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한국, 일본, 중국 등 아시아 3국 순방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일본에서 18일, 한국에서는 20일, 중국에서는 22일 각각 양국정상회담을 가질 예정이다.
이번 방문은 지난해 10월 중국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정상회의(APEC) 참석을 제외하면 부시 취임후 첫 아시아 방문이다. 당시 APEC 참석이 9.11테러 직후 동맹국 지지를 얻기 위해 분초를 쪼개 어렵게 이뤄진 방문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이번이 사실상의 첫 아시아 방문인 셈이다.
***부시외교는 '선 무당이 사람잡는 꼴'**
지난해 2월 대통령에 취임하기 전, 외국에 나간 경험이 멕시코 등 한두 곳밖에 없을 정도로 부시대통령의 '해외여행 기피증'은 유별나다.
그의 아버지 부시 전 대통령이 재임기간은 말할 것도 없고 최근까지도 칼라일그룹 고문자격으로 일년에 두세 차례나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를 수시로 들락거리는 것과 크게 대조되는 대목이다.
이런 이유에서 부시 취임 당시부터 유럽 외교가 및 언론계에서는 "외교 경험은커녕 외국방문 경험조차 전무하다시피 한 부시에게 과연 세계 최강국의 다사다난한 외교를 펼칠 능력이 있을지 의심스럽다"는 불안감어린 의혹이 제기됐다. 실제로 취임직후 유럽을 찾은 부시는 환경, 에너지, 미사일 협상 등에서 독선적 미국패권주의 노선을 고집, 유럽으로부터 '아마추어적 독주'라는 비판을 받았다.
요컨대'선 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식의 냉소였다.
더욱이 유럽방문 당시 부시는 대단히 이례적으로 미 국무부 과장급들까지 대동해 국무부내로부터 "외교 아마추어를 대통령으로 뽑아놓으니 우리들만 죽어날 판"이라는 불만의 소리가 터져나오기도 했다.
***아시아로 번진 부시의 아마추어 패권주의**
부시의 아마추어적 패권주의는 최근 그의 '악의 축' 발언을 계기로 아시아로까지 확대됐다. 부시가 지난달 12일 아시아 3개국 순방 계획을 발표했을 때만 해도 분위기는 이렇지 않았다. 한ㆍ중ㆍ일 3국의 반응은 환영 분위기가 주류였다.
그러던 것이 보름여 뒤인 지난달 29일 국정연설에서 북한에 대한 무력 사용 가능성을 시사한 문제의 '악의 축' 발언이 나오면서 분위기는 삽시간에 싸늘해졌다. '마침내 부시가 사고를 쳤다'는 식의 반응이었다.
미국 브루킹스 연구소의 정치분석가 제임스 린제이는 최근 홍콩 시사주간지 파이스턴이코노믹리뷰(FEER)와의 인터뷰에서 "부시는 도쿄, 서울, 베이징 각 도시에서 자신의 테러와의 전쟁에 대한 연대전선을 구축하길 희망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과연 일본, 한국, 중국은 부시 희망대로 움직일까.
***일본, "악의 축 발언은 부시의 생각일뿐"**
우선 일본의 반응부터 살펴보자.
일본은 9.11테러후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공격때에는 '기회가 찬스'라는 식으로 미국을 적극지지했다. 자위대를 파병하는가 하면 전쟁비용도 상당부분 부담했다. 이를 통해 군사대국화의 걸림돌을 상당부분 제거했다는 게 일본정부의 자평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일본정부는 이례적으로 신중한 침묵으로 일관했다. 침묵하던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총리가 13일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는 이날 중의원 예결위원회에서 부시가 북한을 '악의 축'이라고 비판한 대목과 관련, "부시대통령의 생각일 뿐이다. 북한 등과 대화의 장을 닫지 않겠다"고 말했다. 일본 정부 최초의 공식반응이었다.
고이즈미 총리의 이같은 발언 배경을 놓고 해석이 구구하다. 일본은 지난 98년 북한이 대포동 미사일을 발사하자 안색이 하얗게 질렸던 나라다. 일본열도 전역이 북한 미사일의 사정권 안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이런 안보적 맥락에서 본다면 일본은 부시의 강경노선에 동조해야 할 입장이다.
그러나 지금 미국과 일본은 '경제적으로' 긴장상태에 있다. 미국은 지금 일본에 대해 강도 높은 금융 구조조정과 디플레이션 완화대책을 요구하고 있다. 수십조엔 규모의 공적자금을 추가조성해 금융부실을 말끔히 털어내고 과감한 경기부양책을 취하라는 주문이다. 고이즈미 총리는 그러나 지금 일본 관료, 금융권, 재계의 조직적 저항에 부딪쳐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는 난감한 처지다.
부시는 일본방문 기간중 80년대 레이건 당시 대통령에 이어 미국대통령으로서는 20년만에 일본 국회에서 연설을 할 예정이다.
이날 국회연설의 강도를 놓고 현재 미ㆍ일 양국은 발언수위를 조절하기 위한 물밑협상을 진행중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본측은 가능한 한 공적자금 추가조성 등 구체적 경제개혁 압박을 가하지 말 것을 주문하고 있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고이즈미 총리의 이례적인 '악의 축' 반대발언이 미국과의 물밑 협상카드가 아니냐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배경이 어떤 것이든, 부시는 일본방문에서 그다지 얻을 게 많지 않을 것이라는 게 지배적 관측이다.
