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진보당의 당내 선거부정사건으로 인해 진보진영이 패닉 상태에 빠져 있다. 많은 일반시민들과 스스로를 진보라고 믿거나 진보를 지지한다고 믿는 이들은, 이런 문제조차 민주적 절차에 따라 해결하지 못하고 당내 계파 이익 때문에 폭력사태까지 치달으며 무너지는 통합진보당 자체에 실망을 감추지 못하고 있으며 많은 경우 울분을 통하고 있다. 그러나 이럴수록 사태를 이성적으로 바라보고 민주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다행히 통합진보당 내에서 몇몇 인사들이 절차적 민주주의를 따라 사태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보이고 있고, 더불어 통합진보당 안팍에서 이성적으로 이 사태를 해결하자는 목소리와 시도가 번져나가고 있다. 그 예가 바로 "진보시즌 2" 운동이다. 통합진보당을 버리는 대신 이성적이고 상식적인 시민들이 통합진보당에 더욱 참여하여 당을 재구성하고 나아가 진보를 재구성하자는 발상이다. 그러나 시민들이 통합진보당에 더 가입하여 기존의 당권파를 몰아내는 것에서 "진보시즌 2"의 근본적 의미를 둔다면 이는 너무 협소한 발상이라는 데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당장 통합진보당을 바로 세우는 일이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일은 진보를 장기적인 관점에서 생각하며 재구성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에 앞서 우리가 다루어야 할 몇 가지 질문이 있다고 생각된다.
진보는 누구이고, 오늘 우리 사회의 진보는 누구인가?
진보의 재구성을 위해 가장 근본적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진보의 정체성 찾기"다. 애초부터 무엇이 진보의 정체성을 구성하는지도 모르며 진보를 이야기한다는 것이 무리일 것이다. 누가 진보이고 무엇이 진보일까? 필자가 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필자가 이 말에 답할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진보의 정체성에 대한 최소한 합의를 위한 공적담론의 필요성 때문이다. 푸코가 말하듯 민주주의의 경계는 언제나 변하며 변하는 민주주의의 경계에 서 있는 정치적 존재는 그 경계의 변화를 따라 자신의 정체성을 꾸준히 새롭게 규정해 나갈 필요가 있다. 사독재에 대한 저항에서부터 시작된 우리 사회 진보는 우리 사회 자체의 민주주의 경계의 변화로 인해 조금은 모호한 정체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진보주의는 자유주의 좌파인가?
예를 들어 조국 교수는 <진보집권플랜>에서 "진보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주 거칠게 정의하자면, 남북 문제에서는 군축, 평화공존, 평화통일을 지향하고, 경제에서는 자유지상주의, 시장만능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모순을 직시하면서 시장에서 패자를 아우르는 정책을 추구하고, 양심, 사상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위시한 각종 정치적 기본권의 확대, 강화를 지지하는 것이 진보입니다. 계급적으로 보면 진보는 강자나 부자의 편이 아니라 약자나 빈자의 편입니다. 특권을 가진 엘리트의 편이 아니라 보통 사람의 편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정의는 너무 모호하다. 필자는 지난 10년 동안 자유주의자로서 몇권의 책을 쓰는 동안, "각 구성원의 평등한 정치권의 보장과 공동체 전체 구성원의 기본적 삶을 확고히 보장하는 사회적 자원의 분배"라는 기본적 발상 아래 조국 교수가 말하는 내용과 사실상 거의 유사한 주장을 펼쳤다. 그런데 필자는 스스로를 진보라고 규정해 본 적이 없다. 실제로도 많은 진보주의자들이 자유주의와 거리를 둔다. 내가 아는 지식 내에서 볼 때, 조국 교수의 진보규정은 결코 자유주의 좌파의 틀을 넘어서지 않는다. 존경하는 선배 학자에게 이런 말을 던지는 것이 대단히 조심스럽지만, 적어도 자유주의자의 눈에 비친 조국 교수의 진보는 자유주의의 일부며 그 틀에서 한발짝도 나가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다(조국 교수님이 동의하지 않는다면 죄송하다. 단지 필자 개인의 견해일 뿐이다).
아쉽게도 현실을 보면 너무나 자유주의적이면서 스스로를 진보가 아닌 좌파라고까지 규정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만약 이런 진보주의자들이 자유주의와 거리를 두면서도 조국 교수의 입장을 진보라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자기모순일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진보주의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결여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진보는 도덕주의인가?
