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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훈의 '동료시민'에서 40년 전 노태우의 '보통사람'이 떠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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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훈의 '동료시민'에서 40년 전 노태우의 '보통사람'이 떠오르다

[장석준 칼럼] 진짜 '동료시민'의 정치란 무엇인가?

지난주 한국 사회는 보기 흉한 궁정 암투극을 강제로 관람해야 했다. 대통령이 갑자기 여당 비상대책위원장을 쫓아내고 싶어 하는 듯한 언행을 흘렸고, 당사자인 비대위원장은 이에 저항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둘이 느닷없이 불협화음을 낸 이유는, 누가 보더라도, 대통령 부인 관련 의혹의 대처를 둘러싼 긴장과 갈등에 있었다.

하지만 충돌은 의외로 싱겁게 끝났다. 대통령 밀지에 따라 여당 비대위원장이 교체되는 사건도 없었고, 제 갈 길을 가겠다던 비대위원장이 대통령 부인 특검에 전향적 입장을 취하는 이변도 일어나지 않았다. 보고 싶지 않은데도 억지로 삼류 조폭 영화 속 장면 같은 이런 난투를 지켜보느라 시간을 빼앗긴 시민들만 피해자였다.

장면을 끝내는 방식마저 고리타분하기 짝이 없었다. 하필이면 화재 현장에서 재난 피해자들의 심정은 아랑곳없이, '미래 권력'이라는 여당 비대위원장이 '현재 권력'인 대통령에게 90도로 허리 굽혀 인사했다. 검찰 조직에서는 흔한 인사법인지 모르겠지만, 이는 분명 한동훈 위원장이 정치를 시작하고 나서 입에 달고 다니는 저 '동료시민'이라는 말과는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다.

'동료시민'은 또 다른 대등한 동료시민일 뿐인 대통령에게 그런 식으로 머리를 조아리지 않기 때문이다. 군주에게 복종을 맹세하는 '충복'은 동료시민들로 이뤄진 민주공화국에 낄 자리가 없다.

▲국민의힘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이 23일 충남 서천군 서천읍 서천특화시장 화재 현장에서 윤석열 대통령을 만나 허리숙여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동료'와 '비-동료'를 나누기 위한 '동료시민' 담론

사실 한동훈 위원장이 '동료시민'이라고 말하면서 떠올리는 생각이 무엇인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한 위원장 스스로 자기 생각을 정리해 발표한 적이 없다. 다만 국민의힘 지지 성향 언론들이 먼저 나서서, 이 말 뒤에 공화주의가 깔려 있으며 한 위원장이 공화주의에서 대안을 찾는다고 애써 해석해 줄 뿐이다.

여기에서, 훈수꾼들이 끌어들이는 '공화주의'에 관해 논할 생각은 없다. 다만 대한민국 제6공화국 정치의 맥락에서 '동료시민'이라는 담론이 수행하는 역할을 따져보고 싶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동료시민'은 생각보다 그리 신선한 말은 아니다. 제6공화국 태동과 함께 등장한 잘 알려진 선례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보통사람' 담론이다.

영화 <서울의 봄>이나 <1987>을 본 젊은 세대라면, 예외 없이 한 번쯤 던질만한 물음이 있다. "그런 일들을 겪고도 왜 1987년 대선에서 다시 군부 잔당을 당선시켰는가?" 6월 항쟁이 있고 불과 반년 뒤에 치러진 대선에서 승리를 거머쥔 것은 <서울의 봄>에 '노태건 장군'으로 나오는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였다. 그때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나는 대선 개표 다음날 어른들 표정에 드러난 패배감과 처연함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노태우가 승리한 첫 번째 이유야 물론 김영삼과 김대중의 분열이었지만, 또 다른 요인으로는 노태우 후보가 내건 '보통사람'이라는 표어가 있었다. 당시 한국 사회를 압도하던 말은 당연히 '민주화'였다. 하지만 '보통사람'이라는 호명은 '민주화'와 백중지세를 이룰 만큼 사람들 뇌리에 인상 깊게 박혔다. 이 말을 되뇔수록, 전두환보다 '단지 조금만 더' 보통사람에 가까웠던 노태우가 어느덧 완연한 '보통사람', '우리 중 한 사람'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나 '보통사람' 담론이 한 역할은 단지 12.12 군사반란 주모자 노태우의 이미지를 세탁한 것만이 아니었다. 흔히 '보통사람'이라고 하면, '보통'의 뜻 그대로, 보편적인 대한민국 사람을 가리킨다고 여겨진다. 이런 순진한 생각에 따르면, 1987년 대선에서 노태우가 구사한 언어는 그간 소외돼 온 민중을 적극적으로 끌어안겠다는 의지의 천명이 된다. 모든 계급, 계층을 포용하는 '인간의 얼굴을 한' 군부정권의 선언이랄까. 실제로 노태우 후보 진영은 얼마간 이런 효과를 노렸을 것이다.

