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께 이제야 두 번째 편지를 씁니다. 첫 편지는 어땠었는지요? 어떤 분들은 우리사회 어디에 자유주의자들이 있다고 이런 편지를 쓰느냐고 핀잔을 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을 뿐 그 무엇보다 개인의 존엄과 개별성이 평등하게 존중받는 정치공동체를 만들고자 하는 분들이 우리 사회에도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또한 이런 분들이 같은 의도를 가진 이들과 연대하고자 하는 의사를 분명히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또다시 즐거운 맘으로 힘을 내어 또박또박 편지를 씁니다.
첫 편지에서는 '자유'를 '시장' 및 '반공'과 동일시하는 우리 사회의 보수기득권 자유주의자들과 그 때문에 '자유(주의)'를 버리고자 하는 진보 진영 모두가 외면한, 현실적으로는 익숙하면서도 원칙적으로는 너무 낯선 우리 사회의 자유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정체성의 혼란을 두고 남 탓만을 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아기들이 스스로 두발로 일어서고 걷듯, 진정한 자유주의를 원하는 우리도 스스로를 명확히 하여 정체성을 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존의 보수와 진보의 인식 틀을 넘어서는 본연의 자유주의를 강조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첫 편지에서 저는 대한민국의 자유주의자들이 다른 신념을 가진 이들과 협력하는 토대로서 민주적 원칙에 근거해 활동하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건 협력의 토대이지 자유주의 그 자체의 내용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자유주의자들 본연의 정체성, 더 근본적으로 우리 사회 자유주의자들의 정체성은 무엇이어야 할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대한민국의 자유주의자들이 공유했으면 하는 가치, "디센트"(를 할 수 있는 용기)
제게 만약 우리 사회에서 자유주의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가치가 무엇이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저는 주저 없이 디센트(Dissent), 다른 견해에 대한 존중과 옹호라고 답하고 싶습니다('다른 견해'라는 말 자체가 앞으로 설명할 디센트의 의미를 충실히 전달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다른 언어 속에 존재감 없이 파묻히는 느낌이 들어 '디센트'란 용어를 그대로 씁니다). 우리 사회의 정치 기득권 보수세력이 지향하는 반공주의와 경제 기득권 보수세력이 지향하는 신자유주의의 공통점을 들어보라고 한다면 다른 목소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정치 및 경제 기득권에 반대하는 모든 목소리는 아무런 차별도 없이 모두 빨갱이의 주장으로 전락하는 일이 여전히 허다하게 일어납니다. 그러나 한나 아렌트가 말하듯,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정치적 존재로 빛날 수 있는 이유는 우리 안의 개인들이 자기들만의 의사와 견해를 지니고 그 의사를 공적이 장에서 밝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다른 목소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정치는 그 순간 끝이 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한 민주 정체가 순조롭게 운영될 수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합의에 있습니다. 어느 사회도 구성원들의 합의 없이 운영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합의는 어떤 정책이나 가치에 대한 자발적인 동의를 전제로 합니다. 만약 정책이나 가치에 대한 동의가 조건 없이 지속적으로 강요된다면 우리는 이런 상황을 복종 혹은 지배라 불러야 합니다. 자유주의자들은 이런 조건 없는 지속적인 복종과 지배에 맞서 저항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유주의자들은 이런 저항의 공간을 사회 내 일방적이거나 지배적 이익과 권력에 맞서 다른 입장과 견해를 내놓는 적극적인 행위, 바로 "디센트"를 통해 열어갑니다. 실제 잘 운영되고 있는 대다수의 민주정체는 "다른 의견을 지니고 제시할 수 있는 권리"를 합의된 민주적 원칙으로 정해 놓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헌법적 체계 내에서 방어하고 있는데 이는 민주사회의 자유주의자들이 끊임없이 노력하여 성취해 놓은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를 보면, 조건 없는 복종과 지배에 맞서 디센트를 통해 저항하는 일은 무척이나 험난해 보입니다. 