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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은 보수의 '질병'이 아니라 '증상'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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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은 보수의 '질병'이 아니라 '증상'일 뿐이다

[박세열 칼럼] 보수의 가치를 '분노'와 '적개심'으로 메워버린 결과

폭군은 잔뜩 화가 나 있었다. 아니, 그는 언제나 화가 나 있었다. 내란 수괴 혐의로 체포된 윤석열의 성명들은 분노와 적개심의 언어로 가득 차 있다. "자유대한민국 내부에 암약하고 있는 반국가세력의 대한민국 체제전복 위협(계엄 포고령)"에 그는 격노해 계엄을 선포했다. 내란이 실패로 돌아간 후 체포되면서 "가짜 민주주의", "인민민주주의 독재", "사기탄핵, 사기소추", "무법적 패악" 등 험악한 말들을 들어놓더니 "(내가) 폭동을 계획하길 했습니까"라고 따지고 앉았다.

정신상태는 이상하다. "민주당은 의회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선거 부정을 서슴지 않는 반민주 반민족 패거리들", "중국의 재력을 앞세워 이 땅을 중국과 북한의 식민지로 만들려고 한다"는 답변서를 헌법재판소에 제출한 그는 중국과 북한, 민주당, 사법기관, 수사기관을 모조리 간첩들이 장악했다는 망상에 빠져 있다. 부정선거론을 진지하게 믿으면서 "칼에 찔려 사망한 시신이 다수 발견됐는데, 살인범을 특정하지 못했다 하여 살인사건이 없었느냐"고 반문하는데, 애초에 살해 당한 시신따위는 발견된 적이 없다. 음모론의 대부분은 틀린 전제에서 시작한다. 여기에 진지하게 반박하는 건 국력 낭비고 언어 낭비다. 아무런 의미가 없다.

'격노'는 오랜 기간 윤석열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분노는 이성적 사고와 판단, 행동과 감정의 조절을 관장하는 전두엽을 손상시킨다. 손상된 전두엽이 갑작스러운 분노를 부르는 악순환을 계속되면, 결국 알코올 의존중에 빠지기 쉽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도 윤석열의 격노를 정신병리학이나 뇌과학, 알코올 중독으로만 설명하려 드는 건 게으른 일이다.

말하자면 윤석열은 지금 대한민국 보수가 앓고 있는 병의 증상이다. 윤석열은 하나의 은유다. 보수 정당에 닥친 이 거대한 재앙을 윤석열 개인 캐릭터의 문제로 치환하고 넘어가는 건 대증요법일 뿐, 보다 근본적인 원인 분석이 필요하다.

보수는 합리적 이성과 객관적 현실 판단을 중시한다. 보수정당의 원동력은 가치와 철학이다. 그런데 이 자리를 언제부터인가 분노와 적개심이 메우고 있다. 국민의힘은 문재인과 이재명을 향한 적개심으로 '될 것 같은 후보' 윤석열을 골랐다. 자기 진영 대통령 두 명을 감옥 보낸 그를 섭외한 보수 정당은 대선에서 가까스로 이겨 '대통령직'과 '여당 자리'를 차지하는 데 성공했다. 문재인과 이재명에 가장 큰 적개심을 가진 사람에게 정치를 외주 준 결과물이 작금의 상황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놀라운 건 국민의힘이 '윤석열 이후' 프레임 전환을 시도하며 내건 첫째 명분이 '이재명이 대통령 되는 것을 볼 수 없다'는 테제란 점이다. '반 이재명'이 보수의 가치인가? 국민의힘 지지율 상승세의 동력은 '반 이재명'과 함께 2017년 탄핵 이후 정권을 잃었던 보수층의 트라우마가 결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자기 성찰 대신 '이재명 프레임'을 스스로 껴안은 보수정당은 지지율의 착시에 빠져 또다른 적개심을 찾아 제2의 윤석열을 주물해내려 할 것이다. 하지만 철학과 가치를 팽개치고 적개심과 분노로 하는 보수 정치는 정치도 아니고 보수도 아니다.

되짚어보면 민주화 이후 역대 정부에선 국정 목표를 디자인한 상징적인 인물들이 있었다. 학자 출신도 있었고, 노련한 외교관 출신도 있었다. 이른바 'OOO정부'의 정책을 상징하거나 하다못해 '대통령의 멘토'로 불렸던 각 분야의 전문가들도 꼽을 사람이 꽤 된다.