***역대 미 대통령중 가장 인기없는 방한될듯**
한국방문은 더욱 간단치 않을 전망이다.
한반도에서 전쟁까지 불사하겠다는 식의 부시 발언은 진보ㆍ보수 진영 차원을 넘어서 한국민 대다수를 분노케 했다. 전쟁체험세대로 반공의식이 남다른 실향민 노인들조차 "부시가 그런 막말을 하니 남북 이산가족이 만날 수 있겠느냐"며 부시를 공개성토할 정도다.
'악의 축' 발언 직전에 미국을 방문해 미 고위층들로부터 이례적으로 '차기 대통령' 접대를 받았던 한나라당의 이회창 총재조차 시간이 흐를수록 부시 발언과 일정 거리를 두려 하고, 그동안 햇볕정책을 맹성토했던 한나라당 의원들조차 여당과 함께 한반도 평화를 위한 공동선언문을 채택하려 할 정도로 요즘 돌아가는 민심의 기류는 간단치 않다.
또한 6백여개 시민단체가 16일부터 20일까지 잇따른 대규모 연대집회를 계획하고 있기도 하다.
하버드 주한 미국대사가 연일 햇볕정책을 지지하는 발언을 하며 반(反)부시 분위기를 중화시키려 애쓰고, 파월 미 국무장관 역시 북한은 공격대상이 아니다라는 발언을 하는 것도 이같은 흉흉한 민심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매코맥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대변인은 급기야 14일 부시가 방한시 김대중대통령의 햇볕정책을 지지할 것이라는 입장을 밝히기에 이르렀다.
일각에서는 이같은 부시정부의 최근 태도변화를 볼 때 부시는 이번 방한기간 동안 최대한 대북관련 발언을 자제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부시는 그 대신 현재 미 방위산업체인 보잉사가 생존차원에서 판매를 희망해온 F-15K를 한국의 차세대전투기로 강매하는 선에서 '방한 전리품'을 얻고자 시도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실제로 한국 정부는 이달초 가격입찰에서 결렬될 경우 차기정권으로 차세대전투기 선정을 미루려던 방침을 바꿔 오는 4월 재입찰하겠다는 자세를 보이고 있어 이같은 관측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한미 양국정상간에 어떤 뒷거래가 이뤄지든, 부시는 한국을 찾았던 역대 미국대통령 가운데 가장 인기없이 한국을 찾는 대통령으로 기록될 게 확실시되고 있다.
***중국, 전용기 도청사건 등 압박카드로 사용할 수도**
중국방문도 평화적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기를 기대하기란 쉽지 않을 전망이다.
부시가 베이징에 도착하는 오는 21일은 공교롭게도 지난 72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베이징을 방문했던 30주년이 되는 역사적 날이기도 하다.
중국정부는 당초 부시를 환대할 예정이었다. 중국이 지속적 경제성장을 하기 위해선 세계최대시장인 미국과의 관계개선 및 동아시아지역의 평화분위기 정착이 필수적이라는 판단에서다. 미국도 올해말 장쩌민 주석을 미국에 초청하기로 하는 등 처음 물밑 협상 분위기는 대단히 좋았다.
그러나 부시의 '악의 축' 발언이후 상황이 달라졌다. 동아시아의 평화가 위협받기 시작했다는 판단에서다. 또한 부시 발언 이면에는 중국의 경제적ㆍ군사적 급팽창을 차단하려는 의도도 숨겨져 있는 게 아니냐는 의혹어린 시선을 던지고 있기도 하다.
때문에 중국정부는 필요하다면 지난해 8월 미국이 중국 장쩌민 주석에게 판매했던 전용기내 도청기 설치 사건 등 그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압박카드까지 동원해 미국의 호전적 대북 정책을 차단하려 들 것이라는 게 외교가의 지배적 관측이다.
그럼에도 중국의 대응이 반미로까지 발전하지는 않을 전망이다. 그보다는 미국의 호전적 정책을 차단시키는 동시에, 북한에 대해서도 대화창구로 나오도록 압박을 가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최근 중국이 지난해 11월 중국영해인 동중국해에서 발생한 북한소속 추정 괴선박 침몰사건과 관련, 일본의 선체 인양을 묵인하겠다는 메시지를 흘리고 있는 것도 북한을 대화창구로 끌어내기 위한 압박공세중 하나로 해석되고 있다.
한마디로 중국의 입장은 미국이든, 북한이든 동북아 긴장을 고조시키는 세력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내년 이후가 문제**
이처럼 부시의 이번 한ㆍ중ㆍ일 3국 방문은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은 방문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해서 부시가 이번 방문의 좌절을 계기로 공격적 대북 정책을 수정할 가능성은 많지 않아 보인다. 단지 시기를 연장하려다는 생각을 할 가능성이 높다. 이미 미국은 '악의 축' 3개국 가운데 이라크에 대한 전면적 공격준비에 착수한 상태로, 북한 등을 동시에 적으로 돌릴 여력은 없다.
문제는 내년 이후다. 만약 미국이 아프간전 승리에 이어 후세인 이라크정권을 붕괴시키는 전쟁까지 성공한다면, 그 다음 과녁은 북한이 될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 없는 삼엄한 상황이다. 게다가 내년에 만약 한국에서 정권교체가 이뤄져 햇볕정책이 소멸된다면 상황은 한층 험악해질 가능성이 크다.
북한의 보다 현실적이면서도 적극적 평화구축 노력이 요구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악의 축' 발언에 더이상 빌미를 제공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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