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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시장의 어벤저스 'ESG', 한국서도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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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시장의 어벤저스 'ESG', 한국서도 가능할까

[삶은경제] 자본시장 트렌드는 착한 투자...한국은?

자본시장, 그 중에서도 주식시장은 투자자들에게 약육강식의 정글에 진배없다. 누구나 장밋빛 수익을 꿈꾸며 자본시장을 두드리지만, 현실에서 마주하는 풍경은 살벌하다.

수많은 개인투자자들이 손절을 반복하며 깡통, 혹은 빚더미 계좌로 밀려나는 사이 거대 자본으로 무장한 외국인과 기관투자자들은 개인투자자들이 넘보기 힘든 정보력과 공매도, 인공지능 등의 무공을 뽐내며 정글의 맹주로 군림한다. 기업이라고 다르지 않다. 상장회사가 된다는 것은 자금 조달에 숨통을 틔울 절호의 기회다. 하지만, 작은 회사들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시장의 악성 루머에 돈줄이 막히거나 인수합병의 파도에 휩쓸리는 것 또한 순식간이다.

이렇게 상대적으로 약한 자본력을 가진 시장의 플레이어들은 늘 바람 앞의 촛불이요, 고양이 앞 쥐와 다를 바 없는 심정으로 생존을 위해 오늘을 살아야 한다. 힘이 없으면 강자의 먹잇감이 돼야하는 약육강식의 정글에서 환경이니, 인권이니, 공정이니 하는 가치는 먼 세상 얘기처럼 들리는 것은 당연한 일. 이런 맹목적 시장에서 공익을 위한 가치가 존중받으려면 마블 스튜디오가 어벤저스라도 보내줘야 하지 않을까?

맹목적 자본시장, 강호의 도리는 가능할까?

말이 나온 김에, 아이언맨처럼 정의롭고 힘 센 자본이 주식시장에 등장하는 상상을 해본다. 일단 그런 자본은 인류 최대의 위기라는 지구온난화 주범 기업들, 그리고 반 환경 기업들과 맞서지 싶다.

지구온난화로 인류 멸종을 걱정 할 판이지만 주식시장에서 그런 기업들이 퇴출됐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있는가? 가습기살균제 피해로 돌아가신 분이 이미 1403명인데도 관련 기업들은 여전히 자본시장에서 성업 중이다. 개인과 기관 투자자들이 그런 기업들의 주식을 열심히 사고 팔며 기업은 그런 자본시장을 바탕으로 자금을 조달한다. 이런 생태계 한복판에 산림을 보호하고 탈 석탄 사회를 선도하는 기업에 돈줄을 대고, 환경 재앙을 일으킨 악당의 돈줄은 끊어 숨통을 조이는 강력한 자본이 등장한다면? 상상만으로도 흥분되는 일이다.

악당 자본이 활개치는 대한민국 자본시장

환경만큼 히어로가 절실한 가치가 있다면 바로 인권과 노동이다. 노조 탄압은 기본이고, 직장갑질 일삼으며, 여성노동자 차별하고, 흑자 구조조정을 아무렇지 않게 해대는 대기업들이 주식시장에서 승승장구하며 투자자들을 몰고 다니는 작태는 이제 너무 자주 봐서 신물이 날 지경이다.

이런 기업들에 투자됐던 돈줄을 막고, 노동3권을 존중하는 기업, 정당하게 축척한 이윤을 사회에 환원하고 승자독식 대신 공정경쟁을 원칙으로 삼은 기업들에 투자의 물꼬를 여는 세력이 있다면, 그런 자본은 아이언맨으로 불려도 충분하다. 혹자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자동으로 조절하는 자본시장에 아이언맨 같은 자본을 상상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타노스의 세계관에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면, 악과 맞서 싸울 어벤저스가 필요하다.

당신이 몰랐던 글로벌 자본시장의 어벤저스

지금까지 해본 상상은 그저 허황된 망상이 아니다. 최근 10년 사이 유럽연합(EU), 미국, 일본,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 수많은 나라들이 자국 자본시장에 맹목적 수익추구 대신 명백한 공익적 기준에 입각해 투자하는 자금 운영 비중을 급격히 키워가고 있다(표1).

▲표1. 주요국의 SRI 비율. ⓒ백정현

약육강식의 자본시장에서 이렇게 히어로 역할을 자임한 자금은 자본가들이 아니라, 바로 국민이 만든 돈, 연금기금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교훈 이후 각국 정부는 국가를 대표하는 기금들이 환경, 인권과 노동, 공정경쟁 등 핵심 공익을 외면하는 기업을 투자 대상에서 배제하는 이른바 책임투자 원칙을 적용하기 시작했다. 연금기금의 투자를 결정할 때 재무적 분석에서 나가 환경권, 사회권, 거버넌스 등 공익을 위반하지 않는 기업에 한정한다는 비재무적 특성까지 반영한 이 정책은 에코에서 E, 소사이어티에서 S, 거버넌스에서 G를 따서 ESG공시제도, 혹은 SI(Sustainable Investment, 지속가능투자), SRI(Social Responsible Investment, 사회책임투자) 등으로 불리며 이미 국제적 연성규범으로 안착했다.

