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자 없는 자유주의 진보 담론
요즘 통합진보당 사태로 인해 진보진영이 시끄럽습니다. 아니 진보진영뿐만 아니라 진보진영에게 조그마한 기대를 걸었던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혼란스러우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럴수록 사태를 이성적으로 바라보아야 하고, 단기적인 처방을 넘어 장기적인 대책이 필요하리라 생각해 "진보의 재구성에 대한 논의의 필요성"을 담아 <프레시안>에 기고했습니다. 하지만, 그 문제를 제기한 저는 스스로 진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자유주의자입니다. 왜 자유주의자가 진보의 재구성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느냐 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이유는 간명했습니다. 기득권 보수세력의 힘이 너무 강력한 우리사회에서 이를 견제하고 균형을 맞춰줄 수 있는 또 하나의 축이 진보라는 이름 아래 모인 사람들이라 보았기 때문입니다. 견제세력이 미약할 수록 사회의 주축세력이 부패하기 쉽다는 것은 지난 4년의 경험이 증명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고글이 들어간 이후 몇몇 매체에서도 진보의 정체성을 고민하는 글을 보았습니다. 예를 들어, <경향신문>은 종북주의와 자유주의자들이 진보일 수 있느냐는 문제를 제기했고, 주대환 씨는 한 인터뷰에서 진보의 목표가 사민주의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를 보면 진보진영의 고민도 본격화된 듯 보입니다. 하지만 이런 문제제기 중 자유주의도 진보적일 수 있냐는 고민은 조금 불편했습니다. 그 문제제기 자체가 불편했던 것이 아니라 그 담론 내에서 정작 자유주의자들의 목소리가 제대로 반영된 부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10명의 백인학생들이 모여 흑인문제를 토론하는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사실 최장집 선생님이 중심이 되어 논의되었던 "자유주의도 진보적일 수 있는가"라는 논의부터 차근히 본다 해도 자유주의자들의 정체성을 진보주의자들이 결정하려 드는 듯한 이 불편한 현실에 조금 씁쓸함을 느낍니다. 이런 부분은 비록 짧은 역사이긴 하지만 자신들의 정체성을 제대로 표현해 내지 못한 우리사회 자유주의자들의 책임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우리사회에서 자유주의자들은 누구인지,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우리 스스로 공적으로 하나의 담론을 형성해 이야기해 볼 시점이 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자유주의자라는 정체성을 공적으로 밝히고 오랫동안 글을 써왔다는 핑계를 삼아 이 편지를 씁니다.
해방이후 자유주의 정체성 혼란의 기원
한국사회에서 자유주의는 애매한 위치에 놓여 있습니다. 예를 들어, 최장집 선생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서 "한국에서 자유주의는 보수세력에 의해 오염되고 비판적 운동세력에 의해 버림받았다"고 묘사합니다. 그리고 대표적인 자유주의자인 정태욱 선생님은 우리사회가 자유주의 만연 속에서 자유주의가 패배한 아이러니의 시대에 있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이를 살펴보기 위해선 잠시 우리사회에서 보수세력이 "자유주의"라는 맥락을 어떻게 이용해 왔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원칙적으로 보자면 보수세력은, 사회적으로는 전통적 문화와 가족이란 가치를 존중하고, 정치적으로는 엘리트가 중심이 되어 기존의 체제를 보호하거나 점진적인 변화를 선호하며, 경제적으로는 국가의 개입 없는 자유로운 시장을 지향합니다. 한국의 기득권 보수세력은 이런 전통적 원칙의 보수와는 전혀 다르며, 한국 보수 세력자체도 87년 이후 민주화 과정과 1997년 경제 위기를 전후로 조금 다른 성격을 보입니다. 87년 전후의 보수는 사회정치적 성격이 강한 보수로 정치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와는 전혀 상관없는) 반공주의 개발독재체제를 지지했고 경제적으로는 국가가 재벌을 보호하는 (실제로는 시장 원리를 위반하는) 시장을 지지했습니다. 87년 민주화 이후 개발독재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며 그 영향력이 조금씩 줄어들었던 보수주의의 새로운 변화는 1997년 경제위기를 전후로 일어났습니다. 경제위기를 전후로 밀어닥친 보수주의의 변화는 그 중심이 개발독재 정치모델에서 신자유주의 시장모델로 넘어간 데 있습니다. 신자유주의 시장모델이 기득권 보수세력의 이익과 맞아떨어질 수 있었던 것은 신자유주의에서 국가의 역할이 시장 밖으로 나온 행위자들 을 다시 시장으로 밀어 넣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개발독재에 대한 향수가 과격한 신자유적 시장주의자들과 만날 수 있는 접점이 있다면, 바로 국가가 시장에 반대하는 행위자를 처단해야 한다는 발상일 것입니다.
