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불온한 사춘기
유년의 시기를 벗어나며 세상사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주변에는 '불온한 사건'들이 많이 일어났다. 중학교 1학년이던 1986년 나는 인천에 살았다. 5.3인천민중항쟁이 있던 인천시민회관이 학교 주변이다. 친구들이 말 순서를 다퉈가며 주말에 보고 들은 이야기들을 했다. 늘 다니던 거리에 온종일 경찰과 시위대가 격렬하게 충돌했고, 텔레비전에 대대적으로 나오니 흥분할 만한 뉴스였다.
누나들은 부평공단 봉제공장의 미싱사와 시다(조수)로 일했다. 대학을 다니던 형과 중학생이던 나는 신문 배달을 했다. 서울로 이사한 이후 어머니는 하숙집을, 아버지는 노점상을 했다. 중3 담임선생님 가정환경 상담 때 아버지 직업을 노점상이라고 했다. 담임선생님은 부끄럽지 않느냐고 핀잔을 주듯 물었다. 나는 부모님의 가난과 노동이 부끄럽지 않았다. 무식자에 노동으로 자식들을 뒷바라지해 온 부모님의 삶을 긍정했다.
'불온한 기운'은 집안에서 느껴졌다. 오랜만에 만난 형과 누나들은 낯설고, 전보다 성숙해 보였다. 어린 나를 대하는 태도와 말에도 전에 느껴지지 않던 격조가 있었다. 집에는 낯선 사람들이 드나들고, 은밀한 대화가 오갔다. 마치 첩보영화처럼 누나가 정해준 시간과 장소에 나가 인상착의로 사람을 구분해 메시지를 전달했다. 어느 날 누나들 자취방에 혼자 가서 복사물과 책을 가지고 나오기도 했다. 형사들의 잠복에 대비해 어린 내가 의심이 덜 받을 거라 여겼을 것이다.
KSCM과 모이고 조직하는 우리
누나는 나에게 고등학생 기독교 사회운동단체인 KSCM(한국고등학생기독교운동총연맹)를 소개했다. 중학교 3학년에 조기입학을 한 셈이다. 같은 중3, 고1, 나 3명이 신입반으로 묶여 주로 교육문제를 다룬 <교과서 속의 친일문학>, <내가 두고 떠나온 아이들에게>, <스스로를 비둘기처럼 생각하는 까치에게> 같은 책들을 많이 읽었다. 어린 나이에도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학교현장의 부조리한 일들의 배경을 알게 되었다.
학교에선 토요일 마지막 시간이면 매번 나눠주는 체크리스트에 한 주의 바른 생활 여부를 체크해 제출했다. 인사예절, 공중도덕, 태극기와 국가원수에 대한 예절을 지켰는지가 항목에 포함되어 있었다. 내용도 우스웠는데, 대통령을 '각하'라는 호칭으로 불렀는지를 묻는 내용도 있었다. 학교에서 교사들의 폭력은 일상이었다. 하루도 맞지 않는 날이 없었다. 몽둥이는 기본이고, 50센티미터 뿔자로 뺨을 때리거나 구둣주걱으로 손바닥을 때려 학생 손바닥이 찢어지기도 했다. 1등은 1대, 꼴찌는 60대를 넘게 맞으며 서로의 석차를 확인했다. 온갖 잡부금이 흔했고, 촌지가 자연스러웠다.
1987년 이후 통일운동, 민중생존권 투쟁 등 각 분야의 사회운동이 활발해졌다. 우리가 열심히 하면, 큰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고등학생운동도 여러모로 활발해졌다. 사회적 이슈로는 사학비리 해결, 교내 민주화, 입시 위주 교육 철폐 등을 본격적으로 주장했다. 조직적으로는 단체활동도 활발해지고, 활동가들이 늘어나고 모임도 많아졌다. 중고생들의 모임이 서울지역 곳곳에서 생겨났다. 민중교회, 전교조 서울지부의 지회 사무실, 지역의 청년단체, 문화단체 등이 거점 공간의 역할을 했다.