일본 GPIF, 2년 새 관련 투자 6천% 이상 확대

연기금의 사회책임투자에서 가장 돋보이는 국가는 이웃나라 일본.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일본의 공적연기금 GPIF은 2014년과 2016년 사이 ESG를 반영한 기금의 사회책임 투자 규모를 (놀라지 마시라!) 기존보다 무려 6692% 키웠다(표2). 이 투자가 일본 자본시장의 분위기를 얼마나 바꾸었을지 상상조차 하기 힘든 막대한 규모다.

▲ 표2. 일본의 SRI 증가율은 무려 6692%에 달한다. ⓒ백정현

일본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를 자랑하는 노르웨이 국부펀드(GPFG)는 어떤가. 노르웨이 재무부가 설정한 국부펀드 운영 지침인 '투자 배제와 감시를 위한 가이드라인'은 펀드의 투자 대상 기업이 담배, 특수한 형태의 무기 생산, 석탄화력발전 등의 제품에 관련될 경우 투자 배제를 권고하고, 인권 침해와 환경 피해, 부정부패, 기후변화, 윤리적 규범 침해 등 활동에 연루될 경우도 투자 배제 이슈로 다룬다. 연금투자가 자본시장에서 공익의 실질적 가이드 역할을 시작 한 것이다.

새롭고, 정의로우며, 시장질서에 충실하기까지 한 경험

노르웨이 국부펀드와 함께 세계적 규모를 자랑하는 캐나다 온타리오 교원 연금의 경우 사회책임투자를 위한 기업 대상 모니터링에서 한 발 더 깊이 들어간다. 이들은 아예 해당 기업에 함께 투자하는 다른 투자자가 온타리오 교원 연금이 추구하는 환경, 인권 및 노동, 공정경쟁 등의 관점에 동의하는 투자자인지 여부까지 검토한다! 투자를 결정한 기업의 다른 투자자가 잘못된 관점으로 투자 기업을 혼란에 빠트릴 가능성까지 고려한 것이다.

막대한 자본력을 확보한 연기금들이 이렇게 공익이라는 관점을 우선해 투자 기업을 결정하게 되면 자본시장은 어떻게 반응할까? 우선 기업들은 자신들이 환경파괴, 인권침해, 공정경쟁을 저해하는 활동과 무관함을 공시해야 자본시장 최대 기관투자자의 투자를 받을 수 있으니, 잘못된 사업계획은 폐기하게 된다. 만약 어떤 기업이 이런 위험을 무시하는 경우 기관투자는 물론이고 기관투자자의 동향에 민감한 개인투자자의 외면까지 받게 돼 최악의 경우 자본시장에서 퇴출될 수 있다. 이것은 맹목적 수익에 목을 매던 자본시장에 환경과 인권, 공정경쟁의 가치가 수익률과 연결되는 경험을 부여한다. 새롭고 정의로운 질서가, 시장원리에 충실한 방식으로 세워지는 것이다.

과연 문재인 정부는 정의를 바라는가?

정부가 연기금에 공익 수호의 사명을 부여하고, 이를 통해 자본시장에서 공익의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지는 놀라운 기적은 우리가 잠든 사이 세계 각국에서 벌어지고 있다. 그런데, 기가 찬 것은 기금규모 667조4000억 원의, 노르웨이 국부펀드에 이어 무려 세계 3대 기금의 몸집을 자랑하는 대한민국 자본시장 갑중의 갑, 국민연금은 여전히 덩칫값을 못한 채 수익률만을 쫒는 기관투자자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지난해 7월 국민연금이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하고, 대한항공 조양호 회장의 사내이사 선임을 부결시키며 국민적 관심을 모았지만, 정작 의결권 행사에 비해 근본적이라고 할 수 있는 ESG관련 규범 수립은 문재인 정부 출범 2년이 넘도록 완전히 손을 놓고 있는 상황이다. 보건복지부가 뒤늦게 오는 6월까지 ESG관련 평가지표를 공개한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정부가 실효성 있는 규범 마련을 위해 NGO나 노동단체들과 소통한다는 얘기는 없다. 촛불정부를 자임하는 정부가 과연 곧 있을 지표 발표에서 국민연금기금의 사회책임투자를 국제규범 수준에 부합하는 수준까지 올려놓을 것인가? 출범 2년, 금융 분야에서 이전 정부와 아무런 차별성을 보여주지 못한 문재인 정부가 과연 우리 주식시장에 새 역사를 쓸 수 있는 아이언맨을 원할지를 지켜 볼 일이다.

(*본칼럼은 지난 5월8일 공적연금강화국민행동과 기업과인권네트워크,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이 국회도서관에서 주최한 공개토론회의 자료와 토론을 기초로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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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정현

풀뿌리신문 기자로 출발했지만 정의당에서 '노유진의 정치카페'를 기획하고 제작하면서 PD라는 명함을 얻었다. 짧은 국회보좌관 활동을 거친 뒤, 지금은 전국사무금융서비스노동조합에서 일한다. 잘 먹고, 잘 쉬고, 잘 자는 일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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