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첫 도입 이후 국민연금은 적용 대상을 꾸준히 확대해왔다. 상시근로자 10인 이상 사업장에서 시작해 단계적 확대를 거쳤고 2003년 1인 이상 사업장 가입을 의무화하면서 비로소 전국민 연금제도로 거듭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각지대는 공공연히 존재한다. 모두가 알지만 외면하고 있다할 만큼, 주로 비정규직, 특수고용직 노동자, 영세자영자, 청년, 그리고 여성이 그 사각지대에서 고통받고 있다.
2015년 12월말 기준 18~34세 총인구 중 국민연금 보험료를 내는 사람은 38.8%이며, 2016년 한국의 20대 인구 대비 국민연금 등 공적연금 가입률은 35.1%에 불과하다. 2016년 8월 비정규직의 국민연금 사업장가입자 비율은 31.7%로 정규직의 96.4%와 매우 대비된다. 지역가입자 14.4%(비정규직은 지역가입자로도 가입이 가능하다)를 합산하여도 비정규직 중 국민연금 가입 비율은 10명 중 5명꼴(53.9%)에 불과하다.
한국의 불안정 노동시장과 사각지대
이들이 연금 사각지대에 집중되는 이유는 우리나라 노동시장 구조와 국민연금 제도적 측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국의 노동시장은 제조업에서 서비스업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되었고 특히 1990년대 탈산업화와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유연성이 급격히 증가하였다. 서비스업 중심의 경제 구조 변화는 고학력, 고숙련 노동자가 양질의 일자리에 집중되는 한편 저학력, 저숙련 노동자는 노동집약적 일자리에 묶이는 노동시장의 양극화를 가져왔다. 최근에는 디지털 플랫폼을 기반으로 하는 플랫폼 노동도 등장하며 불안정, 노동집약의 고용양태는 실로 다양해지고 있다.
연금제도는 복지국가를 이루는 핵심적인 사회정책으로 산업사회의 정규직 임금노동자를 대상으로 설계되었다. 노동시장의 구조적 변화로 증가한 비정규직, 특수고용노동자, 플랫폼 노동자 등, 이른바 표준고용관계에서 벗어난 비전형 노동자들은 필연적으로 연금 사각지대에 내몰릴 수밖에 없는 셈이다. 탈산업사회 노동시장에서 고용의 불안정성은 낮은 임금과 각종 사회적 보호로부터의 배제로 이어진다. 따라서 연금제도가 전통적 사회보험제도의 틀을 유지한 채 노동시장의 변화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면, 불안정 노동이 곧 노후 빈곤으로 이어질 뿐만 아니라 분절적 노동시장 구조와 맞물려 노후소득보장의 양극화를 유발할 수 있다.
국민연금의 제도적 특성과 사각지대
국민연금 자체의 제도적 특성에서도 사각지대가 생기는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우선 국민연금은 사업장 가입자를 제한한다. 일용근로자 또는 1개월 미만의 기한을 정하여 사용되는 근로자, 1개월 동안의 근로시간이 60시간(주당 평균 15시간) 미만인 단시간근로자 등은 사업장 가입자에서 배제된다. 택배 기사, 학습지 교사, 보험설계사, 대리운전기사 등을 일컫는 특수형태근로종사자(특수고용노동자)들도 사업장 가입자에서 배제된다.
가짜자영자, 독립자영자라고도 불리는 이들은 근로계약을 체결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위해 노무를 제공하는 노동자를 말한다. 근로계약을 체결하지 않기 때문에 근로기준법상 노동자성을 인정받지 못하며 따라서 형식상 임금노동자에 해당하지 않아 각종 사회보험의 의무가입 적용대상에서 제외되고 있다. 국민연금은 사업장 가입자가 아닌 경우 지역가입자로 가입이 가능하다. 하지만 사업장 가입자의 경우 가입자 보험료 절반을 사업장에서 부담하는 반면 지역가입자는 보험료 전액을 본인이 부담해야 하기에 저소득 가입자들이 자발적으로 사각지대를 선택하는 경우도 일어나고 있다.