저는 이런 한국의 기득권 보수주의를 꾸준히 엮어 온 두 가지 요소가 정치적으로는 반공의 이념이고 사회경제적으로는 기존 기득세력의 이권 보호라고 생각합니다. 이 두 요소는 서로 완벽하게 상호 보완의 역할을 해왔습니다. 북한에 대한 정치적 적대감에서 비롯한 체제 승리에 대한 갈망은 기존 기득권 보수세력의 이익을 국가가 보장하는 방식으로 빠르게 현실화될 수 있었으며, 기존 기득권 보수세력의 이권에 대한 반대는 대개 공산주의자들이란 명목으로 처단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가운데 보수는 기존 기득권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 특히 진보세력을 빨갱이라는 원색적인 말로 매도해왔으며, 이는 민주화가 상당히 진행되고 진보적 시민운동이 자유민주적 원리를 받아들이며 진행된 2000년대에 들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한국사회에 만연한 신자유주의는 시장 그 자체에 대한 깊은 신뢰에 기반하고 있다기보다는 앞서 언급했듯 국가가 시장에 반대하는 행위자를 처단해야 한다는 발상에 근거해 있습니다. 그리고 개인의 자유라는 자유주의의 근본 이상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이런 보수주의자들이 시장과 자유주의라는 이름을 걸고 자신들의 이익을 방어하는 것이 불편한 현실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 사회 보수들이 진보를 빨갱이라는 말과 동일시 해왔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몇해 전 뉴라이트 단체가 시도했던 자유주의진보연합이란 단체의 결성을 통한 진보라는 이름의 탈환전은 어이없어 보입니다. 진보라는 말이 너무 부러웠던 것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자신들 이 지닌 보수라는 정체성에 최소한의 자존심도 없는 집단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진보"라는 말을 차지하기 위해 투쟁했던 이유와 관련 맥락 들여다보면 다른 이해가 가능합니다.
자유주의진보연합은 창립 선언문에서 세계 역사의 관점에서 볼 때 자유주의만이 진보의 길을 열었음을 지적하며, 우리사회 급진세력이나 개인이 차지하고 있는 '진보'라는 말을 되찾아야 한다고 선언합니다. 이를 두고 문정인 선생님은 뉴라이트가 '진보'라는 용어에 집착하는 이유를 이들이 추앙하는 이승만과 박정희의 보수 모델이 기존의 자유지상주의에 근거를 둔 정통 보수모델과 내재적 모순관계에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기득권 보수주의자들이 '진보' 라는 용어에 집착하는 직접적 이유가 자유주의진보연합 <창립선언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우리 사회에 형성되어 있는 '보수=수구꼴통''/ 진보=자유민주'란 이분법적 구도를 깨뜨리려는 이데올로기 전략 때문이라고 봅니다. 뉴라이트 자유주의진보연합은 자유와 인권의 보호자라 자처하며 진보가 독차지 하다시피 한 자유와 인권의 경쟁자로 나서는 한편, 자신들이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이미지를 심으면서도 오랜 기조인 반공주의를 고스란히 남겨둡니다. 더 나아가 우리 사회진보를 공산주의나 주체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낡은' 관념에 집착하는 세력으로 몰아붙이며 자신들이야말로 낡은 관념과 결별한 진정한 진보라고 선언합니다. 