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은 왜 침묵하는가.’
미국이 제작해 판매한 중국 장쩌민 국가주석의 보잉 767 전용기에서 인공위성에 의해 작동되는 27개의 소형 도청장치가 중국정부에게 발견된 사실이 지난주말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에 의해 특종 보도됐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정부가 이례적으로 ‘침묵’으로 일관, 국제외교가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더욱이 의문스런 대목은 중국정부가 도청장치 설치 사실을 지난해 10월말 발견하고도 왜 석달간 침묵하다가 조지 W.부시 대통령의 방중(訪中)을 한달 앞둔 미묘한 현시점에 와서야 이를 서방언론에 흘렸는가이다.
한 외교소식통은 이와 관련, 중국정부가 이번 도청을 미국의 동북아 정책, 그 중에서도 특히 한반도 정책의 ‘빅딜 카드’로 사용하려는 게 아니냐는 분석을 내놓고 있어 주목된다.
요컨대 부시 정부의 공격적 한반도정책이 변화하는 주요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분석이다. 우리로서 예의주시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서방언론의 잇따른 도청 보도**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지난 19일(현지시간) 중국측이 지난해 9월 미국으로부터 인도받은 직후인 10월에 이를 시험비행하는 과정에 이상한 전파방해 소음을 포착, 장쩌민 주석의 침실과 화장실 등 실내 장식 속에 숨겨져 있는 27개의 도청장치들을 찾아냈다고 보도했다.
이 전용기는 미국 보잉사 시애틀 공장에서 제작된 뒤 텍사스 샌안토니오에서 실내장식을 했으며, 지난해 8월 호놀룰루를 거쳐 9월 중국에 인도됐다.
도청장치 설치 사실을 보고받은 장쩌민 주석은 크게 격노했으며, 이 비행기는 장주석의 전용기로 사용되지 않고 현재 베이징 북부 공군기지에 계류해 놓고 있다고 FT는 보도했다.
미국의 워싱턴포스트지도 19일 FT 보도 사실을 확인하며 “중국 항공업계와 군 관계자들은 미국 정보기관의 소행이라고 비난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현재 중국정부가 공군장교 20명과 중국항공물품수출입공사 간부 2명을 구금하고 직무유기 및 부패혐의를 조사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중국 정부와 언론의 ‘조직적 침묵’**
이번 사건은 중국 최고수뇌의 일거수일투족을 도청하려 했다는 점에서 대단히 충격적 사건이며, 만약 미국정부가 이에 개입됐을 경우 중차대한 외교분쟁으로 번질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더욱 문제의 보잉 767기는 중국이 지난해 11월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기 위해 미국과 쌍무협상을 벌이는 과정에 WTO 가입의 반대급부로 미국으로부터 도입하기로 한 40억달러어치의 보잉기 가운데 하나여서 미국의 도덕성은 더욱 치명적 상처를 입고 있다.
중국에게 강제로 물건을 팔고, 그 물건 속에 도청장치까지 한 셈이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교가의 관심은 ‘도청’ 사실보다는 중국이 왜 도청사실을 발견하고도 지금까지 석달간 이례적으로 침묵하고 있으며, 서방언론이 이 사실을 보도한 지금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가로 쏠리고 있다.
중국 정부나 언론은 21일 현재까지 도청 사실에 대해 일절 공식적 언급이나 보도를 하지 않고 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의 특종보도는 베이징발(發) 기사였다. 중국정부가 파이낸셜타임스에 이 사실을 흘렸다는 명백한 증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정부는 이에 대해 전혀 코멘트를 하지 않고 있다.
중국 언론도 마찬가지다. 중국관영 인민일보나 신화사통신은 파이낸셜타임스, 워싱턴포스트 등 서방언론의 보도내용조차 전하지 않고 있다.
‘조직적 침묵’이다.
***중국, 북한에게 더이상 공격적 태도를 취하지 말라고 미국에 경고**
중국정부는 왜 도청사실을 흘린 뒤 침묵하고 있는가.
이와 관련해 우선 주목해야 할 대목은 부시 대통령이 내달 21일 중국을 방문한다는 사실이다.
부시 대통령은 9.11테러 발발로 순연됐던 일본,한국,중국 3국 방문을 내달 단행한다. 부시는 우선 일본을 거쳐 한국을 19~21일 방문한 뒤 21일부터 중국을 찾을 예정이다.
부시의 동북아 3국 방문은 특히 ‘정치군사적 측면’에서 비상한 관심을 모아왔다.
부시정부는 출범후 김대중대통령의 햇볕정책 등 한반도 해빙 분위기에 노골적으로 제동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부시는 9.11테러 직후에는 북한을 앞으로 미국이 확전을 고려중인 테러국가중 하나로 지목하기까지 했다.
따라서 부시의 이번 방문은 한반도 정책의 향방과 관련해 국제외교가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와 관련, 최근 중국정부 고위층을 만나고 온 국내 외교소식통의 전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국 정부의 한 고위관계자는 국내인사와 만난 자리에서 “중국정부는 부시정부의 테러 확전대상에서 북한이 제외되기를 미국측에 강력히 희망하고 있다”고 중국정부 분위기를 전했다.
그는 “부시정부는 9.11테러 발발후 북한을 테러국가중 하나로 지목했으며 미국의 절대우방인 이스라엘은 아프가니스탄에 북한이 무기를 수출했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며 “이때 중국정부는 미국에 대해 미국의 아프간 공격을 묵인하는 대신에 북한에 대해서는 더 이상 공격적 태도를 취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분명히 전달했다”고 전했다.
중국정부가 미국 확전이 북한 등 동북아로 번지려는 움직임을 얼마나 예의주시하고 있으며, 이를 막기 위해 물밑에서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증언이다.
***월드컵때 중국관광객 경의선 타고 서울 입성할 수도**
한반도는 부시 정부 출범후 다시 ‘동토(凍土)’가 됐다.
그러던 중 지난해말 미국과 북한 정부가 접촉을 재개하는가 하면, 북한 교수들이 미국측 초대로 미상원을 방문하기로 하는 등 미묘한 해빙 기류를 보이기 시작했다. 북한은 또한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 합의사항인 경의선 철도 공사를 재개할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
이같은 미묘한 변화는 어디에서 유래하는 것인가.
어쩌면 그 해답은 ‘중국’에서 찾을 수 있으며, 최근의 도청의혹 또한 이같은 연장선 위에서 해석해야만 여러 의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쩌면 이번 도청사건으로 오는 5월말 서울에서 열리는 월드컵때 중국 관광객들이 경의선을 타고 서울에 입성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우리가 도청 사건의 향배를 예의주시해야 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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