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고 있던 국민의힘 장제원 전 의원의 사망 소식이 1일 전해진 가운데, 여권 인사들 사이에서 고인을 동정하는 취지의 발언이 다수 나왔다. 성폭력 피해 사실을 호소한 비서 A씨에 대한 2차 가해성 발언도 일부 나왔다.
당 대표인 권영세 비상대책위원장은 일단 중립적 태도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다. 권 비대위원장은 이날 오전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운명을 달리하셨으니 명복을 빈다는 말씀을 드린다"며 "그 외에 결정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빈소를) 가느냐 마느냐 궁금해하시던데,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만 했다.
그러나 권성동 원내대표는 기자들과 만나 "안타까운 죽음에 대해서 마음 아프게 생각한다. 국회 일정을 좀 감안해봐야 하는데, 가능하면 조문하러 갈 생각"이라고 동정적 태도를 보였다.
당 소속 김희정 의원은 불교방송(BBS) 라디오 인터뷰에서 "가짜뉴스였으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뉴스를 봤다"며 "이런저런 추측성 말로 고인의 명예를 훼손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하태경 전 의원은 페이스북을 통해 "이미 죽음으로 그 업보를 감당했기에 누군가는 정치인 장제원에 대한 정당한 평가와 추모를 해줘야 한다"고 주장하며 "제가 경험하고 기억하는 장제원은 재능 있고 의리 있는 정치인이다. 몇 번의 정치적 위기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정면 돌파하는 결단력 있는 정치인"이라고 추모했다. 피해자에 대한 사과와 그의 용서가 아니라 죽음으로 '업보를 감당'했다는 주장이 눈에 띄었다.
김성태 전 의원도 라디오 인터뷰에서 "누구보다도 고인의 성품을 잘 안다. 좀 여리다"라며 "일련의 성폭행 사건과 관련해서 정말 참기 어려운 고통이었을지도 모른다"고 하거나 "언론사의 선정적 보도"를 탓하는 등 2차 가해에 가까운 발언을 했다.
김 전 의원은 "고인이 살았으면 보수 정치권에서는 크게 할 역할이 있었다"며 "본인도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다음에 여건이 주어진다면 분열된 보수를 통합하기 위한, 나름 자신이 심부름꾼 역할을 할 수 있지 않겠냐는 여러 가지 각오도 있었는데 정말 안타깝다"고 했다.
유명 범죄심리학자 출신인 이수정 국민의힘 수원정 당협위원장은 이날 소셜미디어에 "이런 해결방법밖에 없다니, 진심 안타깝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면서 다만 "피해자의 안전도 꼭 도모해 달라"는 언급을 덧붙인 글을 올렸다. 여당에서 장 전 의원 사망 이후 성폭력 피해자의 존재를 구체적으로 언급한 이는 이 위원장이 유일하다시피 했다.
야권에서는 9년 만에 어렵게 피해 사실을 밝히고도 장 전 의원의 사망에 진상규명은커녕 제대로 된 신변보호조차 받지 못하고 있는 A씨와 적극적으로 연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원외 진보정당을 중심으로 나왔다. A씨 측은 당초 이날 오전 기자회견을 열어 장 전 의원 고소 경위 등을 설명할 예정이었으나, 사망 보도가 나온 뒤 기자회견을 취소했다.
정의당은 "피해자는 사건 이후 가해자의 권력에 대한 두려움으로 침묵했지만, 긴 시간 동안 겪은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진실을 밝히기로 용기를 냈다고 밝혔다. 하지만 장 전 의원은 자살로 회피했다"며 "피해자가 9년 만에 낸 용기는 가해자의 죽음으로 인해 진실을 밝히기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우리가 이미 숱하게 겪었던 2차 가해도 예상된다"고 우려했다.
정의당은 "성폭력은 범죄이며, 우월적 지위와 위력에 의한 성폭력은 더욱 심각한 범죄"라며 "고인의 진영이나 심지어는 죽음조차도 가해자의 잘못과 피해자의 피해를 덮을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많은 이들이 가장 먼저 우려한 것은 피해자의 안전이었다"며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피해자의 회복과 치유이다. 피해자와 연대하며 치유와 회복을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녹색당도 "어떤 자살은 가해였다. 아주 최종적인 형태의 가해"라는 소설 문구를 인용하며 "가해자의 죽음은 면죄부가 될 수 없다. 공소권 없음으로 사건이 종결돼 그 억울함이 오롯이 피해자가 감당할 몫이 되지 않도록, 2차 가해에 고통받지 않도록 피해자 곁에 서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들은 "(피해자의) 일상의 회복과 상처의 치유를 간절히 바란다"며 "피해자에게 진실과 정의가 실현되는 세상, 권력형 성폭력 없는 세상을 위해 함께 싸우겠다"고 다짐했다.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된 정치인이 사망한 이후 그 의혹에 대한 진상규명, 특히 피해자의 존재와 그 상태보다 고인의 정치적 업적을 우선적으로 평가하고 추모하려 하는 정치권의 분위기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 2020년 7월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사망했을 때도 더불어민주당에서는 고인에 대한 애도 물결이 주를 이뤘다. 이해찬 당시 당대표는 최고위에서 박 전 시장 사망에 "충격적"이라며 "유가족께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고 했고, 빈소에 조문하러 가서는 성추행 의혹 관련 질문을 하는 기자들에게 "예의가 아니다"라고 호통을 치기까지 했다. 문재인 당시 대통령도 빈소에 조화를 보냈다. 민주당은 박 전 시장에 대한 장례 절차가 마무리된 뒤에야 성추행 의혹에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민주당은 이날 장 전 의원 사망과 관련해서는 공식 논평을 내지 않았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