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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 게릴라, 헤테로토피아의 비판적 시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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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 게릴라, 헤테로토피아의 비판적 시민들

[기고] 자유주의자들에게 보내는 네 번째 편지

그동안 안녕하셨는지요? "이 편지를 기다린 분이 한명이라도 있다면" 우선 그 분들께 사과의 말씀부터 드려야겠습니다. 우리사회에 '자유주의 게릴라'가 필요하다고 했던 지난 세 번째 편지에서, 이번 편지에는 "정치적 자유를 실현하는 경제적 필요의 조건으로서 분배의 재구성"에 대해 쓰겠다고 약속했었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다음 편지로 미룰까 합니다. 이왕 '자유주의 게릴라' 이야기를 꺼냈으니, 이 '자유주의 게릴라'가 어떤 존재인지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민주정체에서 '자유주의 게릴라'는 정말 소중한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자유주의 게릴라야 말로 합의와 동의를 강조하는 "호모토피아"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견과 차이의 중요성을 알려주는 '헤테로토피아'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이냐고요? 오늘은 자유주의 게릴라는 어떤 존재인지 민주주의와의 관계 속에서 좀 더 상세히 풀어볼까 합니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이루는 긴장관계, 그리고 왜 이런 긴장관계가 의미 있는지 이야기하는 동안, 차이와 이견을 강조하는 헤테로토피아의 예로 <나는 꼼수다>를 언급해 볼까 합니다. 그리고 <나는 꼼수다>의 사례를 통해 이견과 차이를 중요시하는 자유주의 게릴라들이 배워야할 것들을 살펴볼까 합니다.

이 글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밝혀두어야 할 두 사안이 있습니다. 첫째, 제가 <나는 꼼수다>를 "자유주의 게릴라다"고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다만 <나는 꼼수다>가 자유주의 게릴라와 유사한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자유주의 게릴라들이 <나는 꼼수다>의 사례를 통해 배울 것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각자의 정체성은 자신이 정의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점에서도 제가 <나는 꼼수다>를 자유주의 게릴라라고 일방적으로 정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 글에서 여러분이 자주 접하게 될 호모토피아와 헤테로토피아라는 용어와 관계가 있습니다. 이 글에서 헤테로토피아는 차이와 이견을 강조하는 성향을 이르는 반면 호모토피아는 동질성을 강조하는 성향을 이르는 말로 쓰이고 있습니다. 개념구분을 위해 민주주의 성격을 호모토피아로 자유주의 성격을 헤테로토피아로 표현하고 있지만, 앞으로 보게 될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호모토피아와 헤테로토피아의 긴장이 서로 간의 반목과 대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양자 간의 긴장이 서로 간의 "보완효과"를 만들어낸다는 점을 기억해두면 좋겠습니다. 특히 현재 우리사회 권력의 반민주성을 보면, 이 양자의 보완효과는 더욱 절실하다 할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라는 호모토피아

사람들은 흔히 민주주의가 차이와 이견을 인정하는 체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좀 더 엄격히 정의해 본다면 민주주의는 차이와 이견에 인색한 체제입니다. 기본적으로 민주주의가 합의와 동의에 기반을 둔 동일성을 지향하는 체제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민주주의를 운영하는 기본 원리인 "다수결의 원칙"이 그렇습니다. 51명의 합의와 동의만 있다면 49명은 어떤 방식으로든 51명의 의견을 자기가 동의한 듯 받아들여야 합니다. 민주주의에서 다수의 독재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지요. 민주주의에서 투표의 아이러니는, (클로드 르포르와 피에르 로장발롱이 말하듯) 투표 자체는 개인들이 특정한 선호를 내보이는 것이기에 서로 간의 의사가 여러 개로 나뉘어져 있음을 증명하는데도, 투표의 결과는 오로지 의사만 존재하는 듯 받아들어야 하는데 있습니다.