한편 우리 진보진영 내에는 도덕주의자들을 진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좀더 직선적으로 말하자면 진보는 도덕적이어야 한다고 믿고 실제 많은 진보들이 도덕성에 집착한다.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고 볼 수는 없지만 정치적 원칙에 대한 고수는 도덕적 원칙에 대한 고수와 다른 문제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의 기득권보수진영에 만연해 있는 부패의 문제 때문인지 도덕성은 한국사회 진보에서 큰 이슈다. 그러나 원칙적 차원에서 보자면 도덕은 진보를 규정할 수 있는 요소가 아니다. 필자가 아는 한 도덕에는 보수와 진보를 구별시켜줄 근본적인 연결고리가 없다. 부도덕해서 보수나 우파가 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보수와 우파에도 도덕적인 사람들은 있다. 그럼 보수와 우파의 도덕적인 사람들은 진보인가? 현실적으로 보자면, 도덕성으로 진보를 규정할수록 정치세계에서 진보가 져야하는 부담만 늘어날 뿐이다. 도덕적 부패는 진보든 아니든 견제되지 않는 모든 정치세력 내에서 자라난다. 통합진보당 내 견제세력이 없던 당권파들의 행태가 이를 증명한다. 이 말은 진보가 도덕성에 관심을 두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도덕성이 진보의 독특한 정체성을 규정하는 핵심요소도 아닐 뿐더러 그럴 필요도 없다는 뜻이다.
종북세력이 진보일 수 있는가?
우리 사회에서 진보를 이야기하며 가장 혼란스런 부분은 통합진보당 내에서 주사파들을 진보로 볼 수 있는가의 문제다. 우리 사회의 독특한 맥락에서 형성된 통일문제와 강제적 자본주의의 노동문제가 운동의 주제로 대립하고 얽히며 생겨난 이 문제는 풀기 어렵지만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다. 무엇이 우리 사회의 진보가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주제가 되어야 하는가? 통일은 장기적으로 우리사회가 반드시 풀어나가야할 숙제 중의 하나이지만, 통일문제는 더 이상 우리의 힘만으로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불행하게도 미국, 러시아, 중국, 일본 등의 이해관계가 동시에 얽혀 있는 통일문제는, 이 분야의 전문가라면 누구나 더 이상 우리 힘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통일의 문제 자체가 진보의 정체성 규정을 어렵게 하는 요소는 아니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진보세력 내에 있는 종북세력의 존재다. 얼마전 이정희 민노당 전대표 남편인 심재환 씨의 인터뷰를 읽으며 주사파를 진보의 일부인 양 언급하는 부분을 보았다. 필자는 원칙적으로나 논리적으로 "주사파라는 사상이 진보일 수 있다면, 고양이가 말이나 소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현실만 놓고 본다면 이제 주사파는 맑스-레닌주의의 한 분파로 보기에도 적절하지 않다. 주사파는 그냥 주사파다. 주민들에게 대표자의 자발적 선택권조차 사실상 없는 정체의 근간이 되는 사상을 신봉하며 자신을 진보적 민주주의자라 규정하는 것은 앞서 말했듯이 고양이가 자신을 말이나 소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시민들에 의한 정치지도자의 지속적 순환은 민주주의에서 핵심적 요소다. 이런 기본적 원칙조차 무시하는 모순적인 세력이 진보의 한 축으로 자리잡는다면 진보의 민주적 정체성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장기적으로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원칙적으로도 현실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뜻이다.
사민주의가 진보가 합의하는 정체성인가?
사실 우리 사회의 진보는 그 분파나 세력이 수없이 다르게 갈라져 있다. 흔히 많은 사람들이 농담처럼 진보지식인들은 지향점의 분열로 망한다고 말한다. 실제 노동, 환경, 여성과 같이 지식인들이 세부적으로 지향하고 달성하려는 목적자체가 다르고, 같은 목적을 두고도 달성하려는 방식 자체가 다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목적 자체를 이루기 위해 가장 기본적인 사회기본구조가 어떤 것이 되어야 하는 것에는 자신들이 진보라고 믿는 세력이 최소한의 합의를 둘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최소한의 합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필자가 말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며 공적 담론을 통해 공유해야 할 내용일 것이다.
다만 현실을 살펴보면 많은 진보주의자들이 사민주의를 지향하는 듯 보인다. 사실 필자가 지지하는 자유주의는 사민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러나 슈클라가 말하듯 "인간에게 잔인한 짓을 싫어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자유주의자라 규정할 수 있다면, 사민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을 수 있다. 정치적 권리의 평등함에 있어 차별을 두지 않고 인간다운 삶의 질을 함께 누리는 사회기본구조의 설립을 목표로 하여 사민주의가 진행된다면, 많은 자유주의자들이 이에 동조할 것이기 분명하다. 한차례 언급했듯 필자의 눈에는 (필자를 포함하여) 조국 교수가 가장 대표적인 예다. 조국 교수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은 현실을 보면, 사민주의는 자유주의자들의 지지를 얻어낼 확률이 높다. 이 경우 근본적으로 자유주의자들과 사민주의자들의 연대를 진보세력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진보세력으로서 사민주의자들이 자유주의자들과 연대하는 것인지는 사회적 담론을 통해 풀어갈 사안이라 생각한다.