현행 사각지대 지원 대책: 크레딧제도와 두루누리 제도
국민연금도 사각지대를 완화하려는 제도를 두고 있긴 하다. 연금크레딧 제도와 두루누리 제도가 그것이다. 연금크레딧 제도는 부득이한 사유로 보험료 납부를 하지 못하는 기간에 대하여 국가가 연금 가입기간을 추가로 인정해주는 제도이다. 출산, 군복무, 실업에 대한 크레딧이 운영되고 있으며 이 중 출산크레딧은 여성의 수급권에, 실업크레딧은 불안정 노동자의 수급권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출산크레딧은 두 자녀 이상 출산 시 추가 12개월(세 자녀 30개월, 네 자녀 48개월, 다섯 자녀 이상 50개월)의 가입기간을 인정하며 해당기간의 소득은 국민연금 A값(전체 가입자의 평균 소득)의 전액을 인정한다. 이는 자녀 당 4년의 가입기간을 추가로 인정하는 스웨덴이나 3년 독일, 2년 프랑스 등에 비해 인색하다.
실업크레딧은 2016년 8월부터 시행됐다. 구직급여 수급자가 연금 보험료의 25%를 본인이 부담하는 경우 국가가 75%의 보험료를 지원하며 최대 12개월까지 가입기간으로 추가 인정한다. 이때 연금 보험료 부과 소득은 실업 전 평균소득의 50%로 제한되는데 그 상한이 70만 원으로, 최대 70만 원의 9%(국민연금 보험료율)인 6만3000원에 대하여 가입자가 1만5750원을 납부하면 국가가 4만7250원을 지원한다. 하지만 주요국가에 비해 도입이 늦은데다, 다른 나라의 실업크레딧이 주로 국고나 연기금에서 전액 지원이 되고 있는 반면 한국에선 본인 부담분을 전제하고 있어 대조된다. 크레딧 인정 기간 역시 생애 12개월로 제한해 실업급여를 신청한 기간(영국), 혹은 실업급여 수급이 만료되었지만 취업하지 못한 기간(독일)에 대하여 추가적으로 크레딧을 인정하는 경우들과 차이를 보인다.
두루누리 제도는 국가에서 소규모 사업장에 종사하는 저소득 근로자의 사회보험료를 지원한다. 2019년 기준 사용자를 제외한 근로자 10명 미만 사업장에 근무하는 월소득 210만 원 미만의 근로자가 대상이다. 신규가입 근로자를 기준으로 사용자 및 근로자 보험료의 90%(5명 미만 사업장. 5명 이상 10명 미만 사업장은 80%)를 지원하고 있다. 예를 들어, 근로자 수 5명 미만 사업장에 고용된 월평균 100만 원의 임금을 받는 근로자에 대하여 사업주와 근로자 각각 월 4만500원(100만 원×4.5%×90%)을 지원받는다. 두루누리 제도는 저소득 근로자뿐만 아니라 총 노동비용의 증가를 꺼리는 사업주의 사회보험 가입 회피도 방지할 수 있는 제도이다. 임시일용직 근로자는 고용주로부터 조금이라도 더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있다면 사회보험 가입 대신 임금 쪽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두루누리 제도가 보탬이 될 수 있다.
사각지대 해소를 위한 연금 개혁 방안
국민연금 자체의 보완제도를 주요 국가들의 것과 간단히 비교하기도 했지만, 사각지대를 해소하는 데 있어선 두루 한계가 있다. 근본적으로 한국의 연금제도는 변화하는 노동시장과의 정합성을 높일 수 있도록 전반적인 현대화(modernisation) 과정이 필요하다. 특히 연금크레딧 제도, 두루누리 제도는 불안정 노동자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제도로 사각지대 해소를 위한 변화가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출산크레딧 제도는 더 많은 유자녀 여성이 혜택을 볼 수 있도록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 출산크레딧 제도의 일차적인 목표는 출산율 제고가 아닌, 출산과 경력단절로 인해 추락할 수 있는 여성의 노후소득보장 수준을 보완하는 것이다. 따라서 한 명의 자녀를 둔 여성도 혜택을 볼 수 있도록 조건을 완화해야 하며 추가 가입기간 역시 현행 12개월보다 길어져야 한다.
