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 사태는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아르헨티나는 50년대 세계 10대 강국이었으나 경제원리를 무시한 지나친 사회보장제 도입으로 파산지경을 맞았고, 여야의 극한투쟁으로 정치가 경제를 흔들어댔으며, 노동자들은 생산성 향상이 뒤따르지 않는 임금을 요구함으로써 기업이 어려워졌다. 구조조정을 해나가다가 어렵다고 풀고, 다시 구조조정을 하는 악순환을 되풀이하다가 오늘을 맞게 된 것이다.
타산지석으로 삼아 교훈을 얻어야 한다.”
김대중 대통령이 26일 오전 정부 중앙청사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하며 올 한해를 회고하는 자리에서 말했다고 오홍근 대변인이 전한 이야기 가운데 일부이다.
김대통령은 이날 ‘할 말’이 많은 듯싶었다. 워낙 올 한해가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회고하기 싫을 정도로 워낙 어려움이 많았던 해였기 때문일 것이다. 충분히 이해가는 일이다.
***아르헨티나 개혁은 DJ노믹스의 모델**
문제는 이날 김대통령의 발언 중 곳곳에서 대통령의 적절치 못한 상황인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적잖았다는 데 있다.
그런 대표적인 예가 ‘아르헨티나 사태’를 보는 시각이다.
김대통령은 아르헨티나 국가파산 사태의 원인을 지나친 사회보장제, 여야의 극한투쟁, 노동자들의 무리한 임금인상 요구, 갈 지(之)자 구조조정 등 네 가지로 분석했다.
대통령의 분석은 부분적으로는 맞는 지적이다. 집권세력들이 경제원리보다는 대중의 인기를 중시해온 70~80년대 패론주의 시절에는 실제로 이런 모습이 많이 목격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89년 외환위기를 겪은 뒤인 90년대 아르헨티나의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89년 외환위기 직후 대통령직에 오른 아르헨티나의 메넴 대통령은 국제통화기금(IMF)의 통제아래 김대중 정부의 경제개혁 즉 ‘DJ노믹스’와 너무도 흡사한 경제개혁 드라이브를 걸어왔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DJ노믹스의 모델은 아르헨티나였다고도 할 수 있다.
메넴이 통치하던 지난 10년(89~99년)은 현정부 초기의 DJ노믹스 이상으로 삼엄한 구조조정의 계절이었다.
메넴은 공공부문 개혁을 위해 90~94년 사이에 전화, 전기, 가스, 방송 등 전체 국영기업의 97%를 민영화했다. 대부분 이를 사들인 주체는 미국과 유럽의 외국자본이었다.
노동부문 개혁을 위해선 해고여건을 크게 완화하는 등 노동시장을 대대적으로 유연화했다.
금융부문 개혁도 강도 높게 단행돼 대다수 금융기관이 외국계 소유로 넘어갔다.
이같은 메넴의 개혁은 ‘IMF 모범생’이라 불리며 외국자본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고, 그 결과 90년대 중반까지 아르헨티나 경제는 주가가 급등하고 외환보유고가 늘어나는 등 약진을 거듭하는 듯 보였다.
아르헨티나는 그 무렵 우리나라에서도 벤치마킹 대상이었다. 96년 반도체 불황 및 잘못된 환율정책으로 우리나라의 경상수지 적자가 2백36억달러에 달할 정도로 경제가 심각한 위기상황에 직면하자 이석채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은 아르헨티나를 찾아 ‘메넴 개혁’의 현장을 직접 돌아보기까지 했다. 이수석은 귀국후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직접 가서 보니 대단하더라”며 “우리나라도 아르헨티나의 뒤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메넴대통령의 인기는 지지율이 10%에 불과할 정도로 좋지 않으나 메넴은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개혁을 끝까지 밀어붙이겠다고 말하더라”고 덧붙였다.
***아르헨티나가 몰락한 진짜 원인**
메넴의 개혁 드라이브는 그러나 “메넴의 지지율이 10%밖에 안된다”는 이수석의 말에서도 엿볼 수 있듯, 국민의 저항에 부딪혔다.