한데 노태우 진영이 노린 효과는 이것만이 아니었다. '보통사람' 담론이 수행한 또 다른 기능이 있었다. 그것은 '보통'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구분이었다. 시민을 '보통인' 사람들과 '보통이 아닌' 사람들로 나눈 뒤에, 후자에 맞서 전자가 노태우 후보를 지지해야 한다고 암시한 것이다. 이 점에서 '보통사람' 담론은 보편적이고 포용적인 호명이기는커녕 오히려 정반대로 분열과 구별의 언어였다. 노태우 후보에게 유리하게 유권자들을 가르고, 대립을 선동하는 언어였다.

그럼 누가 '보통' 사람이고, 누가 '그렇지 않은' 사람이었는가? 몇 달 전 거리에 나와 '민주화'를 외쳤던 사람들이 바로 '보통이 아닌' 사람들이었다. 반면에 '보통' 사람들이란 '소수'(?) 시위대가 목청을 높일 때에 묵묵히 제 할 일을 하던 사람들, R. 닉슨이 호명한 '침묵하는 다수'마냥 목소리는 잘 안 들려도 한국 사회의 진정한 '다수'(?)인 사람들이었다. 민주화 세력은 6월의 거리를 메웠던 이들이 '다수'라 했지만(신생 좌파는 더 나아가 7~8월의 파업 노동자들을 부각시켰다), '보통사람' 담론은 그들을 뺀 나머지가 '다수'라 선포했다.

이런 '보통사람' 담론 덕분에 군부독재 잔당은 자기네에게 지극히 불리하던 세력관계를 역전시킬 수 있었다. '시민'과 '민중'의 대열이 군부독재정권을 포위하던 형세는 양김 씨의 분열에 더해 '보통사람' 담론의 효과를 통하여 무참히 와해됐다. 대신에 새롭게 이식된 '보통사람' 대 '비-보통사람'의 대립구도가 당시 막 진행 중이던 중산층의 성장과 서로 얽히며 한국 사회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점점 더 중산층과 동일시된 '보통사람'들이 지배하는 나라에서, 그 대열에 끼지 못한 이들(가령 비정규직, 저소득층 등등)은 실제 머릿수와는 상관없이 '소수'로 낙인찍히게 된다.

37년 전 '보통사람' 담론의 이러한 궤적을 살펴본 뒤에 한동훈 위원장의 '동료시민' 담론으로 다시 돌아오면, 강한 기시감을 느끼게 된다. '동료시민' 역시 한편으로는 시민 전체를 대등한 동료로 호명하는 따뜻하고 품이 넓은 말로 들린다. 분명 이것이 한동훈 진영의 노림수 중 하나일 것이다. 평생 타인을 심판하는 국가 기능의 수행자로 이름을 날린 이에게 민주적 대중정치가의 이미지를 부여하려면, 확실히 이런 무기가 필요할 법도 하다.

그러나 이번에도, 칼날은 한 쪽만 향하지 않는다. '동료시민'은 '동료'시민이기도 하다. 다시 한 번, 이 담론은 시민을 '동료인' 시민과 '동료 아닌' 시민으로 나눈다. '동료 아닌' 시민은 누군가? 한동훈은 '동료시민'이 누군지는 뚜렷이 밝힌 적이 없지만, '동료 아닌 시민'은 이미 분명히 지목했다. '86세대 운동권', '좌파 기득권 패거리'…. 이 이름들 아래에는 더불어민주당 정치인들뿐만 아니라, 떼인 임금을 받으러 쫓아 다녀야만 하는 노동조합원이나 소수자의 권리를 요구하기 위해 시위에 나설 수밖에 없는 이들까지 들어간다. 현 정부-여당에 적대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포함된다.