비판을 넘어 변화의 틀을 제공하는 진보가 필요하다
필자에게 우리 사회에서 진보가 누구인지, 누구여야 하는지에 대한 답은 없다. 우리 사회 진보주의자들의 근본적인 목표가 사민주의의 형성인 듯 보인다는 견해는 필자의 개인적 관찰에서 나온 소견일 뿐이다. 근본적으로 이 글이 바라는 바는 진보 진영 내에 이런 진보가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의 공적담론이 필요하며, 이런 담론을 통해 진보가 지향하는 구체적인 사회기본구조의 틀을 짜는 작업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동안 진보는 비판에만 익숙한 세력으로 인식되어 왔다. 물론 진보진영 내부에 진보의 틀을 형성하기 위해 노력해 온 많은 분들이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대외적으로 이런 진보의 노력이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은 문제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진보와 보수를 구별하는 근본적인 차별점은 도덕성의 차이나 인간에 대한 사랑과 같은 가치들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확고한 정치 및 사회 정책으로 드러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반시민들이 가치를 일일이 찾아 구분하는 일은 어렵지만, 피부에 와 닿는 차별적인 정책의 차이를 통해 설득하는 일은 상대적으로 쉽기 때문이다.
진보는 권력의 장악보다 시민 자체의 역량 강화를 지향해야 한다
한편으로 작금의 통합진보당 사태는 진보가 지향해야할 집중해야 할 정치적 대상이 무엇 혹은 누구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통합진보당은 근본적으로 진보가 권력장악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일어난 일이었다. 오로지 권력장악 때문에 서로 다른 연합할 수 없는 세개의 세력이 하나의 당에 묶이고 그 사이의 알력관계가 결국은 진보정치의 위기까지 몰고 온 것이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미래의 진보는 권력장악 그 자체보다는 시민들의 역량 강화에 중점을 두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보인다. 누가 권력을 차지하더라도 그 권력을 시민들 스스로 견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출 수 있도록 시민사회 자체의 역량을 강화하는 데 방점을 찍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생각이다. 어떤 이들은 권력을 장악해야 사회구조가 급속히 바뀔 수 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야를 가리지 않는 한국정당의 보수적 기원과 그 보수적 성향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진보정당의 형성을 통해 권력을 잡는 일은 시민사회의 역량을 서서히 강화시켜 사회구조를 전환시키는 것만큼이나 오래 걸릴 듯 보인다. 오히려 로버트 퍼트남이 강조하듯 건강한 "사회적 자본," 다시 말해 강한 시민사회가 좋은 정치를 만든다는 논리를 생각해본다면, 진보가 변화를 위해 집중해야 할 대상은 정당권력 강화가 아니라 시민자체의 역량 강화여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아무쪼록 이글이 진보의 정체성이나 진보가 지향해야 할 틀 혹은 대상 대한 논쟁에 조그만 도움이라도 되길 바라는 맘이다. 이런 담론을 볼 수 있다면, 여기에 쓴 모든 글이 잘못되었다는 날선 비판조차도 환영한다. 자유주의자가 진보의 정체성에 왜 잔소리냐고 핀잔을 주어도 좋다. 건강한 진보와 연대를 원하는 한 자유주의자의 문제제기 정도로 관대히 여겨 주었으면 한다. 진보의 정체성에 대한 많은 담론이 이미 있었다면, 그 담론을 미처 다 따라잡지 못한 한 자유주의자의 게으름을 이해하고 다시 한 번 친절히 그 내용이 무엇인지 알려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 친절함이 새로운 진보를 형성하자는 이 즈음 진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좋은 환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지만, 자유주의자의 딴지걸기라기보단 건강한 진보와의 연대를 원하는 바람이라고 이해해 주었으면 한다.
김만권은 <자유주의에 관한 짧은 에세이들>, <불평등의 패러독스>, <참여의 희망> 등을 썼으며 <민주주의는 거리에 있다>, <만민법> 등을 번역했다. 현재는 뉴욕 뉴스쿨 정치학과 박사과정에 있다. 뉴욕주립대 FIT에 출강하고 있으며 경희사이버대학교에서 <현대정의의 이해>를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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