개혁의 결과물이 물가 급등, 서민층의 세금부담 증가, 고용 불안, 국부 유출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민영화의 결과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전기, 전화요금을 물어야 했다. 단기간에 투자한 돈을 회수하려는 외국계의 농간 때문이었다.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또한 부가가치세 등 무거운 간접세 부담에 시달려야 했다. 외국자본 유치를 이유로 법인세 등 기업이나 상류층이 물어야 하는 직접세를 크게 낮췄기 때문이다. 고용 불안도 심각했고 실질임금도 하락했다. 외국계 자본이 경영합리화를 이유로 사람을 줄이는 데는 적극적이었지만, 새로운 산업을 일으켜 신규고용을 창출하는 데는 무관심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 외국계와 상류층은 돈을 버는대로 곧바로 외국으로 반출해나갔다.
메넴정권은 이밖에 국영기업을 민영화하는 과정에 뇌물을 받는 등 각종 부정부패 스캔들을 일으켰다. 메넴의 개혁이 국민의 거센 저항에 직면한 것도 당연했다.
이처럼 뒤뚱거리던 메넴의 개혁은 98년 브라질 경제위기를 계기로 치명적 타격을 입었고, 그 결과 4년내리 마이너스 성장을 하다가 마침내 최근 디폴트(채무불이행)를 선언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처럼 아르헨티나의 몰락은 김대통령이 지적한 과도한 사회복지비용이나 임금인상 요구, 여야 극한투쟁과는 거리가 먼 원인들에 의해 초래됐다. 그보다는 과도한 미국 추종적, IMF 추종적 개혁이 몰락의 근원이었던 것이다.
***아전인수식 해석은 곤란**
김대통령은 아마도 아르헨티나 사태를 통해 우회적으로 국내에 메시지를 보내려 했던 듯싶다.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 경제가 당면한 위기의 원인은 대통령이 아르헨티나 위기의 근원으로 지적했던 과도한 사회복지비용이나 무리한 임금인상 요구 등과는 거리가 멀다. 최근의 극한적 여야대립이 경제의 한 불안요인이 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같은 정치불안 또한 원인 제공자는 진승현 게이트 등 각종 정경유착 스캔들을 미연에 방지하지 못한 통치권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아르헨티나 사태로부터 배워야 할 대목은 DJ노믹스가 장차 직면하게 될지도 모를 각종 위기요인을 사전에 어떻게 제어해 ‘제2의 아르헨티나’가 되지 않도록 할 것인가이다. 그런 면에서 아르헨티나 사태를 보는 대통령의 시각은 적절치 못하다 할 수 있다.
또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은 우리나라 역대 위정자들은 공개석상에서 남의 나라 이야기를 너무 쉽게 한다는 사실이다.
과거 김영삼 대통령은 재임기간중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고 말해 외교적 물의를 빚은 적이 있다. 같은 맥락에서 김대중 대통령의 이번 아르헨티나 발언도 외교적 측면에서 보면 적절치 못한 언급이라 할 수 있다. 아무리 아르헨티나가 망했다 하나 아르헨티나 역시 주권과 자존심이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입은 무거워야 하는 법이다.
***대통령의 입은 무거워야**
김대통령은 반면에 미국에 대해서는 지나친 저자세를 드러내 묘한 대조를 이뤘다.
“9월11일 테러후 2시간만에 부시 대통령에게 위로와 격려 전문을 보내고 많은 토론을 했으며, 상해 APEC에서 선두에 서서 반테러를 호소해 공동선언이 나오도록 했다. 그것은 테러이후 첫 번째 국제회의였고, 그 회의에는 과거 냉전체제 하에서 미국과 대결하던 러시아와 중국도 있었으며, 이슬람 국가도 있었는데도 만장일치로 의견을 모아 또다른 테러가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했다.”
아무리 김대통령이 미국의 부시정권 출범이래 남북대화가 중단되는 등 말 못할 많은 고충을 겪고 있어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필요로 하고 있다고는 하나, 국민 입장에서 보면 기분이 좋을 수 없는 지나친 저자세이자 자화자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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