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 수천억 받은 사람도 멀쩡하게 살아 정치를 하는데, 4000만 원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하다니…."
지인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노회찬 의원의 죽음에 대한 이런저런 세간의 혼란스러운 추측을 전하고 의견을 물었다. 솔직히 그 자리가 견디기 힘들 만큼 불편했다.
물론, 사람들의 이런 혼란은 신뢰하던 정치인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의 표현이리라.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스스로 명쾌하게 납득되지 않는 정치적 현실에 대한 정당한 의문이기도 할 터다.
나는 오랫동안 정치인 노회찬과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고 살아왔다. 보통사람들보다는 그를 더 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지난 한 주, 나는 무엇이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는지, 그는 왜 그런 극단적 선택을 해야만 했는지 생각했다. 그의 죽음은 나 역시 감당하고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 의원의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질문, 혼란에 마땅한 대답과 설명을 제시하고, 더 나아가야 하는 것은 남겨진 자들의 몫이다. 이것은 애도 이상의 일이다. 정치인의 자살로 상징된 우리 정치와 진보 정치의 현실을 마주 대하는 일이다. 고통스럽고 힘들지만 피할 수 없는 책임이다.
제도의 문제 : '돈 안 쓰는 깨끗한 정치'라는 신화
발단은 노 의원이 동창에게 받았다는 신고되지 않는 정치자금 문제였다. '정치자금=부패의 원천'이라는 불신을 제도화한 현행 정치관계법, '제도의 문제'는 제대로 따져져야 할 것이다.
정치자금의 출구와 입구를 모두 가로막는 현행 정치관계법은 '돈 없이 일할 것'을 강요한다. 그 결과는 정치인에게 정치적 무능자 이거나 잠재적 위법자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제한다.
지구당을 폐지하고, 노동조합과 같은 단체․법인 등의 정치기부를 금지하는 현행 정치관계법은 압도적으로 높게 배분되는 국고보조금이나 개인의 자산, 인맥을 통해 쉽게 자원을 조달할 수 있는 기존 거대 정당보다 이런 자원을 동원하기 어려운 진보정당 등 제3정당들에게 더 치명적이다.
정치에서 돈은 윤리 이상의 문제이다. 정치자금은 권력이 어디에 놓여 있으며 누가 그것을 쥐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강력한 척도이다. 정치자금은 한 사회의 소득과 부의 분배를 결정하는 중요한 힘들 중 하나다. 정치적 싸움을 위한 조직화, 선전, 연구․조사 등도 역시 돈이 있어야 한다. 정치는 돈만으로 하는 것은 아니지만, 돈 없이는 할 수 없다.
주로 가난한 시민들의 기부를 통해 재원을 확보해야 하는 진보정당은 다른 정당보다 더 많은 노력과 조직, 그리고 적극적 행동이 요구된다. 그러나 현행 정치관계법은 정당활동을 체계적으로 제약함으로써 정치인과 시민의 조직적 관계를 차단한다.
이런 반정치적 정치관계법을 주조한 우리 사회의 지배적 정치담론은 '돈 안 쓰는 깨끗한 정치'이다. 진보-보수할 것 없이 한 목소리로 주창해 온 '깨끗한 정치론'이 과연 정치를 좋게 만들었을까? 소수 거대정당이 의제와 정치자금 대부분을 독점한 현실은 '돈 안 쓰는 깨끗한 정치'라는 신화가 만들어낸 결과이다. 부유한 개인의 돈이 정치 전반을 지배하는 것을 뒷받침하는 현행 정치관계법은 시민의 자발적 결사에 기초한 조직적 원리라는 민주주의에 부합하지 않는다.
정치의 문제 : "한 방에 보내버리겠다"
"심상정, 김종대, 노회찬을 한 방에 보내버리겠다."