내가 활동했던 KSCM 사무실이 있던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은 한국 민주화운동에서 특별한 공간이다. 당시 한국 개신교 안에는 군사정권 시기 재야인사로 활동하던 문익환, 박형규 목사 등 유명 원로목사 뿐 아니라 종로5가 기독교회관을 중심으로 민주화운동, 소외된 약자를 돕는 데 적극적인 젊은 목사, 평신도가 많았다. 이러한 활동을 기독교 사회운동 또는 사회선교라고 했다. 이는 해방신학, 민중신학, 통일신학을 신학적 배경으로 하는 것으로, 제국주의 왕정국가를 찬양했던 서구교회에 대한 반성, 나치독일에 항거했던 본회퍼의 활동, 3.1운동 등 일제강점기 민족운동, 민중운동에 참여해온 한국 교회 등의 역사적 전통이나 정신을 계승하는 흐름이다.
1980년대 후반 고등학생운동에서 KSCM과 흥사단고등학생아카데미(이하 '흥고아')를 '공개단체'라고 불렀다. 비공개로 활동하는 고등학생운동 활동가들의 모임과 구분한 표현이다. 1987년 겨울 명동성당에서 있었던 서울지역고등학생연합회(서고련)의 농성 이후, 고등학생운동 활동가들이 공개단체인 KSCM과 흥고아에서 지도교사와 회원으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훨씬 더 많은 활동가가 조직적으로 활동하면서 지역별로 학교별로 조직을 확대해갔다.
KSCM과 흥고아 같은 공개단체의 중요한 역할은 중고생들이 모이는 '기회'와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고등학교운동의 중점적 방향에 대한 의제를 제안하고, 구체화하며, 사회적으로 이슈화하는 스피커 역할을 했다. 단위학교 활동가들의 학교현장에서의 활동을 지원한다는 의미가 있었다. 그러다 보니 공개단체는 실무적 역할도 많이 맡게 되었는데, 내가 KSCM 서울연맹 회장을 하던 1990년에만 대외행사를 11번 개최했다. 그중 특히 4.19학생혁명 기념행사와 11.3광주학생운동 기념행사는 고등학생운동에서 중요한 행사다. 고등학생운동의 역사성과 정체성을 되새겨보는 행사였고, 봄·가을 학기의 중간에 고등학생운동이 한 차례씩 대규모로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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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양심 고등학생'
"민족의 양심 고등학생." 1991년 5월 4일 서울 을지로입구 거리에 내걸린 깃발에 쓰인 문구다. 시청 앞 광장으로 진출하려는 시위대를 막아서는 경찰 저지선 바로 앞 낚싯대 끝 작은 깃발이다. 물대포가 뿌려대는 뿌연 물보라 사이에 몇 개의 큰 깃발 사이로 가느다랗게 폴락거린다. 알고 지내던 용산고 친구가 홀로 깃발을 들고 물대포로 맞은 최루액에 힘겨워하며 버티고 서있었다. 같이 깃발을 들었다.
그해 5월, 나는 거리에 있었다. 매일 아침, 신문을 보는 것이 두려웠다. 정권에 대한 분노가 가득했고, 분신 소식이 연달았다. 5월 4일은 '백골단 해체의 날'이었다. 권역별로 집회를 하고 도심에 모이는 날이다. 나는 홀가분하게 움직이고 싶었고, 혼자서 신촌로터리로 나갔다. 그때까지는 전교조 관련 집회 외에는 시국 관련 집회와 시위에 KSCM이 단체활동으로 참여하는 경우는 없었다. 경찰과의 물리적 충돌이 잦아 위험했고, 연행되는 경우 고등학생 신분으로 곤란해질 수 있어 몇몇이 개인적으로 참여했다.
1991년 5월, 많은 수의 고등학생들이 거리로 나왔다. 지난 몇 년간 억눌려왔던 것에 대한 분노, 서러운 감정이 있었다. 매 주말 이어진 집회에 잡을 수 있는 모든 손을 붙잡고 시내로 나왔다. 고등학생 깃발이 하나둘 늘고 깃발을 따르는 무리도 늘어갔다. 도심의 거리에 깃발을 따르는 군중들이 물줄기처럼 흘렀다. 그 사이를 따라 간간이 흐르던 고등학생 무리는 누가 기획한 것도, 약속한 것도 아니었지만 어느덧 하나의 대열을 만들었다. 누군가는 그 대열을 이끌어야 했기에, 얼굴이 조금 알려져 있었고 공개단체의 대표를 맡고 있던 내가 앞에 섰다.