민주주의에서 자유주의의 큰 공헌이라면, 투표 등과 같이 제도적 질서에서 구현하기 어려운 차이와 이견의 중요성을 부각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크 랑시에르가 [민주주의의 혐오(Hatred of Democracy)]에서 지적하듯, 현대의 일부민주주의자들은 시민사회의 다양성이 민주정체를 너무 시끄럽게 만들어 국가를 집어삼켰다고 비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에 맞서 자유주의자들은 많은 사람들이 이질적이고 분열적인 것으로 비판하는 이견이나 차이가 결코 민주주의 체제에 나쁜 요소가 아니라는 것, 오히려 정치적 역동성을 불어넣는 계기가 된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예를 들어, 100명 중 한 사람이 다르다면 그 한 사람이 왜 다른지, 무엇이 다른지를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었고, 결국엔 이런 서로 다른 목소리가 사회에 다양성을 불어넣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민주정체에 좋은 결과를 만들어낸다는 것이었습니다(처음 시작할 때 말씀 드린 일종의 보완효과지요).

애초에 자유주의는 이런 차이와 이견의 중요성을 보편적인 개인의 권리로 방어했었습니다. 이후 이런 개인의 차이 인정은 20세기 말부터 집단의 차이 인정으로 발전되었고, 공동체주의 입장에서 집단의 차이를 강조하는 입장과 만나 다문화주의라는 강력한 정치적 입장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간단히 말해 자유주의는 공동체주의와 함께 다문화주의를 떠받치는 커다란 두 기둥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런 입장에서 다문화주의 등이 한축을 이루는 당대의 민주주의를 보면, 민주주의 그 자체가 집단의 차이를 당연히 인정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성공적인 민주주의를 이미 이룬 사회에서조차 차이와 이견의 중요성이 본격적으로 민주주의의 축으로 등장한 것은 채 50년도 되지 않습니다. 20세기의 칼 슈미트와 그를 따르던 민주주의자들은 민주주의에서 이런 일체성(homogeneity)를 얼마나 강조했던지, 다수의 지지를 판명하기 위해선 투표도 필요도 없으며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보내는 함성과 박수의 크기로 인민의 의지를 알 수 있다고까지 주장했습니다. 사실 지금 현재도 많은 민주주의자들이 이런 집단의 일체성 없이 '민주주의'가 유지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런 점에서 민주주의는 동일성을 지향하는 일종의 호모토피아(homotopia)인 셈이지요.

차이와 이견이란 이질성이 질서를 이룬 세계, 헤테로토피아

사실 제가 세 번째 편지에서 전한 메시지, "차이와 이견을 소중히 여기는 자유주의자들이, 하나의 정치세력에 집착하지 않고 정책과 사안에 따라 자유롭게 판단하며 행동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발상을 이끌어낸 이론적 배경은 미셀 푸코의 "헤테로토피아"란 개념입니다. 복잡한 이 개념을 이 지면을 통해 설명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 뿐더러 이 편지의 목적도 아닙니다. 다만 이런 헤테로토피아를 정치적으로 표현한다면, "차이와 이견이란 이질성이 인정되고 이런 이질성이 나름의 질서를 이룬 공간"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헤테로토피아란 개념을 구체화한 푸코가 가장 이상적으로 보는 헤테로토피아의 성격은 "뿌리 없음"입니다. 정치적으로 해석해보자면, 뿌리 내리지 않음이 차이를 인정하는 가장 좋은 조건이 되기 때문입니다. 특정한 장소에 깊이 뿌리내린다는 것은 일종의 영역을 차지하는 행위입니다. 하나의 확고한 영역을 얻은 존재는 자신의 영역 안에서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존재로 변하기 십상이지요. 그래서인지 푸코는 이런 뿌리 없는 이상적인 헤테로토피아를 바다를 떠다니며 결코 하나의 항구에 정착하지 않는 배에 비유합니다. 저는 이 뿌리내리지 않음이 "게릴라"의 이미지(image)와 맞는 것이라 보았고, 이런 이미지에 착안하여 "자유주의 게릴라"라는 개념을 제시했던 것입니다.

