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은 앞으로 4년 동안 한국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논쟁하고 합의의 출발점을 만들어가는 계기다. 적어도 교과서에 쓰인 내용은 그렇다. 하지만 총선을 몇 주 앞둔 한국 사회 현실은 이런 내용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미래 방향을 놓고 격론이 오가기는커녕 오직 과거의 관성과 향수, 원한만 소환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답답하다.
언론 보도만 봐도 그렇다. 2020년대의 풍경이라는 게 1960년대나 1990년대라 해도 통할 만큼 과거를 답습한다. 한때 마르크스주의를 이야기하던 이들이 포퓰리즘을 막기 위해 반드시 당선시켜야 한다며 지지했던 대통령은 지금 전국을 돌며 개발 약속을 마구 던진다. '반-포퓰리즘'을 위한 수단이라던 대통령에 의해 '포퓰리즘'이 꽃을 피우는 격이다. 주요 정치 세력이 이미 오래 전부터 포퓰리즘의 요소들에 익숙했고 또한 앞으로도 계속 그러할 한국 정치 현실은 이렇게 헛똑똑이들을 조롱하며 질주한다.
그런가 하면 제1야당은 '당 대표의 사천(私薦)'이라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3년 뒤에 다시 대선 주자가 될 대표에게 권력을 몰아주는 데 여념이 없다. 차기 국회 구성은 별로 중요하지 않으며 대선에서 대통령직을 탈환하기만 한다면 한국 사회의 모든 문제가 풀릴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 틈에서 전 법무부 장관 이름을 당명으로 내건 신생정당은 5년 전에 현 대통령과 벌였던 싸움의 리턴매치를 내세우며 바람을 일으킨다.
이것이 제22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둔 한국 정치의 모습이다. 선명히 밝아오는 새로운 삶의 빛에는 등을 돌린 채 과거 삶의 허상들 속을 헤매는 중음신(中陰身, 윤회적 세계관에서 죽은 뒤부터 다음 생을 살기 전까지의 시기)의 세계랄까.
산업화와 민주화의 성공이라는 덫
이것은 단지, 한국 사회 현실과 동떨어진 낡고 편향된 정치권만의 문제일까? 사회 변화를 애써 무시하며 기득권 유지에 혈안이 된 주류 정치세력만의 탓일까? 시대 변화에 부합하는 정치 변화를 요구하는 이들이 한국 사회에 소수나마 끊임없이 존재해왔음을 감안하면, 이 물음들에 '그렇다'라고 답해도 틀리다고만 할 수는 없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작금의 한국 정치가 시민사회와 완전히 괴리돼 있다고는 할 수 없다. 어쨌든 대의제는 작동한다. 한국 사회의 다수 여론에 관한 한, 확실히 그렇다. 굳이 수치로 어림잡으면, 시민사회 가운데 적어도 2/3에 달하는 부분이 양대 정당을 통해 정치 영역에서 적극적으로 '대의'된다. 즉, 영원히 과거의 잔상 속에 헤매는 것 같은 정치는 기존 정치 엘리트만이 아니라 한국 시민사회 '다수'가 정치 엘리트와 긴밀히 교호하며 빚어낸 결과다.
이런 시민사회 다수를 지배하는 요소는 무엇인가? 바로 성공의 덫이라는 역설이다. 어떤 사회든 예외적인 커다란 성공 뒤에 침체나 파멸이 뒤따른다면, 침체나 파멸의 원인은 다름 아닌 성공을 이끈 그 요인이라는 역설. 대문자 'K'를 곳곳에 붙이며 성공을 자축하는 한국 사회에 지금 이 역설이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그 중에서 첫 번째는 산업화에서 거둔 압도적 성공의 덫이다. 1, 2차 산업혁명을 20년 만에 단숨에 달성한 박정희 시대로부터 정보화에 적응한 최근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이 이룬 산업화의 예외적 성공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불평등 심화, 인구 절벽, 지역 쇠퇴 같은 현재의 모든 재앙은 이 예외적 성공이 낳은 결과들이다. 산업화의 대성공에 기여한 결정과 전략, 관성이 작금의 재앙을 부추긴 요인들이기도 하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재앙을 뻔히 알면서도 제대로 손을 못 쓰고 있다. 눈부신 성공으로 이어진 역사 경로에서 스스로 이탈하기가 힘든 것이다.
무엇보다도 과거의 결정과 전략, 관성이 다 국가기구나 대기업의 최상층에 의해 상명하달식으로 관철됐다는 점이 중요하다. 한국 사회는 이런 초중앙집권적 방식으로 동원되는 데 익숙하다. 재벌이 중대한 결정을 내리면 무수한 중소기업과 노동자, 소비자가 이 결정에 스스로를 적응시켜나가고, 국가가 전략적 구심을 정하면 시민들이 치열한 경쟁을 통해 그 구심을 에워싼 계급-계층 동심원을 구축한다. 이런 삶의 방식이 너무나 잘 먹혀들었기 때문에 이 경로에서 벗어난 대안을 추구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좀처럼 지지를 얻지 못한다.
기후위기 대응 과정에서 이런 성공의 덫이 명확히 드러난다. 한국 사회가 비슷한 경제 수준의 다른 국가들에 비해 유독 기후위기 대응에 실패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근본적인 것은 기후위기가 한국의 지난 산업화 과정과는 달리 국가기구와 대기업 최상층에 의해 초중앙집권적으로 대응하기 쉽지 않은 문제라는 점이다.
