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의 재구성과 자유주의자들의 자리
세 번째 편지를 씁니다. 지난 편지에선 우리사회 자유주의자들이 공유했으면 하는 가치에 대해 이야기했었지요. 오늘은 "정치적 자유가 우선이다"는 주장과 함께 이를 실천하는 자유주의자들의 시민상으로 '자유주의 게릴라'라는 개념을 제안해 볼까 합니다. 이 주장과 제안은 첫 번째 편지에서 우리사회 자유주의자들은 "진보라는 이름에 연연하지 말자"는 제안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앞선 편지에서 우리사회의 왜곡된 자유주의 지형에서 굳이 "진보"라는 이름에 집착할 필요도, 그럴만한 확고한 이유도 없다고 했었지요.
오늘 편지에선 왜 '정치적 자유를 우선시하는 자유주의 게릴라들'이 진보의 재구성이 필요한 시점에서 진보라는 이름에 집착할 필요가 없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이유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이야기를 하다보면, 첫 번째 편지에서 제안한 왜 자유주의자들이 "제도권 권력 장악"보다는 "시민사회 강화"에 더 집중해야 하는지, 더하여 왜 우리사회 자유주의자들이 (일부 진보진영이 드러내는 '순혈주의'의 오류를 피하고) 변화를 위해 유연하게 연대하는 시민들이 되어야하는지 자연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정치적 자유가 우선이다
"정치적 자유가 우선이다." 많이 들어 본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에 우선한다는 뜻일까요? 다름 아닌 경제적 필요에 우선한다는 의미입니다. 진보의 큰 축을 이루는 (이렇게 표현해도 좋다면) "경제결정론자들"이나 "경제우선주의자"들이 본다면 이런 주장은 순전한 헛소리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오늘날 자유주의를 지탱하는 축은 "가치, 견해, 입장의 다양성"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경제적 필요는 각 개인이 지니는 "가치, 견해, 입장"에 영향을 미칩니다. 과거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노예들이나 여성들이 정치적 권리를 갖지 못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재산을 가질 권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적절한 부를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의 가치, 견해, 입장은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의 이데올로기와 부패의 유혹에 쉽사리 빠져든다는 생각이었지요.
이런 발상은 오늘날에도 유효한데, 우리사회에서도 목격할 수 있는, 가난한 이들이 자신들을 옹호하는 집단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부자와 기존의 권력을 소유한 이들을 위해 투표하는 현상이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경제적 여유가 없을수록 정치적 자유에 대한 관심보다는 경제적 필요에 집착할 수 밖에 없고, 이런 필요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집단의 유혹에 자연스럽게 빠져들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좀 더 크게 보아도 경제적 기반이 약한 국가일수록 정치적 부패가 높은 경향이 현저한데, 이렇게 보면 고대인의 지혜가 오늘날에도 정확히 적용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현실을 떠나 원칙적으로도 정치가 우선인 이유는 명확합니다. "경제적 필요"가 "정치적 자유"를 압도한다면 그 자체로 목적과 수단이 전도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정치적 자유를 존중하는 사회일수록 구성원들이 자신의 가치, 견해, 입장을 잘 표현할 수 있도록 각 개인의 경제적 안정을 보장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런 정치적 자유의 우선성이 한국사회에서 더욱 중요한 이유는, 절대반공과 경제개발우선주의가 필요에 따라 서로 조우하며 형성된 한국사회의 주도세력이 정치적 자유의 근간을 이루는 가치 다양성이나 양심의 자유에 오래도록 무관심했을 뿐만 아니라 기본적 인권마저 무시해온 역사적 맥락 때문입니다. 정치적 자유에 대한 경제적 필요의 우월성에 대한 강조가 빚어낸 현상이었지요. 하지만 이런 경향이 보수만의 특징이라고 여기는 일은 잘못된 이해일 수 있습니다. 일부 진보는 오랫동안 경제의 우선성에 지나친 집착을 보여 왔고 이런 집착은 언제든 정치적 자유에 대한 소홀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경제의 우선성에 대한 집착은 차이에 대한 관심을 지운다