실업크레딧은 기준소득액을 높이고 국가가 보험료를 전적으로 부담하는 방향으로 제도 개선이 이뤄져야 한다. 현행 실업크레딧은 추가 가입기간에 대하여 개인 평균소득의 50%, 최대 70만 원의 소득을 인정하고 있는데, 이렇게 낮은 소득을 인정하는 연금크레딧은 연금 가입 기간을 늘려 연금의 수급권 획득에는 도움이 되나 연금 급여 수준은 낮출 수도 있다. 기준소득액을 높이는 경우 보험료도 상승하게 되므로 국가의 보험료 부담 비율을 현행보다 높이는 개선 방안이 반드시 함께 모색되어야 한다. 또한 생애 12개월로 제한된 추가 가입기간 역시 불안정 노동자의 끊임없는 고용 불안정성을 고려하여 유연하게 적용할 대폭 확대할 필요가 있다.
두루누리 제도는 지역가입자인 영세자영자까지 확대 적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내용은 지난해 8월 발표된 국민연금 제도발전위원회의 제도발전방안에 포함된 바 있는데, 영세자영자는 비정규직 노동자와 열악한 처지는 다를 바 없지만 국민연금 보험료는(소득의 9%) 전액 본인이 부담해야 해 납부회피, 보험료 미납을 초래하고, 결국 사각지대로 내몰린다.
마지막으로 특고 노동자의 사업장가입자로의 지위 전환이 필요하다. 근로계약을 체결하지 않아 임금노동자로 분류되지 않는 특고 노동자는 현행 국민연금 제도에서 사업장가입자가 될 수 없다. 2016년 8월 통계에 의하면 비정규직 중 특고 노동자의 사업장가입 비율은 2.3%에 그치고 있는 반면 지역가입자로 가입하는 비율은 43.5%에 이른다. 결국 특고 노동자는 사업장가입자 지위를 얻지 못하여 보험료를 전액 본인이 부담하게 될 뿐만 아니라 두루누리 제도의 적용도 받지 못한다.
특고 노동자의 사용자 종속성은 이미 밝혀진 바 있고 그 성과 중 하나로 지난해 8월 특고 노동자의 고용보험 가입 및 실업급여 수급을 가능케 하는 고용보험 적용 방안이 고용보험위원회에서 의결되었다. 이에 맞춰 국민연금 역시 특고 노동자를 사업장가입자로 시급히 전환할 필요가 있다. 지난해 12월 국회에 제출된 국민연금종합운영계획안에서도 특고 노동자의 사업장 가입 전환 방안을 검토하겠다는 내용이 포함된 상태이다.
현재 사각지대 해소 비용은 미래세대 연금 부담 경감
연금개혁 논의에서 빈번하게 제기되는 주장은, 노동시장 구조가 개선되면 노후소득보장의 문제도 자연스레 해결된다는 것이다. 노동시장 구조 개선이 우선적인 해결책이라는 주장에서 국민연금의 책임과 제도 개혁의 필요성을 회피하고자 하는 의도가 엿보인다. 노후소득보장의 강화를 위해 노동시장의 구조 개선이 함께 이루어져야 함은 당연하지만, 연금제도 역시 변화하는 노동시장에 발맞춘 제도적 개선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노동시장과 연금제도 간 부정합의 산물인 사각지대를 완화할 수 있으며 현재의 사각지대를 해소하는 비용은 추후 미래 세대의 연금 부담을 낮추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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