화력발전소나 핵발전소처럼 어느 한 곳에서 전력을 대량 생산하여 먼 곳까지 송전하는 방식은 태양광이나 풍력 같은 재생에너지에는 맞지 않는다. 지역에서 쓸 전력을 지역 안에서 최대한 생산하는 방도를 찾아내기 위해 지역사회 구성원들이 머리를 맞대야 하고, 지역 생태와 생활에 대해 가장 풍부한 암묵지를 지닌 시민들이 주도하여 재생에너지 생산 역량을 구축해야 한다. 철저히 아래로부터 사회 구성원들의 참여와 숙의, 합의를 통해 결정되고 집행되어야 한다. 이보다 더 '선진국 대한민국'에 생경한 문제 해결 방식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너무 생경한 탓에 시작도 못하고 있다. 누구보다도 국가기구와 대기업의 최상층 결정권자들 자신이 그런 상태에 있다. 이들이 모조리 다 화석연료 광신도, 핵발전 확신범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보다는, 지난 반세기 산업화 과정을 통해 그들의 세계관에 뿌리내린 초중앙집권적 문제 해결 방식 외에는 도대체 다른 무엇을 생각하지 못하는 상황이라 봐야 한다. 이것은 특정 지역과 분야의 의료 인력 부족 문제를 오직 의대 정원 총수 확대로만 해결하겠다며 밀어붙이는 윤석열 정부의 모습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애초부터 의료 전문가와 여러 사회 집단들의 대화와 협상으로 해법을 찾는다는 생각, 이런 게 가능하다는 생각 자체가 없는 것이다.
불행히도 이런 한계는 극소수 지배 집단에만 퍼져 있지 않다. 시민사회 내 상당 부분이 여전히 산업화 성공 신화의 틀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앞날을 그린다. 오늘날 시민사회의 이러한 부분과 전통적 지배 엘리트 사이의 긴밀한 연계는 정치 영역에서 주로 국민의힘을 통해 이뤄진다. 윤석열-한동훈이라는 이번 총선 선택지 이면에는 이 블록(동맹)이 있다.
그러나 성공의 덫은 하나만이 아니다. 윤석열-한동훈의 반대쪽에서도 비슷한 과거 성공 신화가 한국 사회를 어제의 세계에 묶어두고 있다. 민주화 성공의 덫이 그것이다. 산업화 성공의 기억과 자부심만큼이나 제6공화국의 탄생과 그 초기 역사 역시 시민들의 뇌리에 강렬하게 남아 있다. 특히 양김 씨와 같은 제6공화국 초기 대통령들의 업적이 얼마간 신화화된 채로 기억되며, 어느덧 '민주주의'는 '다시금 이런 대통령을 만들어내는 일'과 동일시된다.
문제적 인물 이재명에 대한 과도한 기대와 열광 그리고 격렬한 비난과 환멸 모두 이런 '대통령 만들기' 서사에서 비롯된다. 누적되기만 하는 온갖 문제들을 일거에 해결할 대통령을 만들어내야만 하기에 더불어민주당이 이재명 1인 지배 정당이 돼도 상관없다는 이들이 한 쪽에 있는가 하면, 다른 쪽에는 똑같이 '민주주의'를 '대통령 만들기' 서사와 동일시하기에 이재명식 정치를 비판하면서도 '조국'혁신당에서 대안을 찾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마주한 복합위기의 여러 문제들은 단순히 다음 대선에 전력투구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제6공화국 초기 대통령들의 업적 자체도 냉정하게 다시 돌아봐야 하지만, 설령 그들의 리더십이 그대로 돌아올지라도 쉽게 풀릴 수 있는 게 아니다. 민주화 성공 신화의 덫에 빠진 이들이 상식으로 여기는 '민주주의'는 불평등 심화, 기후급변, 돌봄위기 같은 문제들을 다루기에는 너무 낡고 왜소해졌다. 그럼에도 이 '민주주의'는 더불어민주당과 그 비례위성정당, 조국혁신당 등과 시민사회 상당 부분 사이의 연계를 통해 그 수명을 질기게 이어간다.
지금 필요한 것은 '탈-회로'의 노력들
22대 총선이 보여주는 한국 정치의 맨 얼굴은 결국, '성공의 덫에 빠져 정체된(더 심하게는, 자멸하는) 사회의 정치'다. 이는 모름지기 새로운 시각과 자원을 통해 해석되고 대응되어야 할 모든 당면 문제를 오로지 '성공한' 과거의 시각과 자원으로만 바라보고 대처하는 정치다. 여기에서 미래는 온통, 과거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회로 안에 빨려 들어가 갇히고 만다. 그리고 이 닫힌 회로는 언젠가 누적된 현실의 압력을 이기지 못한 채 한국 사회 전체와 함께 파국적으로 붕괴하고 말 운명이다.
따라서 지금 가장 시급한 과제는 한국 사회 다수 혹은 양대 블록이 쳐놓은 이 회로에서 빠져나오는 것이다. 더 많은 균열과 이탈, 충돌을 통해 닫힌 회로를 하루라도 더 빨리 해체시키는 것이다.
이번 총선 정국에서 이런 '탈-회로'의 정치는 이미 여러 형태로 그 싹을 드러내고 있다. '시민사회'의 이름으로 더불어민주당의 비례위성정당 창당에 부역하는 흐름에 맞서 사회운동을 재건하려는 노력, 진보정당을 철 지난 '민주대연합'의 부속품 정도로 만드는 세력에 대해 민주노총이 결연히 지지를 철회하게 만들려는 노력, 불평등 타파-기후정치-돌봄사회 실현을 위해 독자 진보정당의 최소 기반을 어떻게든 살려내려는 노력이 그런 싹들이다.
성공의 덫에 빠져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던 한국 사회가 언젠가 느닷없이 깨어날 때 마주할 첫 얼굴이 이준석식 극우 포퓰리즘인 미래를 원하지 않는다면, 지금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그것은 과감하게 '탈-회로'의 정치 편에 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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