지배적 입장과 다른 목소리를 이단아들의 목소리로 취급되는 경향이 있는데다, 보수기득권의 이해와 이를 대변하는 기득권 세력에 대한 비판의 입장 모두가 "빨갱이"로 취급되는 경향이 강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개인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복지정책을 지지하는 자유주의자들마저 "빨갱이"로 매도되기도 하는 기형적인 현실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유주의자들이라면, 어떤 사안을 두고 지배적 견해에 맞서 디센트가 제기될 때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견해가 이성적이고 민주적인 토대에 근거하고 있다면 이를 존중하고 옹호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권력을 쥔 자들이 집단전체의 이익을 내세워 자신들의 이익을 사회구성원들에게 강요할 때, 이에 맞서 합당한 다른 견해를 제시하고 이를 방어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저는 스스로 옳음을 따져 디센트를 통해 자기입장을 취할 수 있는 바로 이 용기야말로 우리 사회자유주의자들이 지녀야 할 이성적 행위의 기반이 되어야 봅니다. 무엇보다 개인의 자유가 공동체의 자유를 위해서란 명목으로 유린당해 왔고, 개인의 견해가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란 변명으로 무시되어 온 우리 사회에서, 자유주의자들은 정치가 공공의 장에서 개별성을 존중하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제시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개별성이 개인들의 디센트로 드러날 때 이를 존중하고 지지하며, 때로 자기 스스로도 적극적으로 디센트를 할 수 있는 용기를 지녀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회 내에서 디센트를 하는 사람들을 두고 정치공동체에 대한 충성심이 없다고 몰아붙이며 애국심을 강조합니다. 만약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 대한 애정이 애국심이라면 저는 이런 애국심 자체를 거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이먼 켈리가 "어떤 이에게 애국주의는 자기 국가의 정책을 굽힘없이 지지하는 것을 말하고, 어떤 이에게 최상 형태의 애국주의는 그 정책에 이견을 제시하는 것이다"고 말하듯 공동체에 대한 애정은 다른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고 봅니다. 전체이익이 개인의 존엄을 자주 압도하는 우리 사회에서 자유주의자들이 진정 공동체를 사랑하는 방식은 맹목적으로 국가의 정책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정책의 올바름을 따져 개인의 존엄과 개별성을 지키는 방향으로 이견을 제시하는 쪽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행동할 수 있다면, 이견은 이유 없는 반항이 아니라 이유 있는 이성적인 저항이 되고, 공동체에 대한 반목이 아니라 이성적인 애정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사회 자유주의자들의 이성적 토대 : 자유주의를 자신을 위한 배려로 이해하는 합리성
앞서 강조한 "디센트"와 더불어 우리 사회 자유주의자들이 이성적 사고와 행위의 토대로 삼았으면 하는 내용은 '자유주의를 자신을 위한 배려로 이해하는 합리성'입니다. 이런 합리성은 현재 우리 사회에서 자유주의자들로 자처하고 있는 보수 기득권세력과의 확고한 구분점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실제 우리나라의 보수 기득권세력은 시장에서는 신자유주의를, 정치에서는 애국주의와 결탁한 반공주의를 기반으로 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양자 사이에는 서로 타협할 수 없는 간극이 있습니다. '시장에서 철저하게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인간들이 어떻게 정치에선 갑자기 자기를 희생하면서 공동체의 자유를 방어할 수 있는가'라는 논리적 괴리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철저하게 국가를 일종의 강력한 보험회사와 같은 보호기구로 생각합니다. 보험을 내는 이들 중 얼마나 많은 이들이 보험회사 자체에 대한 신실한 믿음을 지니고 있을까요? 만약 보험회사가 보험을 든 사람들에게 필요 이상의 희생을 강요한다면 아무도 보험에 들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 사회에서 드러나는 자유주의자들의 모순은, 마르크스가 당대의 부르주아들을 바라보며 "어떻게 시장에서 극단적으로 이기적인 사람들이 정치에선 타자를 배려하는 공적인 인간으로 급히 그 정체성을 바꿀 수 있는가"라고 지적한 모순과 맞닿아 있는데, 이런 일반적인 모순이 반공주의와 맞물려 더 극단적으로 드러난 형태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시장에서 타자와의 경쟁에서 승리하는 일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으면서도 정치에서는 공동체를 위해 희생하고 애국하는 인간으로 살아가자는 우리 사회의 보수 기득권 자유주의의 정체성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지킬과 하이드'라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지식 내에선, 개인의 극단적 이익추구가 첫 번째 미덕인 시장과 집단전체 이익이 가장 우선인 정치가 함께 움직이는 이런 '지킬과 하이드' 식 자유주의는 경제와 정치를 움직이는 자들 간의 이익 일치 외에는 논리적으로 그 결합점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돈과 권력의 결탁, 맘몬과 크라토스의 결탁만이 이런 '지킬과 하이드'의 이중성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이죠.
