.

"특검 찬반을 밝히는 모임에 가지 않겠다"던 강원용 목사는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을까. 이분법적 찬반이 아니라 동서독 통일과정과 데탕트를 통해 본 역사적 사실을 말하는 것으로 의견을 대신했던 그는 아마도 자신이 겪은 또다른 역사를 끄집어내리라.

<사진>

***"제3지대에 내가 설 자리를 찾으려 했다"**

우리 현대사를 만든 핵심적인 사람들과 안팎으로 연계돼있고 역사의 진실을 증언해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인물로 평가받는 강원용 목사가 자서전 <역사의 언덕에서>(한길사)를 펴냈다.

'젊은이에게 들려주는 나의 현대사 체험'이라는 부제가 달린 이번 자서전은 총 5권. 방대한 분량의 자서전을 완성한 그는 "아직 뇌 세포가 건전하게 활동하는 동안" 자신이 겪은 모든 체험을 쏟아놓고 싶었다고 말한다.

이번에 나온 강 목사의 자서전은 의미가 남다르다. 이제 생의 마지막을 정리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역사의 굴곡을 넘어서고 있는 원로로서의 성찰과 반성이 담긴, 우리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역사적 참회록이라는 뜻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목회자이자 민중의 혁명가로, 평화와 환경을 수호하는 인권운동가로. 강원용 목사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단순히 '기독교계 원로'가 아니라 실로 이 땅의 '살아있는 역사'이다. 최근까지도 그는 정치인들의 활동에 대한 실랄한 비판과 참신한 조언을 마다않으며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그런 그를 보고 누군가는 "이 시대의 현실적 원로"라고까지 칭송한 바 있다.

<책표지>

1917년 화전민의 아들로 태어난 일제 치하의 시절에서부터 사이버 혁명의 초현대에 이르기까지 그가 겪은 사건을 일일이 기사로 열거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자서전에 언급된-그가 논했고, 만났고, 협력하고, 싸웠던 사람들 중 '이름 있는' 사람들만 따로 묶은 인명록만 70쪽이 넘는다.

머리말에서 강 목사는 "내 눈으로 보고 내 머리로 판단하고 내 몸으로 겪어온 일들을 사실 그대로 써보고 싶었다"고 했다.

"나는 독선적이고 폐쇄적으로 대립하는 역사속에서 양극을 넘어선 제3지대에 내가 설 자리를 마련하려고 애쓰며 살아왔다. '중간,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Between and Beyond)' 살고자 했던 나는 항상 양극 사이에서 좁고 험한 길을 걸어야 했다. 나를 잘못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중간파, 때로는 회색분자 취급도 받았다.

그러나 어느 편은 '절대 선'이고 그 반대편은 '절대 악'이란 사고방식에 나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 밝은 햇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듯이 이 세상에 완전한 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땅의 현대사와 그 현대사에 연관된 사람들을 평가할 때도 나는 이 관점을 견지하고 있다."

***이야기 한 토막, '김대중 구명' 비사**

강목사의 책에는 그가 경험했던 숱한 역사적 경험과 정치비사가 실려있다. 그런 대표적 예가 지난 1980년 김대중 사형 선고후 김대중 구명을 위해 동분서주했던 사람들의 얘기다. 어두운 시대를 강목사 등 당시 어른들은 어떻게 헤쳐왔는가를 생생히 엿볼 수 있다.

1980년 9월7일 계엄보통군법회의에서 김대중은 사형선고를 받았다. 나는 그 무렵 이명하로부터 김대중에 대한 사형 집행이 조만간 있을 것이라는 구체적인 정보까지 듣게 되었다. 우리 정치사에서 조봉암 사형만으로도 끔찍하고 부끄러운 일을 겪었는데, 또다시 그런 비극적이고 어리석은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판단아래 나는 NCC회장 자격으로 전두환대통령에게 김대중을 사형시키지 말아달라는 호소문을 보냈다. 이에 대해 청와대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김수환 추기경도 카톨릭 신자인 유학성 정보부장을 통해 김대중 구명운동을 벌이느라 애를 많이 썼으나 그 역시 별 신통한 반응이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무렵 나는 정일형 박사를 문병하러 그의 집에 들렀다. 중병에 걸려 몸도 잘 가누지 못하고 누워있던 정박사는 나를 보더니 내 손목을 꼭 잡고 내 손등에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면서 간절히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대중이를 살려줘. 대중이를 살려줘."

그 말을 들으면서 나도 울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를 구할 방법이 보이지 않으니 가슴만 아플 뿐이었다. 그런데 얼마 후였다.케네스 포게슨이 갑자기 내게 만나자는 연락을 해서 만났더니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이제 김대중의 사형은 확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요. 하지만 어떻게든 그런 일은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미국도 애를 쓰고는 있습니다만 전대통령은 외국사람들 의견이나 외국압력 같은 데는 거부감이 강하니까 역시 내부에서 나서주어야 할 것 같습니다. 당신이 한번 나서주시오."

"나도 김대중을 살리기 위해 애가 타는 사람입니다만 내가 무슨 힘이 있어 그를 살리겠습니까?"