오늘날 가치, 입장, 견해의 다양성이 핵심을 이루는 정치적 자유의 본질은 '차이에 대한 인정'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차이에 대한 인정'은 특정한 입장 내에 있는 '작은 차이들'에 대한 인식과 인정으로도 이어집니다. 그러나 일부 진보주의자들이 지닌 명확한 논리, "자유주의자들은 다 똑같다"는 획일적 인식은 자유주의 내부의 입장 차이를 지워버립니다. 자유주의자들이 "진보주의자들은 다 똑같다"고 하면 분노할 것이 분명하면서도 말입니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에 대한 일부 진보주의자들의 평가를 보면 이런 획일적 인식을 더욱 선명히 볼 수 있습니다. 이들에게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은 다 똑같은 신자유주의자들입니다. 예를 들어 최근 <레디앙>에 게제 된 "자유주의는 진보적일 수 없다"는 요지의 우리사회 진보적 자유주의 비판 칼럼이 그렇습니다. 이 글에서 보면, 필자는 유럽식의 "자유주의" 인식에 기반을 두고 있으면서도 (신)자유주의 체제 승리를 선언한 미국인 학자 프렌시스 후쿠야마의 예를 들고 있는데, 이는 유럽과 미국에서 자유주의자들이 전혀 다른 개념으로 쓰인다는 차이에 대한 인식의 부재를 드러냅니다. 미국의 자유주의자들은 후쿠야마의 선언을 아주 황당한 것으로 여깁니다. 이런 차이의 인식에 대한 부재는 이 칼럼 내내 한국사회 '자유주의자들은 다 똑같다'는 결론으로 향하고, 종래에는 한국의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은 "신자유주의를 신자유주의로 맞서는 광대들"로 전락하고 맙니다.
이 칼럼은 한국에서 "좋은" 자유주의를 구분하는 이들이 내세우는 "자유주의가 진보적일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한 반박이었습니다. 사실 저도 자유주의가 진보적인지를 왜 점검하는지 그 의도도 맥락도 정확하게 이해하지는 못하겠습니다. 자유주의자의 심정도 이러한 데 "자유주의가 진보주의를 오염시킨다"고 믿는 진보주의자들이 이런 시도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은 백번 이해하고도 남습니다. 하지만, 이런 못마땅함이 정치적 자유주의자들의 진보성을 김대중 및 노무현 정부에서 실천된 정치정책이 아닌 "경제패키지"를 기준으로 재단하여 평가를 내리고 똑같은 신자유주의자들이라는 결론으로 이어지는 것은 그다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간단히 말해, 정치적 자유주의자들이 내놓은 정치정책은 온전히 젖혀놓고 그들이 내놓은 경제정책의 비판만을 통해 "자유주의자들은 다 똑같다"는 결론은 정치를 경제로 환원시키는 일부 진보주의의 습관적 논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김대중 정부나 노무현 정부 아래서 이루어진 인권의 향상, 언론의 자유 보장, 여성 권리의 향상 등과 같은 정치에서 만들어진 커다란 차이는 보이지 않습니다. 마치 이런 정치적 자유의 보장은 예전부터 당연히 보장되고 있었던 듯합니다. 그러나 우리 역사에서 이 10년이 만든 정치적 자유의 정도 차이는 엄청나게 다른 것이며 이 10년 외에 이런 정치적 자유가 단 한순간도 당연히 보장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은, 비판 칼럼을 쓴 필자도 단 한번만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면 알 일입니다. 이런 경제정책이 본질적으로 똑같으면 정치적으로도 다 똑같다는 식의 논리, 경제의 우선성이 정치를 바라보는 눈을 가려버린 일부 진보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정치적으로 너무도 자유주의적인 진보의 지형