아무래도, 고상한 '공화주의'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다. 그보다는, 끊임없이 '적'과 '아'를 가르며 둘 사이에 혈투를 거듭하는 것이 정치의 본질이라 규정한 극우 법학자 카를 슈미트의 정치사상 쪽에 더 가깝다. 노태우의 '보통사람들'이 그랬고, 지금 한동훈의 '동료시민'도 그렇다. 둘 다 시민들이 다른 시민들과 싸우도록 만듦으로써('내전'의 조장) 지배 세력의 권력을 연장하려 한다. 시민 대다수가 혐오하는 통치자를 계승해야 하는 입장에 선 두 사람의 선거운동 담론이 이토록 닮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 민주노총 건설노조 강원지부 간부였던 고 양회동 씨의 빈소. ⓒ연합뉴스

진정한 '동료시민'의 정치 – 시민 참여 민주주의의 확대

만약 '동료'와 '비-동료'를 가르는 것이 목적이 아닌 진정한 '동료시민'의 정치가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 내가 보기에 가장 좋은 사례는, 윤석열-한동훈 궁정암투극의 발단이 된 대통령 부인 관련 의혹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국회는 이 의혹을 다룰 특검 설치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는 국회가 통과시킨 법안에 이미 여러 차례 그랬던 것처럼 특검법에 대해서도 완강히 거부권을 행사하려는 태세다. 여당 비대위원장이 대통령 부인 문제에 다른 목소리를 내는 바람에 대통령과 알력을 빚었다지만, 그렇다고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명시적으로 반대한 적은 없다. 윤석열 정부는 거부권 정치를 계속하고 있고, 여당에서는 다른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국회가 이렇게 입법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탓에 피해를 입는 것은 결국 시민들이다. 주권자인 시민을 대신해 입법 기능을 수행하는 게 국회의 역할인데, 대통령의 상습적 거부권 행사로 국회가 제 기능을 못하니 결과적으로 시민들의 입법권이 막혀 있는 셈이다. 노동조합 권리 확대를 바라는 목소리도, 김건희 특검을 원하는 목소리도 모두 봉쇄당한다.

이 상황을 해결할 근본 대안은 주권자인 시민이 입법권을 되찾는 것이다. 지금처럼 시민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두 헌법 기관이 충돌해 입법이 이뤄지지 못한다면, 시민들이 직접 입법권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가령 국회에서 의결됐는데도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여 입법에 실패하는 경우에 시민 발의를 통해 해당 법안을 국민투표에 부칠 수 있도록 헌법으로 보장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지금 대한민국에 꼭 필요한 개헌 내용일 것이다.

진짜 '동료시민'의 정치란 이런 것이다. 정치 엘리트, 관료 엘리트, 기업 엘리트가 아닌 동료시민들이 정치의 주도권을 쥘 수 있도록 전에 없던 민주주의 통로들을 여는 정치. 이러한 정치 혁명에 나서려는 정당이나 운동이라면, 감히 '동료시민'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게 아니라면, 우리에게는 그 옛날 '보통사람' 담론의 철 지난 반복에 맞설 지혜와 결단, 투지가 필요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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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준 전환사회연구소 기획의원은 오랫동안 진보 정당 운동의 정책 및 교육 활동에 참여해왔으며, 자본주의 위기에 맞선 진보적 사회과학을 재구성하고자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에서 연구 및 출간 사업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레프트 사이드 스토리 : 세계의 좌파는 세상을 어떻게 바꾸고 있나>, <사회주의>, <장석준의 적록 서재>, <신자유주의의 탄생 : 왜 우리는 신자유주의를 막을 수 없었나>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국가 대 시장 : 지구 경제의 출현>, <안토니오 그람시 : 옥중수고 이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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