헤테로토피아, 디지털 세계를 만나다

자유민주주의에서 특히 차이(differences)에 대한 강조가 인터넷의 발전시기와 맞물려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기막힌 우연입니다. 인터넷은 차이와 이견이 다른 곳에 비해 상대적으로 별다른 편견 없이 쉽게 자리 잡을 수 있는 일종의 헤테로토피아입니다. 현실세계에서 정부청사 바로 옆에 만화방이 크게 자리 잡는 일은 보기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디지털 공간은 정부의 홈페이지와 만화방의 홈페이지를 차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두개의 웹페이지를 동시에 화면에 띄워놓고 그 사이를 마음대로 넘나들 수 있습니다.

특히 디지털 세계는 푸코가 말한 헤테로토피아의 뿌리 없음, 좀더 구체적으로 푸코의 비유를 빌어 말하자면 항구로 이뤄진 세계의 이미지와도 잘 맞아 떨어집니다. 인테넷 공간에서 우리는 포트와 포트, 다시 말해 끝나지 않는 항구와 항구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언제나 미지의 항구에 열려 있고 굳이 하나의 항구에 오래 정박할 필요도 없습니다. 또한 우리는 다양한 이름과 다양한 이유로 다양한 개인의 집과 집단의 공동체를 이 디지털 세계의 이곳저곳에 지을 수 있지만 언제든 그 집과 공동체를 떠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인터넷은 헤테로토피아의 본질과 맞아떨어질 뿐만 아니라 민주정체에서 차이와 이견이 가장 편견 없이 잘 공존할 수 있는 곳입니다. 이렇듯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디지털 공간이라는 헤테로토피아는, 합의와 동의라는 동일성을 강조하는 민주정체 내에 이견과 차이라는 이질성이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을 자연스럽게 확장시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렇게 보면 이 디지털 세계는 하나의 정치세력에 집착하지 않고 정책과 사안에 따라 자유롭게 판단하며 행동하는 우리 자유주의 게릴라들에게 아주 소중한 공간이자 도구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디지털 헤테로토피아, 민주주의를 끌어안다

그렇다고 이런 디지털 헤테로토피아가 마냥 자유주의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디지털 헤테로토피아는 현실세계에서 이질성이 잘 끌어안지 못했던 민주주의를 자연스럽게 품어냈는데, 웹 2.0의 등장이 그 시작이었습니다. 사회의 개방성과 구성원들의 협력은 민주주의 사회가 제시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인데, 바로 이런 개방, 협력, 연결, 공유를 기치로 내건 웹 2.0은 위키, 포드캐스트, 소셜네트워크와 같은 다양한 새로운 기술 개념을 발전시켰습니다. 위키는 말 그대로 '다양한 사용자들이 컨텐츠를 함께 구축할 수 있도록 하는 기술'로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위키피디아"입니다. 인터넷 백과사전인 위키피디아는 정확한 정보원천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누구나 참여해 컨텐츠를 함께 구축할 수 있습니다. 민주적 협력의 개념이 이에 해당되는 것이지요. 디지털 네트워크에서 대중적인 트위터와 페이스북은 소셜네트워크 기술의 일부로 연결과 공유라는 민주주의의 가치를 가장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와 더불어 웹2.0이 내세운 핵심요소 중 하나가 팟캐스트였습니다. 포드캐스트는 휴대용 미디어 장치로 들을 수 있는 디지털 (시리즈물) 방송이라는 의미로 오프라인에서도 간편히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온라인 상태에서만 들을 수 있는 웹캐스트(webcast)보다 훨씬 향상된 기술입니다. 정치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팟캐스트는 누구나 만들어 배포할 수 있으며 그 숫자에 관계없이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접근해 다운로드를 받아 정보를 보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미디어가 행사해온 정보거르기 방식인 "게이트 키핑"에서 자유로울 뿐만 아니라 사회적 "이견"이나 "차이"를 담아내어 널리 알리는 데 좋은 수단이 되어 왔습니다.