정치적 자유에 입각한 차이에 대한 인정의 필요성은 진보의 지형만 들여다봐도 쉽게 드러납니다. 자유주의 정치철학자 존 롤스는 자유주의 사회가 더 이상 정치공동체일 수 없다는 주장을 내세웠는데, 정치공동체란 하나의 가치 아래 모든 구성원이 결집할 수 있는 집단을 의미하지만 이제 서구사회에는 구성원들을 결집시킬 수 있는 하나의 가치가 지배할 수 없는 곳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저는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사회에서 이런 가치와 입장의 분열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곳이 진보진영이라고 생각합니다. 진보 지식인이 지닌 개개인의 신념은 전혀 자유주의적이지 않을지는 모르나, 입장과 가치의 분열이 이룬 진보의 지형자체는 너무나 자유주의적인 형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저는 한국사회에서 진보의 재구성이 하나의 가치나 목적 아래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지 않으며 그런 일이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분열은 대부분의 자유로운 민주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경향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여성주의는 1960년대 뉴레프트들 내부에서 횡횡했던 남성중심주의 운동에 반발해서 폭발한 것이었는데, 최근 통합진보당 사태가 일어난 뒤 진보진영 내에서 이정희 의원 등을 두고 나오는 증언은 우리사회 운동권 내에서도 얼마나 남성중심주의가 극심한지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진보적 여성주의자들이 이런 남성중심적 운동가들과 정치변화를 위해 타협할 수 있다면 그 형태는 특정 목표달성을 위한 "잠정적 협의"(modius vivendi)나 민주적 원칙에 기반을 "중첩적 합의"(overlapping consensus) 정도일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앞서 언급했듯 자유주의자들은 진보적이지 않다 혹은 진보적일 수 없다는 반박은 그럴 수 있으며 논지에 따라서는 타당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반박이 '자유주의자들은 다 똑같은 신자유주의자들이다'는 결론은 일종의 논리 폭력입니다. 저는 우리와 입장이 다르면 다 똑같다는 식의 일부 진보들이 내세우는 주장이야말로 일부 진보 내에 깊숙이 자리한 남성적 근육으로 만들어진 논리의 속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입장의 차이를 지우는 논리와 주장의 기반이 바로 "정치적 자유에 대한 경제적 필요의 우선성"이란 신념의 집착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존 롤스가 <정의론>에서 정의의 원칙에도 사전적 서열이 필요함을 강조하며 "평등한 정치적 자유의 우선성"을 제시했을 때, 그 이유는 경제적 필요라는 수단이 정치적 자유라는 본질적인 목적을 왜곡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확고히 해두기 위해서였습니다. 바로 신자유주의의 왜곡된 얼굴이 바로 이런 목적과 수단의 전도에 있음을 기억해야 하며, 그 누가 제시하는 주장과 논리이든 경제적 필요의 우선성에 지나치게 집착할 때 정치적 입장의 다양성과 차이를 지우는 의도치 않은 결과에 이를 수 있음을 우리 자유주의자들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사회 자유주의자들이 시민사회로 가야하는 이유
: 자유주의의 주체인 개인들이 다양한 가치를 실험할 수 있는 곳
저는 진보의 재구성을 제안하는 글과 자유주의자들에게 보내는 첫 번째 편지에서 우리사회에서 자유주의자들은 시민사회를 활동무대로 삼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사회 맥락에서 제도권정치로 대표되는 국가가 시민사회보다 전통적으로 강했고 여전히 시민사회의 기반이 허약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국가와 시민사회의 관계를 떠나, 시민사회가 자유주의자들에게 더욱 어울리는 무대인 이유는 시민사회야말로 지금껏 강조해 온 정치적 자유에 근거한 가치의 다양성을 실험하고 차이의 인정을 증진시킬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국가를 이끄는 제도권 정치와 행정보다는 각 개인이 가치의 다양성을 창조하는 주체가 되는 것이 더 바람직하며, 서로 비슷한 신념을 공유한 이들이 필요한 단체를 만들거나 시기와 이슈에 맞는 활동을 통해 기존의 가치를 보호하고 새로운 가치를 실험하는 것이 제도권 정치가 주도하는 활동보다 훨씬 위험이 덜하고 다양성 측면에서도 다채로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도권 정치가 이미 같은 신념을 공유하는 집단으로 이루어지고 실제 같은 집단 내의 입장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을 생각해볼 때 자유주의자들이 활동하기 적합한 무대는 역시나 시민사회라는 생각입니다.