강경대 열사의 장례가 있던 5월 18일은 도심 시위가 절정에 달한 날이다. 시위를 마무리하며, 명동성당에 들어선 고등학생의 수가 1500명에 달했다. 우리는 '쟁취 참교육', '타도 노태우'를 외쳤다. 그날 전남 보성의 보성고에서는 교내 운동장에서 열린 5.18 광주민중항쟁 기념식에서 고등학교 3학년 김철수가 노태우 정권에 항의하며 분신했다. 마무리 집회에서 자유발언의 형식으로 몇몇 단체의 대표와 직선제 학교 학생회장 등이 연설을 했다. 고등학생이 더 적극적으로 정치적 투쟁과 활동을 해야 한다는 주장과 이에 대한 배척으로 작은 소동도 있었다.
고등학생의 분신 소식에 격앙되고, 꽤 많은 수의 고등학생 대열에 고무되어 있었지만, 기획도 없고, 통제도 어려운 중구난방의 상황이었다. 그러다 누군가의 제안으로 5월 21일 석가탄신일에 주관자 없는 회의가 소집되었다. 한 대학 강의실에 30여 명이 모였다. 전국적인 연대를 시도하자든가, 이후 투쟁을 이어갈 회의체를 만들자든가 하는 제안이 있었지만, 구체적인 합의를 끌어내지 못했다. 이후를 누구도 예측하기 어려웠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5월 정국도 6월 들어 점차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1987년 겨울 명동성당에서 서고련 결성식이 있었다. 바로 흐지부지된 조직이지만, 고등학생운동의 시작점을 알린 '상징적 사건'이었고, 사회의 민주화를 외치는 고등학생들로, 사회운동 측면에서 주목받았다. 그리고 3년 6개월 남짓한 시간이 지나 다시 그 자리에서 우리는 '타도 노태우'를 외쳤다. 그때와 같은 상징적인 선언은 없었지만, 꽤 많은 수의 고등학생들이 모인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지난 몇 년간 학교에서, 지역에서 열심히 조직을 만들었다. 직선제 학생회를 쟁취했고, 학교에서 소모임과 서클을 만들고, 인권을 확장하는 학교민주화 투쟁을 벌였다. '전교조 지키기'로 전국적인 대중투쟁도 벌였다. 시국에 편류해 조직 역량으로 감당할 수 없는 '전고련(전국고등학생운동연합)'이나 활동가들이 사회민주화를 위한 투쟁조직을 만들자는 조급한 선언적 판단 정도는 자연스럽게 거를 수 있는 운동 노선의 건강함 정도는 갖춰져 있었다.
5월의 거리에서 우리가 '타도 노태우' 못지않게 많이 외친 말은 기자들을 향한 '사진 찍지 마세요'였다. 우리는 아직 '호명'될 만큼 성장하지 못했다. 경찰의 진압만큼, 학교에서의 징계와 후과에 대한 걱정도 컸다. 실제로 고척고에서는 학급문집에 실린 시국 관련 내용으로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 퇴학당하고, 몇 개월간 징계철회 투쟁을 해야 했다. 고등학생운동은 사회변혁운동의 정치적 주체로서는 아직 '익명의 깃발'과 '무명의 활동가'로 남아 있어야 했다.
고등학생운동을 함께 한 친구들에게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청춘의 어린 선택으로 패인 결핍을 메우고, 돌출을 갈아내는 데 다들 한 고생씩 했을 터다. 에둘러 간 방황의 조각들도 켜켜이 쌓아두었을 것이다. 두 번째 사춘기로 보낸 청년기의 불안도, 우리 또래의 자녀를 둔 중년의 고단함도, 그때 다져놓은 단단한 근육이 있어 여전히 성큼성큼 걷고 있다. '고등학생운동'이 사회적으로 잊혔고, 자신의 기억에서도 잊어냈지만, 운동장에 날린 종이비행기, 함께 흘렸던 땀과 눈물로 '도리어 희망찬 세상'을 만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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