<나는 꼼수다>, 헤테로토피아의 지식인들

2011년 대한민국 사회를 뒤흔든 <나는 꼼수다>는 바로 이런 팟캐스트라는 기술을 이용해 사회적으로 감추어진 정보를 쏟아내고 정치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서로 소통할 수 있도록 공간을 열어준 대표적인 정치관련 시리즈물입니다. <나는 꼼수다>는 정치분야 팟캐스트 다운로드 전 세계 1위를 기록할 정도로 가히 폭발적이었습니다.

이런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된 데는 우리 사회의 "반민주적인 민주주의"라는 역설적 현실, 대한민국 정치엘리트와 일반시민들 간의 불통이 큰 몫을 했습니다. 특히 이런 불통에는 의사결정권자들의 소통 필요성에 대한 자각의 부재, 이에 따른 정부의 소통에 대한 무관심과 소통기술의 부재, 언론의 보수화에 따른 정보제한과 편파적 보도 등이 큰 몫을 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믿을만한 언론기구로부터 균형 있고 가치 있는 정보가 제공되지 않았고 정부에 비판적이거나 불리한 정보와 사건은 자꾸 감춰지고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보면 <나는 꼼수다>가 맞서고 있었던 것은, 민주주의의 동질성보다 훨씬 더 지독한 반민주주의가 내뿜고 있던 동질성이었습니다. 이런 반민주적체제의 역설은 민주주의라는 호모토피아를 마치 헤테로토피아처럼 보이게 만드는 데 있습니다. 푸코는 근대사회를 판옵티콘이라는 원형감옥으로 설명하며, 민주주의나 전체주의나 그 구조 자체는 이 판옵티콘과 똑 같다고 말합니다. 다만 이 두 체제의 차이를 만드는 것은 원형감옥의 감시탑 안으로 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는지의 여부라고 말합니다. 바로 "개방성"이 현대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는 것이지요. 이런 이유로 민주주의 사회에선 시민사회의 정부감시기능이 정부의 시민사회 감시기능을 압도하는 것이 일반적 경향입니다. 그러나 반민주적체제에선 이런 "개방성" 원칙을 강조하는 일이 체제에 "이견"(dissent)을 제기하는 셈이 되어버립니다.

이런 반민주적 상황에 등장한 <나는 꼼수다>는 일종의 정보 해방구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존 언론을 통해 접할 수 없는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기존 언론과는 전혀 다른, 아니 절대 볼 수 없는 자유분방한 진행방식에서 연속적으로 터져 나오는 새로운 정보와 가차 없는 비판에 많은 일반시민들이 환호했습니다. 덕분에 <나는 꼼수다>호를 타고 헤테로토피아에서 온 (정치가, 기자, 교수, 재야언론인으로 이루어진) 네 명의 선장은 순식간에 전국구 스타가 되었습니다. 어려운 시절을 다루는 네 명의 진행자가 보여준 유쾌함은 어려운 시절의 시름을 잠시 잊게 했고, 반면 이들이 감추어진 정보를 드러내며 때때로 보여준 진지함은 사회가 진정 어려운 시절을 보내고 있음을 자각시켰습니다. 대중적으로 성공하기 힘든 "정치"를 사회적, 문화적 이슈로 만들어 내며 등장한 <나는 꼼수다>는 그 형식과 내용을 기존의 언론형식에 집착하지 않고 자신들만의 고유한 방식을 취함으로써 그들만의 "헤테로토피아"를 당당하게 세상에 내보였습니다.