원칙적으로도 자유주의적 가치는 언제나 개인에서 출발해 서로 신념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확산되는 것이 바람직한 방향인데, 그 이유는 결국 가치의 다양성의 핵심인 차이의 인정은 개개인이 지닌 신념의 차이에 대한 인정에서 시작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자유주의자들이 추구하는 소수자 집단의 차이의 기반도 고유한 개인성의 차이의 인정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 사회 자유주의자들이 시민사회로 가야하는 이유 하나
: 아래로부터 형성되는 단단한 민주주의의 건설
이런 시민사회를 통해 자유주의적 가치를 실현하자는 제안은 앞으로 우리사회가 만들어갈 민주주의의 문제와도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제도권 정당과 정치지도자들에게 지나치게 의존해 온 우리사회의 민주주의는 사실상 위로부터 내려오는 엘리트들이 만드는 모델과 유사합니다. 실제 많은 정치학자들과 지식인들이 정치는 근본적으로 엘리트들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사회에서 진보적으로 알려져 있는 샤츠슈나이더와 같은 학자조차 민주주의를 텔레비전에 비유하며 소비자들이 텔레비전을 구입하기 위해 텔레비전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일부 뛰어난 우리사회의 학자들이 이런 말을 그대로 인용하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이런 비유는 소비를 목적으로 하는 상품과 그 자체로 목적인 민주정체의 본질을 동일하게 바라본, 그 근본부터 잘못된 비유입니다. 이런 발상에 근거해 심지어는 시민들이 일상의 정치에서 온전한 주권자일 필요가 없으며 정치는 정치가에게 맡겨두고 투표나 열심히 하자고 말합니다. 물론 당연히 투표는 해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이 좋은 민주주의를 만드는지 제대로 모르는 시민들이 좋은 정당이나 좋은 정책에 투표할리는 없을 것입니다. 자질이 빈약한 시민들일수록 좋은 정당과 좋은 정치지도자를 보는 눈도 없을 것임은 자명한 일입니다. 앞서 비판한 샤츠슈나이더의 비유를 굳이 써 본다면, "무엇이 좋은 텔레비전을 만드는 필요한 구성요소이고 불필요한 요소인지 잘 아는 소비자일수록 자신에게 필요한 좋은 텔레비전을 합리적인 가격에 구입할 것이다"는 것입니다(텔레비전을 구입하는 합리성과 대표자를 뽑는 합리성은 전혀 다른 것이라는 점에서 이런 비유는 여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강한 시민사회일수록 자질이 뛰어난 시민들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이런 시민들이 주체가 되어 아래로부터 형성하는 민주주의야말로 그 기반이 단단하다는 점에서, 그리고 나아가 이렇게 형성되는 민주주의야말로 앞으로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바람직하고도 필요한 민주주의의 모델이라는 점에서, 자유주의자들은 제도권 정치가 아니라 시민사회에서 활동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입니다.
정책과 사안에 따라 판단하고 유연하게 연대하는 자유주의 게릴라
저는 이렇게 시민사회에서 아래로부터 단단한 민주주의를 만들어가는 자유주의자들의 시민상을 "자유주의 게릴라"라는 용어로 표현하고자 합니다. 무슨 자유주의자가 '게릴라'라는 좌파 용어를 사용하느냐 광분하는 보수적인 분들이 있다면, 원래 '게릴라'라는 용어의 기원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스페인을 침공했을 때 평범한 사람들이 저항했던 방식을 이르는 말에 있음을 밝혀둡니다.
