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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도래한 디스토피아, 어떤 실천도 저 홀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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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도래한 디스토피아, 어떤 실천도 저 홀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

[홍명교 칼럼] 진보정당의 총선 실패는 문제의 '원인'이 아닌 '결과'다

앙드레 바쟁이나 마틴 스콜세지 같은 거장들은 영화가 현실을 재현하거나 반영한다고 말했지만, 2024년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은 오스카 와일드의 잠언을 더 많이 상기할 수밖에 없다. "예술이 현실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예술을 모방한다."

워쇼스키 자매를 세계적인 스타 감독의 반열에 올린 SF영화 <매트릭스> 속 가상 현실에 갇혀 살아가는 인류는 끔찍하리만치 착취적인 진실을 외면하고 가상 현실에서 편안하게 살아가길 원한다. 가령 '네오'와 '모피어스'를 배신하고 매트릭스의 관리자들에게 밀고한 '사이퍼'는 가짜 스테이크를 뜯어 먹으며 이렇게 말한다. "무지야말로 축복이라고." 그러고 보니 한때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읽었다는 소설 <태백산맥> 속 반공주의자 염상구는 이렇게 말한 적 있다. "차라리 몰랐으면 좋겠어. 다 아는 게 무슨 소용이야? 그저 하루하루 먹고 살면 그만이지." 어쩌면 우리는 부박하고 고통스러운 현실 앞에서 사이퍼나 염상구처럼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닐까.

테리 길리엄이 연출한 고전 영화 <브라질>에서 주인공 샘 로리는 관료주의적이고 억압적인 현실을 망각하기 위해 종종 꿈과 환상의 세계로 도피한다. 꿈속에서 그는 용감하고 기백이 넘치는 전사이지만, 현실에서는 무의미한 서류 작업을 끝없이 반복하는 관료사회의 작은 부품일 뿐이다. 안간힘을 쓰며 저항하려 해도 이 비극적인 유비로 이뤄진 꿈-현실의 대립은 끝나지 않는다. 영국에서 제작된 SF시리즈 <블랙미러> 시즌1의 '핫 샷' 에피소드가 묘사한 미래 사회에서도 사람들은 창문도 없는 방에 살면서 일상의 거의 모든 시간을 가상 현실에서 보낸다. 근미래의 도시에서 사람들은 원하지 않더라도 끊임없이 광고를 시청해야 하고, 광고를 피하려면 자전거 노동을 통해 번 돈을 써야 한다. 이 비참한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오디션 프로그램에 출연해 승리하는 것 뿐이지만, 권력자들은 이 시스템에 맞선 저항마저 콘텐츠로 활용한다. 마치 지독한 경쟁 사회에서 각종 오디션 프로그램들이 성행하고, 헐리우드에서 가장 빼어난 저항 서사를 지닌 영화 상품들이 수천억 달러 규모의 독과점적 블록버스터로 제작되는 것처럼 말이다.

신자유주의 개혁을 통해 오늘의 세계를 지배하는 자본 권력은 이미 이런 디스토피아적 풍경들을 모두 흡수하고 있다. 마크 피셔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에서 현대 사회를 포스트 포드주의적(post-fordist) 자본주의로 규정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우리 사회는 "자본주의가 유일하게 존립 가능한 정치·경제 체계일 뿐 아니라, 이제는 그에 대한 일관된 대안을 상상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널리 퍼져 있는 감각"이 지배하는 "종말론적 상황"을 마주하고 있다. 피셔는 정신질환과 관료주의가 그것의 문화적 증상이라고 보는데, 최근 들어 사회적 논란이 됐던 여러 쟁점들을 떠올려보면 실로 그렇다. 이 체제는 사람들을 정신질환에 빠질 수밖에 없도록 옥죄고, 우리가 맺는 관계맺음은 이것의 근본적인 원인이나 모순에 대해 성찰하기 어렵도록 파편화되어 있다.