보편적 정의감에 호소한 헤테로토피아의 지식인들

그렇다면, 이런 이질적인 <나는 꼼수다>가 호모토피아적인 동일성을 강조하는 우리사회전체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저는 <나는 꼼수다>가 호소한 대상이 바로 일반시민들의 보편적 정의감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이클 왈저는 소수자들이 권리를 쟁취하고 싶다면,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여 자신들만을 위한 권리를 달라고 주장하는 것보단 소수자의 권리가 인간이라면 마땅히 보편적으로 공유해야할 권리임에 호소할 때 사람들이 훨씬 더 소수자의 권리 필요성에 공감한다고 말합니다. 왈저의 말처럼, <나는 꼼수다>는 일반적인 시민들의 보편적 정의감에 호소함으로써 사람에 따라 불편해 할 수 있는 자신들만의 독특한, 형식을 거부하는 자들이 만들어내는 차이에 대한 거부감을 상쇄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우리사회에 다른 정보와 다른 관점을 불어 넣으며 일반시민들이 정치를 대하는 태도를 긍정적으로 바꾸는 데 기여했으며 오프라인 세계에서 가능하지 않았던 저항의 공간을 온라인에서 만들어 그것을 다시 오프라인으로 끌어내는 성과를 남겼습니다.

호모토피아로 가기 위해 닻을 내려버린 헤테로토피아의 지식인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어느 하나의 항구에 닻을 깊이 내리고 정박하기 시작한 헤테로토피아는 또 다른 호모토피아로 바뀌기 십상입니다. <나는 꼼수다>는 어쩌면 네 명의 진행자의 의도나 기대와는 상관없이, 혹은 그 의도나 기대를 훨씬 넘어서 너무나 큰 지지 세력을 이끌어냈습니다. 너무나 많은 지지자를 얻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나는 꼼수다>가 일종의 언론권력이 되었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점점 커지고 있던 <나는 꼼수다>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만든 세계는 어느새 일종의 "호모토피아"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나는 꼼수다>에 대한 그 어떤 비판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도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2012년 4월 총선을 앞두고, <나는 꼼수다>라는 배의 선장들이 자신들이 비판하던 세계를 바꾸기 위해 잠시 머물러야 할 항구에 커다란 닻을 내리고 배에서 내려버리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당당히 걸어 들어간 호모토피아의 세계는 만만치 않았습니다. 떠다니던 배 위에서 자신들이 즐기던 자유분방함 그리고 거부했던 모든 형식이 부메랑이 되어 날아왔습니다. 헤테로토피아에서 온 엄청난 파장에 불편해 마지않던 호모토피아의 보수언론들은, 기다렸다는 듯 선장들이 기억도 못하는 과거의 말까지 모두 주어 담아 공격을 퍼부어댔습니다. 헤테로토피아에서 온 선장들이, 그리고 그들을 반겼던 호모토피아의 수많은 선원들이 기대했던 제도권의 금뱃지는 결코 그들을 반기지 않았습니다.

자유주의 게릴라들이 민주적 원칙과 시민의 정의감에 호소해야 하는 이유

<나는 꼼수다>의 성공과 좌절은 우리 자유주의 게릴라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줍니다. 나는 꼼수는 우리사회에서 이견과 차이의 중요성을 보여준 아주 의미 있는 헤테로토피아적 실험이었습니다. 이 실험이 성공적이었다는 것은 이후 우후죽순처럼 튀어나온, 심지어 보수 세력까지 그대로 따라한, 많은 유사 팟캐스트들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호모토피아를 강타한 이 헤테로피아적 실험의 성공 뒤엔 정보의 개방성이란 민주사회의 기본원칙과 시민들의 정의감에 대한 호소란 보편적 감성의 토대가 있었습니다.