이 편지에서 "게릴라"라는 용어는 정책, 사안, 필요에 따라 연대하고 활동하고 흩어지고, 다시 새로운 정책과 사안에 따라 연대를 모색하고 활동하고 참여하는 활동방식을 의미합니다. 굳이 특정 정치집단을 지지하는 일에 집착하지 않고, 제안되는 정책과 사안에 따라 지지 여부를 판단하며, 이성적으로 판단할 때 공익에 좀 더 기여하는 정책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찾아 유연한 연대를 모색하자는 의미입니다. 정책, 사안, 필요의 공익기여의 판단 기준은 물론 공유된 민주적 원칙에 얼마나 상응하느냐가 될 것이고, 연대와 지지의 대상에 대한 판단은 진보와 보수를 떠나 얼마나 그 세력이 민주적 원칙을 지지하고 고수해 왔는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자유주의 게릴라들"은 진보와 보수라는 이분법을 버린, 정치적 자유를 향상하는 다양한 가치의 인정에 기반을 두고 (특정 정치세력보다는) 민주적 원칙을 지지하며 활동하는 시민들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사회의 "자유주의 게릴라들"은 우리사회 민주주의 기반의 허약성을 인식하고 항상은 그럴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최대한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부탁드립니다. 실제로 우리사회 일부 자유주의 지식인들은 정치적 무관심도 내 자유라고 말합니다. 당연하고도 마땅한 사실입니다. 정치적 무관심이 개인의 선택이라면 존중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무관심의 자유는 확고히 기반이 잘 닦인 민주주의에서만 보장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불행히도 정부가 민간인과 정치인을 여전히 사찰하는 하는 것이 2012년 한국사회 민주주의의 현주소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정치적 무관심을 부르짖는 것은 무책임한 주장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자신의 자유를 방기하는 것이며 다른 시민들이 자유를 지키기 위해 쏟아 붓는 노력에 무임승차하겠다는 말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2012년 한국사회에서 정치적 무관심은 "내 이웃의 자유가 파괴되어도 내 상관할 바 아니다"는 주장을 넘어 맥락을 무시하고 조금은 느닷없이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렇게 정치에 관심을 갖는 자유주의 게릴라들은 개인의 정치적 자유의 향상과 그 자유의 기반인 경제적 필요의 조건을 향상시키기 위한 합당한 변화를 결코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변화를 추구하는 세력과의 연대에 항상 유연해야 한다고 제안합니다. 이런 유연한 연대를 강조하는 이유는 현재 우리사회에서는 자유주의자들이 추구하는 변화를 자유주의 세력 자체만으로 이룰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진보의 재구성에서 자유주의자들의 자리는 진보라는 이름이 아니라, 누구라도 "정치적 자유와 그 경제적 조건을 향상을 위해 주저하지 않는 변화"를 지지하는 이들과 적극적으로 연대할 수 있는 유연함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앞서 '진보순혈주의'라는 말을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자신들이 진정한 진보주의자라고 여기는 이들이 "너희 자유주의자는 진보가 아니야"라고 주장하고 비판하는 일은 그 자체로는 '진보순혈주의'도 아니고 잘못된 주장도 아니며 오히려 맥락에 따라 타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입장과 비판이 (앞서 본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을 광대들이라고 표현하는 데서 볼 수 있듯) 자신들과 입장이 다른 이들을 경멸하는 태도로 이어지는 것, 그리하여 자신만의 변화방식을 내세우고 자신과 다른 세력과의 연대를 정치적 배신으로 여기는 태도 등은 '진보순혈주의'로 드러나는 심각한 문제이며 우리 자유주의자들은 범하지 말아야할 오류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일부 진보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은 다 배신자들이다'고 주장하며 자유주의자들과의 연대를 반대합니다. 장개석이 상해에서 공산주의자들을 학살했을 때, 그 배경에 '공산주의자들은 다 배신자들이다'는 발상이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배신자라는 말에 담긴 "혐오"와 "증오"로 이루는 변화는 물리적, 언어적, 논리적 폭력과 배타적인 태도로 이어지기 십상입니다. 