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인세 1%를 정치자금으로 적립하여 기탁하는 문제가 정치권의 화제로 떠올랐다. 진념 부총리가 이것을 제안한 직접적 배경은 전경련이 법에 근거하지 않은 불투명한 정치자금을 제공하지 않겠다는 결의문을 채택한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진념 부총리의 제안 요지는 이러하다. "여야가 돈 안 드는 선거구현 차원에서 정치자금을 받지 않겠다고 합의할 경우 법인세 1%에 해당하는 세금을 적립하여 선거자금으로 기탁하는 선거공영제를 추진하겠다". 영국식 선거공영제를 염두에 두었다는 이 제안은 전경련의 결의와 맞물려 정치자금으로 말미암은 비리 해소를 겨냥하는 듯하다.
정치가 경제에 걸림돌이긴 걸림돌인 모양이다. 정치인이 아닌 경제인, 경제관료가 정치자금 문제를 거론하고 나섰으니 말이다.
전경련이 이번 결의를 한 이유는 IMF 구제금융 이후 이루어진 일련의 기업 구조조정 결과 기업 생존 차원에서 투명 경영이 불가피해졌을 뿐만 아니라, 잇따른 게이트로 말미암은 경제적 악영향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절박감이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진 부총리의 제안은 결의안 제출 이후 뭔가 대안을 기대하는 경제인, 그리고 재계의 결의에 따른 정치자금 축소 조짐으로 당장 마음이 급해진 정치인을 동시에 만족시키려는 의도를 지닌다.
***'법인세 1% 정치자금화', 정치권과 기업만 찬성**
재계가 화두를 던진 이상 무언가 해답을 찾아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해답이 법인세 1% 정치자금 적립및 기탁인지는 좀더 생각해 봐야 한다. 이 제안이 하나의 아이디어인 것은 부인하기 어렵지만, 아이디어를 국가 정책으로 발전시키려면 좀더 분명한 논리, 즉 당위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실 법인세 1% 정치자금 기탁은 진 부총리가 처음 낸 아이디어가 아니다. 이미 중앙선거관리위원회와 몇몇 정치인이 제안한 바 있다. 하지만 반대가 거세 아이디어 차원에서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다가 이번에 다시 불거진 것이다.
정치자금 수요자인 정치권은 이 제도를 필요로 할지 모른다. 정치인에게 정치자금은 다다익선이다. 일단 많을수록 여러모로 유리하기 때문에 반대급부가 없는 국고 지원은 언제나 어떤 명목이건 환영이다. 이런 맥락에서 법인세 1% 지원은 반대할 이유가 없다.
진 부총리가 전제조건으로 내건, '돈 안 드는 선거 구현 차원에서 정치자금을 받지 않겠다'는 여야 합의도 마음만 먹으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법적 구속이 없는 합의라면 더욱이 못할 이유가 없다.
정치자금 공급자인 기업으로서도 이 제도는 필요할지 모른다. 직·간접적인 헌금 제의를 거절할 좋은 명분이기 때문이다. 더 이상 헌금 요청으로부터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니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의도와 달리 고비용 정치구조 온존시킬 우려**
국민으로서도 이 제도가 좋은 점이 있다. 잘만 하면 법인세 1% 이외의 정치자금을 근절하는 계기로 활용 가능하기 때문이다. 정경유착만 없어진다면 법인세 1%는 그야말로 껌 값 아닌가?
이처럼 법인세 1% 정치자금 활용 제안은 고비용 정치구조 개선을 촉진하는 한 대안일 수 있다. 그러나 반면에 고비용 정치구조를 온존시키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의도와 다른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이미 경제개혁의 결과로서 기업 환경 변화는 더 이상 과도한 음성적 정치자금 지원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이러한 추세대로라면 정치권은 오래 가지 않아 스스로 정치자금 축소에 나서야 할 상황이다.
양대 선거를 앞두고 예전 같았으면 엄청난 정치자금 조성이 벌써 이루어졌겠지만 이것도 쉽지 않을 전망이다. 경제개혁이 이미 정치개혁에 영향을 미치는 형국이다. 이런 상황에서 법인세 1%를 나눠주면 정치권은 저비용 정치구조 구축 노력을 게을리 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
***정치자금 투명화를 위한 제도개선 우선돼야**
국민의 정치권에 대한 인식은 현재 최악이다. 여야가 최근 선거공영제 확대를 추진하고 있지만 이것이 쉽지 않은 이면에는 국민과 시민사회단체의 차가운 시선이 작용하고 있다.
국민과 시민사회단체는 지난번 선거법 개정시에 이미 선거공영제, 이 가운데에서도 특히 비용 공영제를 상당히 도입했다고 생각한다. 국가 경제 사정을 고려할 때 선거 비용을 이미 충분하게 국고에서 부담하고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 때문에 국민이나 시민사회단체는 최근 음성적인 정치자금 조성과 사용을 차단하는 데 더 많은 관심을 보인다. 국가에서 부담하는 비용 이외에 개인이 부담하는 선거 비용의 수입과 지출을 규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정당 국고 보조금에 대한 생각도 같다. 이미 적지 않은 액수를 세금으로 지원하고 있는데, 그 지출이 투명하지 않은 점에 불만이 많다. 국고 보조금을 불투명하게 운영하는 상황에서 국고 지원을 더 늘리려 하는 시도는 현재의 분위기에서 쉽게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국민과 시민사회단체는 법인세 1% 국고 지원에 앞서 정치자금 투명화에 필요한 제도 개선을 먼저 요구할 것이다.
***외국사례도 전무한 정치권-재계의 미봉책**
이번 제안은 다른 선진 민주국가에서 선례를 찾기 어렵다는 점에서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물론 선진 민주국가에서도 선거공영제에 근거하여 국고 지원을 하는 경우가 있지만 특정 세금 곧 법인세의 일정 비율을 잘라 내어 활용하는 방식을 택한 경우는 없다.
미국의 경우 세금 납부 시 개인이 세액 가운데 3달러를 정치자금으로 헌금하겠다고 지정하는 방법이 있긴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자발적인 것이다.
법인세 1% 적립은 이와 달리 강제징수 방식이나 다름없어서 납세자인 법인 일부의 반발을 초래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법인이 아닌 기업에 대한 형평성 문제나 법인 관련자의 정치 활동 자유를 제한하는 부작용도 무시할 수 없다.
지금 국민이나 시민사회단체는 저비용 정치구조, 저비용 선거운동 정착을 원한다. 정치권이 '판돈 늘리기' 보다는 현재의 비용구조에서 선거비용과 정치비용을 더 줄여나가는 방법을 찾아주길 희망하는 것이다.
법인세 1%도 이런 의도에서 제안한 것이겠지만, 이것은 정치비용을 줄이려는 근본적인 해결책이기보다는 눈앞의 곤란함을 넘겨보려는 재계와 정계의 단기 해법일 수 있다.
근본적인 해결책에 대한 해답은 그 동안의 정치개혁 논의 과정에서 어느 정도 의제로 정해졌다. 선거공영제, 그 가운데에서도 관리 공영제를 강화하여 모든 선거관련 비용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것이 가장 급선무이다. 국고 보조금도 정당에 대한 것이 아닌 선거비용에 대한 것으로 전환해야 한다.
비용 공영제 차원의 국고 보조금 증액은 그 다음 단계에서나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선거비용에 대한 국고 보조금을 증액할 경우에도 법인세 1%가 아닌 전체 세금에서 지원하는 기존 방식을 택하는 것이 오히려 더 무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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