왜 사람들이 자살을 택할 수밖에 없는가. 사실 OECD 회원국 중 자살률이 가장 높은 나라라는 대한민국의 오명은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니다. 1988년 이 나라의 자살률은 당시 OECD 평균의 절반 미만인 8.4%에 불과했지만, 신자유주의 정책의 점화와 함께 급증해 2003년부터는 1위를 놓치지 않고 있다. 이 체제에 기생하는 권력자들이나 엘리트들 모두가 높은 자살률을 걱정하지만, 아무도 그렇게 만든 체제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정치적 부족주의에 매몰된 이들은 양편으로 나뉘어 '수구독재 때문'이라거나, '빨갱이 민주당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이는 모두 틀렸다. 두 세력이 표면적으로는 쟁투를 멈추지 않으면서 실제로는 일관되게 추진해온 신자유주의 전략 때문이다. 고의적으로 노동조합을 공격하고, 노조 없는 노동자들의 가입마저 어렵게 만드는데 어찌 일터의 경쟁과 억압이 심화되지 않고 견디겠는가. 공공성을 파괴하고 시장에 모든 걸 내맡기는 방향을 밀어붙이는데 어찌 재분배나 불평등 완화가 가능하겠는가. 이제는 노동조합마저 양당 체제에 종속되어가니 이 괴물같은 시스템을 단순히 도덕적인 대립으로 설명하는 것은 설명력을 잃었다.

물론 신자유주의자들이라고 해서 A부터 Z까지 동일한 것은 아니다. <내전, 대중혐오, 법치 - 신자유주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피에르 다르도, 크리스티앙 라발, 피에르 소베트르, 오 게강 공저)의 저자들은 최근 트럼프식 포퓰리즘의 등장을 통해 드러난 신자유주의의 변화를 '권위주의적 일탈'로 해석해선 안 된다고 말한다. 신자유주의 새로운 전략은 두 가지 현상에 의존하는데, 하나는 그것이 다소 진보적인 글로벌리즘 신자유주의와 반동적인 내셔널리즘 신자유주의로 나뉜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이 두 가지 버전의 신자유주의가 상호간의 가치 전쟁 속에서 마치 "무한한 거울 반사처럼" 서로에게 시대적 악의 책임을 돌린다는 것이다. 윤석열만 몰아내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처럼 말하는 민주당과 그 지지자들은 IMF 외환위기 이래 노무현 정권 시기까지 10년 내내 노동자운동을 공격했고, 반대로 국민의힘은 반동적인 민족주의를 선동하며 사회를 분열시키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시장화를 정당화하고 있다. 어느 누구도 평범한 사람들의 편에서 있다고 말할 수 없다.

한데 지난 총선에서 확인했듯, 두 세력에 맞선 대안을 자처했던 진보정당들은 크게 후퇴했다. 정치평론가들이 말하는 총선 전략이나 정무 감각 등은 문제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일 따름이다. 요컨대 이는 지난 10여 년 간 지속된 위기가 반영된 결과이지, 단기간 누적된 사건들의 결과가 아니다. 첫 단추부터 잘못 뀄고, 도중에 그것을 정정하려 한 시도는 계속해서 실패했다. 이는 시민사회운동이 공히 공유하는 한계와 무관하지 않다. 이제 중요한 것은 비관에 빠지지 않고, 역사적 사회운동이 갖고 있는 누적된 모순을 혁신함으로써 대안을 재조직화에 하는 것에 있다.

물론 우리는 사회운동의 상상력을 가로막는 자본주의의 무지막지한 능력을 간과해선 안 된다. <블랙미러> '핫 샷' 에피소드가 묘사한 디스토피아가 체제에 맞선 저항마저 콘텐츠화하는 것처럼, 이 체제는 신자유주의 정책에 반대하는 자들의 주체성마저 함락하고 있다. 그 누구도 자본주의 이외의 것을 상상하지 못하고, 기후위기를 우려하고 정부 정책을 비판하는 일부 진보주의자들조차 시장주의적인 탄소배출권 거래제도를 대안으로 제시하듯이 말이다.