극단은 펴 놓으며 가장 멀지만 구부리면 서로 맞닿는다는 평범한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현실적으로 우리사회를 들여다보면, 진보의 힘 자체로만 변화를 모색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며, 진보의 정의를 협소하게 하면 할수록 그 가능성은 더 닫힐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진보가 사실상 유일하게 그 가능성의 문을 넓힐 수 있는 자유주의자들과의 연대를 "신념을 버리는 일"로 여기는 이런 유연하지 못한 '순혈주의' 태도는 신념을 지켜냈다는 점에서 자기만족은 할 수 있을지언정 정작 그 신념이 추구하는 어떤 정치적 변화도 이끌어내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현실은 자유주의자들에게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 사회의 현실에서 자유주의 세력만으로 추구하는 변화를 이룰 수는 없습니다. 가치가 다양한 사회일수록 연대는 정치세력 및 지식인들 간에 필수불가결하며, 이런 사회에서 '연대'라는 말은 그 자체로 신념의 차이로 인해 사실상 언제나 결별할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연대라는 말을 쓸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정책, 사안, 필요에 따른 다른 정치세력과의 연대를 자기신념의 배신, 자신이 속한 집단에 대한 배신으로 생각하는 일부 진보진영의 "순혈주의"는 우리 자유주의 게릴라들이 결코 범해서는 안될 오류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국가중심 개발독재 모형인 우리사회의 변화에 가장 필요한 요소가 정치적 자유와 차이의 인정에 기반을 둔 자유주의라고 생각합니다. 자유롭고 민주적인 정체가 정의하는 인간다운 삶은 먹고 사는 경제적 필요에서 결코 끝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국가중심 개발독재 모델에서 나온 천박한 자본주의의 토대는 삶의 목적을 생존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자유롭고 민주적인 정체의 목표는 흔히 말하듯 구성원들을 잘 먹고 잘 살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요즘 유행하는"정의로운 사회"를 거창하게 내세울 필요도 없습니다. "정의로운 국가를 만든다"는 것은 좋은 목표이지만, (정의는 무엇인가를 오랜 시간 동안 연구해온 한 사람의 학자로서) 가치와 입장에 따라 그 해석이 다를 수 있는 "정의"를 서로 다른 정치세력들이 교대하며 제도권 정치를 책임지는 민주정체의 기치로 내세우는 일은 부질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정의를 국가가 주도해서 만들려 할수록 권력을 차지한 세력이 자신의 입맛에 맞게 정의를 재단하려 드는 부작용만 낳을 것입니다.
자유롭고 민주적인 정체의 목표는 '개인들이 정치적으로 자유로운 정체'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이해할 때 '경제적 필요의 달성'은 '정치적 자유'를 이루는 배경요소로서 자연스럽게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자유롭고 민주적인 정체에서 그 어떤 세력도 사실상 그 해석을 크게 달리할 수 없는 정의의 내용이 굳이 있다면 그것은 "정체의 목표로 명확히 헌법에 명시된 구성원들의 정치적 자유를 각 개인들이 최대한 실현할 수 있도록 그 환경과 토대를 보장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이런 일은 민주적 원칙의 실현이라는 명목으로 실천할 수 있는 일이기에 국가나 정부가 굳이 정의실현이란 거창한 명목을 내걸 필요가 없다는 생각입니다.
이런 일을 실천할 때 논란이 되는 문제는 그 환경과 토대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가 될 것이며, 그 범위는 한 사회가 가진 정치문화와 공유된 가치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 자유주의 게릴라들은 시민사회에서 견고한 정치문화를 만드는 데 노력하고 정치적 자유와 그 실현을 위한 경제적 필요가 최대한 실현될 수 있도록 상응하는 가치를 다른 시민들과 유연한 연대를 통해 공유하자"는 것이 제가 이 세 번째 편지에 담아 여러분께 보내는 제안입니다.
정치적 자유의 실현을 위해 분배의 재구성을 위한 상상력이 필요하다
세 번째 편지는 어떠했는지요. 지면이 허락한다면 다음 편지에선 정치적 자유를 실현하기 위한 배경으로서 다양한 분배의 재구성이 왜 필요한지에 대한 이야기 해볼까 합니다. 흔히 진보적 자유주의 분배정책을 재분배(redistribution)의 형태로 이해하고 실제로 그렇게 구성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유주의 분배정책의 핵심은 재분배가 아니라 원초적 분배(original distribution)입니다. 이런 원초적 분배야말로 "노동"에 대한 합당한 보상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적합하며, 이런 발상에 기초를 두는 분배는 구성원들에게 최대한 출발선상의 공정함을 보장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제안을 담아 볼까 합니다.
한국은 날이 무덥다고 들었습니다. 이곳에선 그런 말만 들어도 그리워집니다. 그런 그리움으로 다음 편지도 또박또박 써야겠지요. 우선은 지금 쓰는 이 편지가 제대로 여러분에게 도착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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