이 선언의 절정은 '진보의 적'과 맞서 싸우겠다는 선언인데, 이 선언 안에서 기존의 진보세력은 졸지에 '진보의 적'이 되어 보수와 진보의 역전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뉴라이트의 움직임이 더 효과적일 수 있는 까닭은 이데올로기 장치의 핵심인 보수거대언론과 함께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기득권 보수세력의 모순적인 자유주의자 행세에다, 모든 자유주의자들이 신자유주의자들과 결국엔 똑같다고 규정하는 진보세력의 인식도 자유주의의 고립에 한 몫을 하는 듯 보입니다. 예를 들어 노무현 정부를 신자유주의를 지지하는 짝퉁 진보로 규정하는 데서 시작해, 스스로 진짜 진보세력이라 칭하는 분들의 자유주의에 대한 지독한 혐오와 경멸(자유주의자의 눈에는 이렇게 보입니다)은 지치지 않는 듯 보입니다. 구체적으로, 지난 3월 <미디어 오늘>에서 진보진영의 한 선생님은 진보의 정체성이 반신자유주의에 있다고 규정하고 "민주통합당과 참여연대, 경실련 등 시민단체들의 자유주의는 말할 것도 없다"고 주장합니다. 아주 조심스럽게, 원칙적으로 진보를 반신자유주의자로 규정하는 이런 범주 짓기가 위험할 수 있으며 모호할 수 있다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반신자유주의가 진보의 기준이라면 반신자유주의라는 전선에 같이 서 있는 종북세력의 존재는 어떻게 설명할지 난감해집니다. 이런 규정을 하신 선생님도 반신자유주의라면 종북주의도 상관없으며 누구라도 연대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현실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참여연대나 유사 관련 시민단체에서 일하시는 분들에게 자유주의자냐고 물어보면 아마 많은 분들이 펄쩍 뛸지도 모를 현실에서 모든 이들을 하나의 범주에 묶는 이런 일방적 정체성 규정은 집단이 아니라 개인의 개별성에게 방점을 찍어야 한다고 진실로 믿는 자유주의자들에게 참으로 불편한 발언일 수 밖에 없습니다(마치 "불법이민노동자는 다 범죄자들이다"는 말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굳이 이런 저런 변명을 늘어놓고 싶지는 않습니다. "진보의 가장 위험한 적은 보수주의자들이 아니라 짝퉁 진보로 행세하는 자유주의자들이다"라고까지 규정하며 정치를 적과 동지의 일방적 구분으로 본다면, 그 분명한 적의 일부분임이 분명한 저 같은 자유주의자의 변명이 크게 통하지 않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진보세력이 지향점 자체가 다른 세력과 혼동되지 않는 확고한 정체성을 원하듯, 자유주의자들이라고 다 같은 자유주의자들이 아니라는 사실만은 귀 기울여 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진보라는 정체성에 연연하지 말고 민주적 원칙에 따라 행동하자는 제안
이렇게 보니 보수에 의해 오염되고 비판적 세력이 버렸다는 자유주의에 대한 최장집 선생의 진단과 넘쳐나는 자유주의 속에 자유주의 패배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정태욱 선생님의 진단이 맞아떨어지는 합니다. 이런 현실을 앞에 두고 스스로 자유주의자라고 믿는 여러분께 부탁드리고 싶은 말은 이런 상황 그 자체를 자조적으로 바라보지 말자는 것입니다. 스스로에 대한 연민은 나르시스적 비애만 유발할 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개인의 정치적 자유보다 애국주의가 더 중요한 뉴라이트들조차 자신들이야말로 진정한 자유주의자이며 진보라고 뛰어들고, 동시에 진보세력이 자유주의자들 자체에 지독한 거부감을 보이는 마당에 누군가 이런 처지를 동정해 주지도 않을 것입니다(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새누리당에 우파진보 모임이 만들어졌다는 소식이 들리네요. 진보라는 말이 정말 그렇게 매력적인가요?).