드루킹이 지난해 썼다는 트위터 글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대관절 저들이 무엇이건대, 시민의 대표들을 '한 방에 보내버리겠다'고 할 수 있는가. 분노를 느껴야 마땅하지만, 분노에 앞선 것은 두려움이었다. 정치인을 한방에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일은 우리 사회에서 더 이상 예외적인 일이 아니다. 정치인을 비롯해 우리 사회의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여론의 폭포에 휩쓸려 그 실체적 진실을 따져 볼 절차나 기회도 갖기 전에 심판대에 던져지고, 치유하기 어려운 타격을 받고 사라지는 것은 이제 다반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오도된 여론이 횡행하는 인터넷 공론장, 이런 여론을 자극하고 편승하는 미디어, 마녀사냥이 일상화된 청와대 게시판, 대의정치를 폄훼하고 직접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여론 동원 정치를 공식화하는 대통령과 그 추종자들, 적폐청산이란 이름으로 더욱 심화되는 적대적 정치 양극화….
한 정치인의 비극적 죽음을 통해 떠오르는 또 하나의 생각은 최근 들어 심화되는 시민의 대표인 정치인과 정당, 그리고 이들에 의해 작동하는 대의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불신과 혐오의 증대이다.
만약 노회찬 의원이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노회찬 의원의 죽음에 대한 반사실적 가정은 극단적 여론정치에 휘청대는 현실을 보다 뚜렷하게 확인시켜 준다. 과격하게 동원된 여론이 그를 향했으리라는 것은 쉽게 예상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실질적 내용이 무엇인지, 감안해야 할 사정은 무엇인지, 그가 평생을 통해 추구해왔던 이상과 그가 힘겹게 쌓아온 정치적 성과가 무엇인지는 누구도 묻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다. 앞뒤 가리지 않는 신념의 열정, 끊임없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탐욕 등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비극적 운명으로부터 인간 스스로 발견해 낸 것이 정치이다.
정치는 갈등을 만들고 동원하면서도 동시에 생각과 이해가 다른 사람들과 서로 타협하고 조화를 이뤄야 하는 모순적 역할을 부여받았다. '한방'을 지향하는 감정이 아니라 절차와 과정을 통해 문제를 실체적으로 다루는 정치적 이성을 요구받는다. 정치는 불완전한 인간의 딜레마를 다룸으로써 공동체의 안전과 안정을 보장한다. 어떤 종교도, 윤리도, 법도 대신할 수 없는 일이다.
자극적인 것만을 추구하는 댓글과 미디어 위에서, 그리고 이를 추종하는 정치 안에서 좋은 정치와 민주주의는 자라날 수 없다. 정치가 혐오와 불신의 대상이 되고, 걸러짐 없는 인간의 욕망이 '직접 정치'라는 이름으로 동원되는 세계는 민주적 세계가 아니라 약육강식과 목소리 큰 자들이 지배하는 참혹한 세계일 뿐이다.
반정치주의에 단호하게 맞서야 한다
시민들이 원하는 것은 정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정치가 시민들의 실체적 이익을 제대로 다루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가 선과 악,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과 같은 윤리적 대립이 주가 되고, 이를 빌미로 한 여론 동원에 함몰되면, 더 나은 길을 찾고자 하는 정당과 정치인의 역할과 사회적 존중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정당과 정치의 역할을 줄이고자 하는 이런 반정치주의가 비단 경제적 효율성이란 단 하나의 기준으로 무장한 신자유주의자들, 재벌, 보수들에 의해서만 조장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시민사회운동, 이른바 '386 정치'로 대변되는 공허한 운동정치, 그리고 진보정치 역시 이러한 도덕적 선민의식에 기댄 반정치주의를 주창하고 적극적으로 편승해 왔다.
20년 전 진보정치는 기존 정치에 도전하기 위한 수단으로 도덕을 무기로 한 정치관을 수용했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오늘까지 도덕정치는 진보정치를 상징하는 하나의 징표가 되고 있다. 반정치주의의 덫이 조여 오는 순간에도 노회찬 의원과 진보정치가 부여잡고 있었던 것 역시 도덕적 정치 의제였음은 불편하지만 사실이다.
나는 진보정치가 이번 일로 도덕정치로 후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진보정치도 정치이고, 진보정치 역시 민주주의의 틀 내에서 성과를 내야 한다.
스스로를 해치는 정치관에서 벗어나 가난한 다수 시민의 실질적 문제를 다루고 그들의 의지를 제대로 모아, 돈도 잘 받고 잘 쓰는 현실적 정치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은 진보정치가 보다 맹렬하게 민주정치를 위협하는 반정치주의에 맞서는 길이 될 것이다. 나는 이것이 노회찬 의원의 유지를 잇는 민주적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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