몇몇 엘리트들의 선각자적 결단 따위로 체제를 넘어선 길이 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공고한 것처럼 보이는 이 시스템에 균열을 내는 것은 결국 그것에 맞선 집단적인 도전이 선명하게 가시화되고 연쇄적인 사건으로 이어질 때이다. 따라서 더 나쁜 신자유주의와 덜 나쁜 신자유주의 대립에 함몰되지 않는 세번째 항을 가시화하는 것은 자본주의를 유일한 대안인 것처럼 상정하는 냉소주의에서 벗어나 급진적 상상력을 활성화시키는 것에 있다. 지금의 위기는 섣부르게 정당을 다시 만든다거나, 훈고학적인 구좌파 교리에 충실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모든 것이 문제여서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저항해야 할지 가늠도 되지 않는 지금, 신자유주의 국가의 지배에 맞서 공통의 것을 수호하고 강화하려는 개인들과 움직임들은 서로 교차하고 충돌하기 위해 시야를 울타리 밖으로 확장해야 한다. 그것은 결코 의지만으로 되지 않으며, '우리 조직', '우리 노조', '우리 공동체'를 그렇게 할 수 있는 공간으로 의식적이고 상시적으로 위치시켜야만 가능하다.

다시 말해 진보적인 군소정당과 사회단체, 노동조합, 협동조합, 주민모임, 진보적 북클럽, 자조회 등 크고 작은 공동체들이 조심스럽지만 너무 늦지 않게 광범위한 연합을 구축하기 위한 노력에 귀를 기울이기를 희망한다. 지난 3월 23일 열린 '체제전환운동 정치대회'는 지금부터 이런 노력이 필요하고 기꺼이 귀 기울일만 하다고 여기는 적지 않은 이들이 주목한 토론과 외침의 자리였다. 이 자리에서 참가자들은 ①사회운동들이 가로지르는 접점을 넓히며 관계가 단단해지는 과정을 만들고, ②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맞춰가며 체제전환의 전망을 구체화하며, ③체제전환운동의 전략과 방향을 함께 모색하자고 결의했다. 또, 구체적으로 ④지역과 현장에서 세력을 확대하고, ⑤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자고 약속했다.

물론 과제도 산적하다. 향후 연합체를 어떻게 만들지, 그 성격은 무엇이고 구성원리는 뭐고 진보정당들과 어떻게 관계맺을지 등에 대해서는 더 많은 고민과 토론이 필요할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것이 너무 무거운 과제이기에 머뭇거릴 수 있고, 또 어떤 이들은 이것이 너무 시시하게 여겨져 발을 담그지 않을 수 있다. 그만큼 고립분산의 시간이 길었고, 각 운동이나 단체들은 자신과는 다른 운동들의 처지나 상태를 이해하지 못한다. 문제는 이런 상태가 저절로 해소되기만을 기다려서는 영원히 어떤 연합된 힘도 구축할 수 없고, 사회·문화적으로 다양한 갈등들을 가로지르는 계급투쟁을 접합하기 위한 노력의 과정 없이는 새로운 주체를 모아내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는 데 있다.

어떤 운동도 저 홀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 우리를 우울하게 만들고 옥죄는 이 시스템은 결코 어느 하루 갑작스레 폭발하는 봉기로 무너지지도, 다른 아름다운 무엇으로 대체되지도 않는다. 오직 우리의 삶을 억압하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지배 시스템에 맞서 집단적으로 실천하고 자신의 대안을 실험해 나갈 때에만 다른 세계로 대체될 수 있다. 그것은 개별화되고 분리된 운동들이나 개인들의 독자적인 실천으로 가능하지도 않다. <브라질>의 관료주의 체제나 <블랙미러>의 오디션 프로그램에 맞선 개별적 저항이 쉽사리 체제의 부속품으로 전락하듯이 말이다. 그러니 앞으로의 대안은 체제를 넘어서는 상상력과 전략을 통해 공동으로 구상해야 하고, 시민불복종은 동시다발적인 연합으로 이뤄져야 한다.

▲ 녹색정의당 제22대 총선 선거대책위원회 구성원들이 선거가 끝난 12일 노회찬 의원 묘역을 찾았다. ⓒ녹색정의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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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명교

사회운동이 마주한 곤경을 실천적으로 돌파하기 위해 플랫폼C에서 활동하고 있다. 다양한 동아시아 사회운동과 교류·연대하고 있고, 체제전환운동 조직위원회에 함께 하고 있다. <사라진 나의 중국 친구에게>와 <유령, 세상을 향해 주먹을 뻗다>를 썼고, 역서로는 <고양이 행성의 기록>, <신장 위구르 디스토피아>, 공동역서로 <아이폰을 위해 죽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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