"청와대의 허화평씨에게 들으니 당신이 국정자문위원 자리를 거절해서 전대통령이 당신에 대해 섭섭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러니 그 자리를 수락하면서 조건부로 개인면담을 신청하고 전대통령을 설득해보면 어떻겠소?"

나는 포게슨을 만난 후 그가 한 말을 곰곰이 되씹어보면서 크나큰 고민에 빠졌다. 물론 처음에는 그의 제의를 듣고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일축해버렸다. 무엇보다 광주를 직접 방문하고 제네바에서 본 취재필름을 통해 그 비극이 얼마나 끔찍한 것이었던가를 아는 내가 그런 일을 자행한 군부세력이 탈취한 정권에 협력한다는 사실 자체가 생각하기도 싫은 것이었다.

내 개인적 명예의 손익계산에서도 그것은 완전한 적자였다. 국내에서 쏟아질 비난은 물론, 전두환 정권에 대한 세계여론으로 보아 내가 국정자문위원이 된다면 WCC등 국제사회에서도 나에 대한 평가가 여지없이 실추될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한 노릇이었다.

'내 명예가 땅바닥에 떨어진다 해도 김대중을 살릴 수 있는 가능성이 만에 하나라도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시도해보고 노력해 보아야 하지 않은가. 그러나...'

나는 전두환 대통령을 직접 만나기로 하고 김옥진 국정자문회의 사무총장을 만나 내 의사를 전달했다.

"국정자문위원이 되는 것이 나로서는 여러가지 문제가 있지만 만약 두가지 전제조건이 받아들여진다면 그 제의를 수락하겠습니다. 우선 전대통령과 한시간동안 단독면담을 하고 싶고, 그리고 이 일을 신문에는 절대로 보도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가능하겠습니까?"

"지금 언론이야 우리 마음대로 하는 거니까 신문에 보도되지 않도록 하는 건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대통령 각하와 한시간 단독면담은 직접 여쭤봐야 하니까 좋다고 하시면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바로 연락이 왔다.

"각하께서 두가지 다 좋다고 하십니다. 곧 청와대로 오셔야 할 겁니다."

이같은 우여곡절을 거쳐 나는 1980년 11월25일 오전, 청와대에 들어가 전대통령으로부터 국정자문위원 위촉장을 받았다. 공식적인 절차가 끝난 후 전대통령은 약속대로 "들어가서 차나 한잔하자"며 나를 자기방으로 안내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김대중 얘기를 꺼냈다. 그의 얼굴은 김대중이란 이름을 듣는 순간 이미 굳어져 있었다.

"저는 김대중은 물론 그의 부인과도 수십년동안 알고 지내왔습니다. 그런 제가 이 자리에서 확실히 말씀드리는데, 그는 정치가로서 결점도 있지만 절대로 공산주의자는 아닙니다."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전대통령은 화를 벌컥내며 말했다.

"내가 언제 김대중을 공산주의자라고 했습니까? 하지만 그 사람은 용공주의자이고 선동정치가예요."

"저 역시 선동정치가를 싫어합니다. 용공주의자도 싫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군 형법 어디에 선동주의자나 용공주의자는 사형시켜야 한다는 조문이 있습니까? 국제적 차원에서나 현정부를 위해서도 그를 죽이는 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미 우리나라는 광주사태로 전세계에서 비난을 받고 있는데, 이제 김대중까지 죽인다면 그 들끓는 여론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러십니까? 새 정부의 첫 출발을 사형으로 시작하면 되겠습니까?"

나는 명분과 실리를 다 동원하여 전대통령을 설득했다. 그래서 그랬는지 한참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그의 얼굴이 처음보다는 많이 풀어져 있었다. 내 얘기를 다 듣고 난 그는 마침내 이렇게 말했다.

"목사님이 말씀하신 취지는 잘 알겠습니다. 목사님 말씀을 고려해서 내가 잘 알아서 할 테니 너무 걱정은 마십시오. 이제 그 얘기는 그만하고 화제를 딴 데로 돌리지요."

걱정하지 말라는 그의 말과 분위기로 보아 나는 '성공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무거운 짐을 덜어놓은 것처럼 내 어깨도 가벼워졌다.

청와대를 나온 나는 정박사를 찾아가 전대통령을 만난 얘기를 하고 그를 안심시켰다.

"이제 걱정하지 마십시오. 김대중이 사형은 면할 것 같습니다."

내 말에 그 마른 나뭇가지 같은 노인은 너무 흥분해서 엉엉 울기까지 했다. 그는 부인인 이태영 여사를 불러 "대중이가 살 수 있데"라고 말하며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내가 김대중 구명에 실제로 얼마만큼 영향을 끼쳤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전대통령은 1981년 1월23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된 김대중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하는 조치를 취했다. 나는 그 소식을 듣고 조봉암의 사형에 이어 우리 정치사에 큰 오점으로 남을 뻔했던 비극적인 일이 미연에 방지됐다는 생각에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었다.(4권 <미완성의 민주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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