노태우 정부 때는 북방외교를 설계한 '황태자' 박철언이 있었다. 노태우 정부는 중국과 수교하고 북한과의 관계를 정립한 '남북기본합의서'를 도출해 냈다. 김영삼은 남재희, 윤여준, 박세일 등을 기용해 '신한국'과 '세계화'라는 큰 틀의 국가 디자인 플랜을 추진했다. 이명박 정부에도 박재완과 같은 걸출한 관료 출신 학자들이 있었고, 박형준 같은 소장파 학자들은 최소한 '정부를 상징하는 국정 철학' 정도는 내 놓았다. 박근혜 정부 때도 김광두 같은 경제학자들이 대통령의 경제 멘토로 불렸다.

윤석열 정부에서만큼은 그런 사람이 전혀 없다. 윤석열은 그냥 평소 하던대로 분노했을 뿐이고 대중의 적개심에 올라타 어쩌다 '별의 순간'을 잡았다. 용인술은 충암고, 검찰이 전부였다. 그에게 조언하는 학자나 전문가는 아예 씨가 말랐다.

윤석열 정부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경제 철학을 상징할 만한 인물도 없고, 국정 기획을 담당하는 학자나 관료들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대통령이 누구를 멘토로 부른다는 말도 없다(신평 변호사가 멘토로 불렸다지만, 대체 무슨 분야에서 멘토인지도 불분명한데다, 이 정부의 국정 디자인과도 전혀 관계가 없다. 대통령실은 '대통령에겐 멘토가 없다'고 못을 박아버렸다.). 그 자리에 민망스럽게도 천공이니, 건진이니, '버거 보살'이니, 미륵(명태균)이니 하는 해괴한 인물들이 호명된다.

그 흔한 '명망 있는 학자'의 그림자도 안 보이는 보수 정부는 난생 처음 본다. '별의 순간' 같은 점성술적 시기를 타고 대통령이 된 탓이련가. 그리하여 대통령 주변에 남아 있는 건 '용산 십상시'라든지 '한남동 라인' 같은 추레한 별칭으로 불리는 일군의 참모들이다. 그러니 윤석열이란 괴물이 휩쓸고 간 폐허 위에서 가치와 비전은 찾아볼 수 없고, 욕망과 적개심만 여전히 난무한다.

시대는 변했다. 과거 냉전 시대 보수 정당은 북한(혹은 북한 추종 세력)과 적대적 공생관계를 형성했다. 북한을 향해 적개심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보수 정당 후보에 표를 던졌고, 보수 세력은 손쉽게 권력을 점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젠 북한과 적대적 공생만으로 권력을 유지하는 일이 위태해졌다. 그래서 끌어들인 것이 분노에 가득 차 허수아비 적을 만들어 때리고 있던 아스팔트 극우 세력이다. 그들이 창조해 낸 중국 공산당 음모론과 문재인 간첩설은 보수 정당의 메인스트림으로 진출해 이재명을 반국가 세력의 수괴로, 범죄의 화신으로 만들어 '적개심'을 끌어올리고 있다.

가치와 철학을 만드는 데 게을러진 보수 정당은 눈 앞의 권력 게임에 매몰돼 가장 적개심이 강한 자를 선택해 박근혜 탄핵으로 빼앗긴 권력 그 자체를 되찾아오는 데 혈안이 돼 있었다. 대한민국 역사에 진지하게 기록되지 못할 윤석열이란 질병적 증상은 보수정당의 게으른 적개심 전략을 폭로하는 증거물이다. 남은 것은 무철학의 철학, 무전략의 전략이다. 그리하여 국민의힘은 윤석열이 자폭한 그라운드 제로에서 또다시 적개심과 분노의 대상을 찾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극우 김문수가 보수 후보 중 1위를 차지했다는 여론조사는 많은 걸 시사해준다.

분노와 적개심의 정치가 계속되는 한 보수 정당엔 미래가 없다. 만약 보수가 전광훈류의 정치세력과 극우 유튜버에 휘둘리며 '민주당을 이길 사람', '복수해 줄 사람'을 찾아 다음 대선에 임한다면, 어쩌면 윤석열 탄핵에도 불구하고 정권 재창출이 가능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찾은 대통령은, 또 다시 국민의힘을 배신하고 시민을 배신할 것이다. '윤석열 바이러스'는 치료 가능하다. 윤석열을 버리고 보수 정당의 정체성과 가치, 철학을 다시 세워야 이 비극의 악순환을 막을 수 있다.

▲윤석열.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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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열

정치부 정당 출입, 청와대 출입, 기획취재팀, 협동조합팀 등을 거쳤습니다. 현재 '젊은 프레시안'을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쿠바와 남미에 관심이 많고 <너는 쿠바에 갔다>를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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