이런 성공의 요소는 자유주의 게릴라 활동에 소중한 기준을 제공합니다. 자유주의 게릴라들은 이견과 차이를 소중하며 이런 이견과 차이에서 나오는 다양한 가치들을 시민사회로 들어가 실험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때 우리들의 다양한 가치들에 대한 실험이 사회적 공감대를 얻기 위해선 무엇보다 민주주의의 기본원칙과 시민들의 보편적 정의감에 호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요소가 더욱 중요한 것은 자유주의 게릴라들이 꾸준한 연대를 모색하는 세력이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가치의 실험을 보편적 민주원칙과 시민들의 정의감에 호소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들립니다. 헤테로토피아적 실험을 호모토피아의 기준을 맞춘다는 것이 어불성설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는 나만이 아닌, 다른 사람들 역시 공유하고 있는 세계입니다. 이런 조건은, 이견과 차이를 중요시하는 헤테로토피아가 합의와 동의를 중요시하는 호모토피아의 세계 없이 유지될 수 없음을 알려줍니다. 사회에서 하나의 가치가 존재하기 위해선 장기적 관점에서 사회적 인정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차이의 인정"이란 말 자체가 다름을 받아들이자는 일종의 합의라는 것을 잊어선 안됩니다.

그러나 이런 현실을 부당하게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롤스도 지적하듯 한 사회에 존재하는 다른 사람들로부터의 존중은 한 개인이 삶에서 필요로 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입니다. 앞서 언급한 인정의 욕구 역시 바로 이런 타자로부터의 존중에 대한 갈망의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다른 사람들로부터의 존중은 우리가 지닌 고유한 가치를 다른 구성원들과 공유할 때 시작되고 완성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자유주의 게릴라들의 목표가 다양한 가치의 실험을 통해 시민의 역량을 강화하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우리들의 실험에 대한 다른 구성원들의 공감대는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사회 구성원들이 약속한 민주적 원칙을 지키며 행동하고 시민들의 보편적 정의감에 호소하는 것은, 자유주의 게릴라들에게 좋은 행동기준이 될 것입니다.

덧붙이자면, 여기서 보편적 정의감에 대한 호소를 제도권 정치를 통한 정의사회구현과 같은 일과 헷갈려는 안된다고 당부 드립니다. 정의감이란 시민들이 사회의 도덕적 구성원으로 성장하며 자연스럽게 형성된 시민의 자질의 일부입니다. 이 정의감에 대한 호소는 어떤 제도적 강제도 동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제도권 정치가 강조하는 정의실현과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자유주의 게릴라들은 제도권 정치가 아니라 시민사회를 주요활동무대로 삼는 이들입니다.

자유주의 게릴라들은 헤테로토피아의 비판적 시민들로 남는 것이 좋을 듯

저는 앞선 편지에서 자유주의 게릴라들이 시민사회에 남아야 하는 이유로, 이런 시민사회 활동이 아래로부터 만들어지는 탄탄한 민주주의라는 우리가 지향할 민주적 모델과 상응할 뿐만 아니라, 내부의 다른 목소리를 잘 인정하지 않는 정당이 중심이 되는 제도권 정치보다 개인들이 지니고 있는 다양한 가치를 실험하기에 더 적합한 곳이 시민사회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또 하나의 이유라고 한다면, 시민사회에서 자유주의 게릴라들이 실험하는 헤테로토피아적 방식과 호모토피아로서 제도권 정치의 방식이 서로 상응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권력에 대한 조롱과 비웃음은 헤테로토피아로 시작한 <나는 꼼수다>의 세계에서 중요한 요소였지만, 네명의 선장이 호모토피아로 들어서자마자 "김용민 교수 막말사건"과 같이 부메랑이 되어 날아들었습니다. 게다가 그 조롱과 비웃음이 사회적으로 확장되어 보편화되는 것은 장기적으로 정치를 대하는 시민들의 바람직한 태도일 수도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나는 꼼수다>가 호모토피아의 세계로 들어가지 않길 바랬습니다. 헤테로토피아의 공간을 자유분방하게 떠다니며 (민주주의마저 헤테로토피아로 바꾸는) 반민주적인 호모토피아에 뿌리내렸을 때 볼 수 없는 정보와 시선들을 시민들과 사회에 제공해 주었으면 했습니다. 그것만으로 반민주적인 현실에서 너무 의미 있는, 진정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김용민 교수의 정봉주 의원 지역구 물려받기라는, 다시 말해 잘 아는 친구들끼리 지역구를 물려받는 순간, 네 명의 선장이 벌였던 헤테로토피아적 실험은 혈연, 지연, 학연에 연연하는 구태의연함의 답습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나는 꼼수다>는, 자유주의 게릴라들이 좀 더 자유로운 헤테로토피아적 실험을 원한다면, 제도권 권력을 욕심내기보다는 헤테로토피아적 실험의 장으로서 시민사회에 남는 것이 좋음을 보여주는 적합한 사례라는 생각입니다.