이런 보수 기득권의 '지킬과 하이드'식 자유주의에 맞서 우리사회의 성숙한 자유주의자들은, 자유주의를 자기 자신에 대한 배려로 이해하는 합리성을 지녀야 합니다. 비록 시장에서 실패했다 하더라고 개개인의 삶의 안정성을 보장할 수 있는 공정한 사회체계를 지지하는 일이 자신을 위한 배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른 구성원들 역시 똑같이 이런 배려를 누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배려를 실현시키기 위해 공적인 삶에도 관심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시장에서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는 자신을 위한 배려가 공공사에서 자신에 대한 배려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이성적 기반이 되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개인의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하는 적절한 최저임금제의 보장과 지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정규직 전환의 적극적 지지 등이 이에 해당하는 구체적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대한민국 자유주의자들의 감성적 토대 : 독재라는 공포로부터의 자유
이렇듯 자유주의를 자신을 배려하는 합리성으로 이해하는 일이 자유주의자들의 이성적 토대라면, 저는 자유주의주의자들이 공통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감성적 토대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런 감성적 토대가 정치적 삶에서 보다 즉각적인 호소와 보다 광범위한 연대를 여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쥬디스 슈클라는 "잔혹함(cruelty)에 대한 혐오"를 자유주의 권리의 토대라고 설명했습니다. 아주 쉽게 말하자면,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일을 싫어한다면 그 사람은 누구나 자유주의자란 정체성을 지닐 수 있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자유주의자들의 토대로 잔혹함을 유발하는 "공포로부터의 자유"를 내세웠습니다.
슈클라는 "체계화된 잔혹함에 대한 공포는 아주 보편적이어서, 그 금지에 대한 도덕적 요청은 즉각적인 호소력이 있으며 많은 논증이 없이도 충분히 승인될 수 있기 때문"에 잔혹함이야말로 자유주의가 보편적 공감을 얻는데 유용한 토대가 될 것이라 봅니다. 이성적 토대가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논증을 필요로 한다면, 이런 잔혹함에 대한 경멸과 이런 공포로부터의 자유는 많은 논증 없이도 즉각적으로 사람들이 연대할 수 있는 토대가 된다는 의미이지요.
실상 슈클라가 말하는 잔혹함, 잔인한 짓의 실체는 의도적으로 가해지는 모든 폭력을 의미합니다. 슈클라는, 한 사회가 가치의 다양성과 타인의 자유를 허락하고 지지해야 하는 까닭은 체계적으로 가해지는 이런 억압이 일으키는 여러 잔혹한 일들을 피하기 위해서이며, 사회에서 늘 소수자의 위치에 놓은 이들 사람들도 이런 자유주의라면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모두 공유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이런 발상을 우리 사회에 적용시킨다면,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공포는 독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에 지금도 팽배한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향수는 경제적 위기 속에서 정치적 자유에 대한 소중함은 잊은 채 오로지 번영과 생존에만 매달린 우리사회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그대로 드러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향수는 언제든 또 다른 형태의 독재와 억압으로 이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번 정권에서 의도적으로 가해진 정치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는 사찰이 바로 이런 체계화된 잔혹함이 독재의 공포로 또다시 반복된 예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반민주적 행위를 응징하지 못하는 우리 사회 현실은 이런 독재의 공포가 실현될 가능성을 여전히 남깁니다. 한편, 이런 독재의 공포는 사회적으로도 저개발지역에서 용산 참사와 같은 또 다른 잔혹한 형태로 지속적으로 재생산되고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저는 우리 사회의 자유주의자들의 감성적 토대가 '독재라는 공포로부터 자유'가 되어야 한다고 제안합니다.
저는 이런 잔혹함을 혐오하고 독재의 공포를 경계하는 일이 우리 자유주의자들 간의 연대를 자연스럽게 형성시킬 것이라 믿습니다. 하지만 이런 독재의 공포로부터의 자유를 위한 연대의 시작은 감성일지 모르나, 그 활동의 토대는 이성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는 점은 기억해 두어야 합니다. 지나친 공포는 무조건적인 거부와 혐오로 귀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까닭에 독재에 대한 공포로부터의 자유를 실현하는 방식은 평화, 관용, 배려를 지향하는 이성적 활동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번 편지는 어땠는지요? 좀 더 다정한 편지를 쓰지 못해 속상하지만, 디센트를 할 수 있는 용기, 자유주의를 자신을 위한 배려로 이해하는 합리성, 모든 형태의 독재에 대한 공포로부터의 자유를 우리 사회 자유주의자들이 공유했으면 하는 토대로 제시했습니다. 이런 토대는 시장과 반공이란 "지킬과 하이드"식의 모순적인 보수 기득권 자유주의와 우리가 지향해야 할 자유주의의 구분점이 되어줄 뿐만 아니라, 우리 역사의 일그러진 독재의 유산에서 자유로워지는 길을 열어줄 것입니다.
결국 이 긴 편지에서도 우리 사회 자유주의자들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기 위해 공유해야 할 이성 및 감성적 토대에 관한 이야기만 했을 뿐, 정작 어떻게 구체적으로 활동하자는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한 듯합니다. 그 이야기를 담아 다음 편지를 쓸 수 있을까요? 어쨌든 여기 두 번째 편지를 설레는 맘으로 띄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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