이런 현실 앞에서 저는 한국사회의 자유주의자 여러분에게 "진보"라는 이름에 집착하지 말자고 제안합니다. 한국사회의 변화를 원하는 자유주의자들이 변화를 지향하는 진보세력과 그 궤를 같이 할 수 있고 그들과 함께 하고 싶다는 열망을 지닐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엔 개인이 선택할 문제이겠지만, 이런 열망이 진보라는 이름에 대한 집착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시민사회가 상대적으로 국가에 비해 약한 우리사회에서 자유주의자들은 "성숙한 시민"이라는 시민상에 방점을 찍고 행동하는 것이 더 바람직해 보입니다. 성숙한 시민의 양성은 너무나 당연한 과제인 듯 보이지만, 우리사회에서 이 부분에 얼마나 많은 관심을 시민 스스로 기울이고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예를 들어, 얼마 전 한 출판 관계자로부터 우리사회에서 "시민"이라는 말이 책제목으로 들어가 성공한 사례가 사실상 거의 없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피하기 위해선 더 많은 검증이 필요하겠지만, 우리사회의 정치적 이슈가 시민사회를 강화하는 다양한 정책보다는 정치지도자와 정당에 초점이 맞춰지는 상황을 보면 시민 자체의 역량 강화 부분에 상대적으로 그 관심이 소홀한 듯 보입니다.
구체적으로 제가 생각하는 자유주의자들이 지향해야 할 성숙한 시민상은, 무엇보다 개별성을 인정하며 개인 자신을 보살피고 다른 개별 시민들을 보살피는 일이 자신을 보살피는 일과 같은 맥락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유주의자들은 존재의 개별성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며, 자신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 다른 이웃한 사람들을 보살피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고, 다른 시민들을 보살피는 일을 남들을 위해서라고 보는 시선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 위선이 되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보수와 진보의 대립이 첨예한 우리사회에서 애매한 위치에 자리 잡은 자유주의자들이 성숙한 시민상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까요? 저는 그 길이 확고히 자리 잡은 민주적 원칙을 존중하고 그 원칙에 근거해 행동하는 데 있다고 봅니다. 한 사회의 민주적 원칙은 특정 세력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헌법이 명시하는 기본권은 모든 사회구성원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기에 정치적 입장을 떠나 누구나 존중해야 할 원칙입니다. 이런 민주적 원칙을 존중하는 이들이라면 그 누구라도 함께 이야기하고 논쟁하고 협력하며 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현대의 민주사회는 좌파와 우파라는 기준, 나아가 보수와 진보라는 기준만으로 설명하기엔 너무나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구성되어갈 것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각 개인들이 다른 사회구성원들과 공감하며 분명하게 쥘 수 있는 행동기준은 민주정체가 오랜 동안 역사적 과정을 통해 형성해온 민주적 원칙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유주의자 개개인마다 조금씩 다른 신념을 지니겠지만 이런 민주적 원칙에 대한 존중은 자유주의자들에게 신념이 다른 이들과 합의하고 함께 무엇인가를 지향할 수 있는 최소한의 토대를 제공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성숙하지 못한 민주사회에서 흔히 일어나는 문제는 일부 집단들이 민주적 원칙을 진실로 존중하기보다는 상황에 따라 자신의 입맛에 맞게 해석하고 이용하려 드는데 있습니다. 절차적으로 50-70퍼센트가 되어야 민주적으로 총체적 부정이라 할 수 있다는 황당한 해석이나, 필리버스터라는 반민주적 행위 등을 통해 절차적 민주주의의 약점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며 이용하는 통합민주당 당권파의 요즘 행태가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민주적 원칙을 존중하고 이에 따라 행동하는 성숙한 시민상이 우리사회 자유주의자들이 취할 수 있는 바람직한 태도라는 것이 저의 제안입니다. 하지만 이런 제안은 국가와 시민사회라는 큰 맥락에서 자유주의자들이 관심을 기울여야할 대상과 서로 가치를 달리하는 집단들과 행동할 기준을 담고 있을 뿐 여전히 자유주의자의 정체성이나 자신과 다른 시민들을 보살피는 방식을 구체적으로 담아내고 있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앞으로 여러분께 보낼 두 번째 편지에선 이런 이야기를 보다 구체적으로 해볼까 합니다. 짧지 않은 이 편지를 읽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이 첫 편지가 다음 편지를 기다릴 수 있는 이유가 될 수 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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