이렇듯 <나는 꼼수다>가 헤테로토피아에서 일종의 호모토피아로 변해가는 과정에서, 개인적으로 조금 실망스러웠던 부분은 일부 <나는 꼼수다> 극성 지지자들이 부패한 기존의 질서에 대항한다는 명분으로 <나는 꼼수다>를 비판하는 목소리들에 유연하지 못한, 때로는 너무 완고한 자세를 보인 것이었습니다. 이런 자세는 사실 <나는 꼼수다>를 비판할 수 없는 또 다른 "호모토피아"적 언론권력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일이었다는 생각입니다. 사실 <나는 꼼수다>가 언론권력이 되었다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고 봅니다. 문제는 언론권력이 된 <나는 꼼수다>를 네 명의 선장이 스스로 어떻게 통제 하느냐, 그 언론권력을 일반시민들이 어떻게 지지하고 지속적으로 받아들이느냐였다는 생각입니다. 돌이켜보면, <나는 꼼수다>가 스스로를 통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시민들이 <나는 꼼수다>를 비판적으로 지지하고 받아들이는 것이었다는 생각입니다("돌이켜보면"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저도 돌아보니 그렇다는 뜻입니다).

이런 사례에서 자유주의 게릴라들이 배울 점은 우리들의 실험을 낯설어하는 이들이 가해오는 비판에 항상 개방적인 태도를 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나는 꼼수다>에서 볼 수 있듯 비판이 아니라 의미 없는 비난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비난 때문에 의미 있는 비판을 듣지 못하는 실수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외부의 비판을 잘 섭취해서 내부의 힘으로 만드는 역량이야 말로 자유주의 게릴라들이 지닌 비판적 시민으로서의 진정한 자질이라 생각합니다. 비판적 태도는 이견을 지닌 자들이 품는 기본적인 자질입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를 향한 비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것 자체가 우리 존재의 모순을 드러내는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뿌리 없는 게릴라, 어떻게 연대할 것인가?

네 번째 편지는 어땠는지요? 무엇인가 함께 생각할 거리가 있었다면, 그런 바램입니다. 마지막으로 몇 가지 덧붙여 둘 말이 있습니다. 우선 자유주의 게릴라들은 시민사회에 남자는 이야기가 헤테로토피아적인 시민사회와 호모토피아적인 제도권 정치 사이에 벽을 만들어서 자유주의 게릴라들은 제도권 정치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싶습니다. 제 친구의 표현을 빌자면, "누구나 쫄지 않고 자유롭게 말할 수 있고, 그 '세상에 자유롭게 말하기'의 룰이 공정하게 그리고 성숙하게 지켜지는 사회를 민주적인 사회라고 한다면, 그 안에서 자유로운 게릴라적 연대를 즐겁고, 재미있고, 행복하고, 당당하게 하라고 자유민주주의하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헤테로토피아적 차이와 이견 역시 차이의 인정이란 호모토피아적 제도권의 합의 틀 내에서 더 꽃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다만, 제가 자유주의자들이 게릴라들이 되어 제도권 정치보단 시민사회에 남자고 했던 이유는, 제도권 정치가 반민주적으로 변해가고 제도권 진보가 길을 잃은 이 위기의 순간이란 특수성 때문입니다. 자유주의자로서 이런 위기를 벗어나는 최선의 방법이, 제도권의 특정 정치세력과 결탁하기보다는 정책과 사안에 따라 민주적으로 판단하고, 우리 삶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조건의 끊임없는 변화를 추구하기 위해 공감하는 세력을 찾아 유연하게 연대하는, 한곳에 뿌리 내리지 않은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자유주의자들이 뿌리 내리지 않고 활동한다면 우리 사회에서 하나의 안정적인 정치세력을 형성하지 못할 것이라 말합니다. 사실 애초부터 자유주의 게릴라라는 발상엔 반영구적인 "정치세력의 형성"이란 의도는 없었습니다. 만약 이런 "자유주의 게릴라" 활동이 하나의 정치세력을 형성하게 되면, 더 이상 자유주의 게릴라가 아닌 전혀 다른 제도적 정치세력으로 변모하게 되겠지요.

한편, 어떤 분들은 제도권에서는 정책과 사안에 따라 연대한다지만, 제가 강조하는 시민사회 수준, 즉 제도권 밖에서 자유로운 연대란 도대체 무엇인지,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궁금해 할 수도 있습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어떻게 자유주의 게릴라들이 좌파 게릴라, 페미니스트 게릴라, 환경주의 게릴라, 애국주의 게릴라 등과 연대를 할 수 있냐고 묻습니다.

이를 이해하려면 자유주의 게릴라의 본질이 "개인성"(individuality)을 중요시하는 사람들의 자유로운 연대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개인성을 바탕으로 여성, 환경, 애국 등 다양한 영역에서 자신의 관심사를 구체적으로 실현한다는 점에서, 자유주의 게릴라는 "개인성"에 그 근본 바탕을 두고 각자의 영역에서 페미니스트 게릴라, 환경주의 게릴라, 애국주의 게릴라 등으로 활약하는 이들의 모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유주의자가 애국주의를 들먹이니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많은 자유주의자들이 헌법애국주의라고 하여 민족이나 공동체적 정서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개인의 평등한 자유를 보호하는 헌법에 기반을 둔 정체에 대한 애정을 말하고 있으며, 애국이 공동체의 의견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잘못된 점에 이견을 놓는 행위라고 해석하며 애국주의와의 접점을 찾아내고 있습니다.

여성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표적인 자유주의 여성 페미니스트 수잔 오킨 같은 경우 "다문화주의는 여성에게 나쁜가?"라는 글을 써서 다양한 입장에서 여성의 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의 논의를 이끌어냈으며, "정의와 여성"의 문제를 두고 비판이론 입장에서 여성주의를 바라보는 세일라 벤하비브와 열띤 논쟁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낸시 프레이저, 주디스 버틀러, 두루실라 코넬 등과 같은 서로 입장이 다른 여성주의자들이 모여 <여성주의 논쟁>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제도권 정치가 아니더라도 각자의 영역에서 관심사를 제기하고, 다른 입장에서 비슷한 관심사를 공유한 이들과 논쟁하고, 협력하고, 자체 담론을 넓혀가며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야 말로 자유주의 게릴라들의 활동방식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전문적인 활동이 아니더라도 일반 시민단체활동 참여, 지지서명 보내기, 지역활동, 봉사활동 등을 통해 자유로운 연대를 모색하는 다른 입장의 사람들, 연대가 필요하거나 절실한 사람들과 함께 행동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 편지에선 앞서 약속했던 "정치적 자유를 실현하는 경제적 필요의 조건으로서 분배의 재구성"을 담아 보내겠습니다. 아마도 마지막 편지가 될 듯합니다. 날이 무덥습니다. 모두 더위 조심하시길 바라며 오늘 편지를 맺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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