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7일(이하 현지시간) 국정연설에서 "전임자"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13번이나 언급하며 날을 세웠다. 이날 한 시간 이상 격정적으로 연설한 바이든 대통령은 대선 의제로 임신중지권 보장을 내세울 것을 명확히 했다. 바이든 대통령의 가자지구 전쟁 정책에 대한 유권자들의 반발이 가시화되고 있는 가운데 가자지구에 항구를 건설해 해상으로 구호를 지원하겠다는 계획도 내놨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68분 가량 행한 연설에서 우크라이나 전쟁, 임신중지, 경제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나의 전임자"를 언급하며 트럼프 전 대통령과의 차이를 강조했다. 연설 시작 4분 만에 우크라이나 전쟁 관련해 "나의 전임자"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 "뭐든 원하는 대로 하라"고 말한 것을 상기시키며 이는 "용납될 수 없다"고 재강조했고 "나의 전임자"가 2021년 1월6일 미 의사당 폭동의 진실을 묻으려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또 트럼프 전 대통령이 대법관 3명을 추가로 임명한 뒤 보수 우위로 기운 미 연방대법원이 2022년 임신중지에 대한 헌법적 보호(로 대 웨이드 판결)를 철회한 것 또한 "나의 전임자"가 원인을 제공했다고 지적했다. 코로나19 대응 및 경제 문제, 이민자 법안, 총기 규제 등에 대해서도 "전임자"와 다른 대응을 했고 할 예정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단 트럼프 전 대통령을 직접 언급하진 않았다.
바이든 대통령은 "미국을 과거로 되돌리려는 이들과 미래로 나아가게 하려는 이들" 사이의 경쟁을 계속해서 봐 왔으며 자신은 "민주주의를 약화시키는 것이 아닌 지켜내는 미래"를 추구한다고 강조했다. 또 "내 또래의 다른 사람들"은 "분노, 복수, 보복"과 같은 "낡은 생각"을 추구한다고 꼬집었다. 앞서 바이든 대통령은 소셜미디어(SNS)에 밝힌 '슈퍼 화요일' 승리 성명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미국인이 아닌 개인적 복수와 보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비난한 바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연설에서 국내 사안 중 임신중지권에 대해 가장 먼저 언급하며 대선에서 이 문제를 전면에 내세울 것을 분명히 했다. 연설 전 미리 공개된 짧은 발췌본에서도 대법원이 뒤집은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법으로 복원할 것"이라는 내용을 선두에 배치했다. 연설엔 태아의 치명적 질환과 임산부의 건강 위협에도 텍사스주에서 임신중지를 거부 당해 다른 주에서 시술을 받아야 했던 여성이 초청됐다.
연설엔 앨라배마주에서 14달 전 체외 인공수정(IVF)을 통해 아이를 낳았지만 최근 앨라배마 대법원의 냉동 배아도 어린이로 간주해야 한다는 판결 탓에 배아가 훼손될 경우 처벌을 두려워 한 병원들이 난임 시술을 중단해 둘째 아이 체외 인공수정 계획을 미룬 앨라배마 주민도 초대됐다. 바이든 대통령은 "생식의 자유"를 옹호하며 체외 인공수정 권리가 보장돼야 한다고 말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연설에서 "이스라엘은 하마스를 쫓을 권리가 있다"면서도 "이스라엘엔 가자지구의 무고한 민간인을 보호할 근본적 책임도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가자지구에서 "팔레스타인인 3만 명 이상이 죽임을 당했다"는 수치를 언급하기도 했다. 이는 가자지구 보건부 집계를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바이든 대통령은 유엔(UN) 등 국제기구와 미국 정부에서도 인용해 왔던 가자지구 보건부의 사상자 집계를 신뢰할 수 없다고 시사하는 발언을 해 빈축을 사기도 했다.
가자지구에서 팔레스타인 사상자가 10만 명을 넘기며 미국 유권자들은 바이든 대통령의 가자지구 정책에 반대하고 휴전을 촉구하는 민주당 경선에서 '지지 후보 없음(Uncommitted)' 운동을 벌이고 있다. 지난달 미시간주에서 10만 명 이상의 유권자가 '지지 후보 없음'에 투표했고 지난 5일 '슈퍼 화요일'엔 미네소타주에서 19%가 '지지 후보 없음'에 기표되는 등 운동은 여러 주로 확산 중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지중해와 맞닿은 가자지구 해안에 임시 항구를 건설해 배를 통해 인도적 지원을 늘릴 것을 지시했다고 밝혔다. 이스라엘의 검사로 인한 구호 트럭 진입 및 수송 지연과 거부, 하마스 제거 뒤 치안 공백 상태와 오랜 굶주림으로 인한 구호 트럭 약탈 및 이들 주민에 대한 이스라엘군의 발포 등으로 육로 지원이 원활하지 않은 상황에서 나온 고육책으로 보인다. 최근 미국은 가자지구에 항공기를 통해 구호 물자를 투하하기도 했다.
미 행정부 고위 당국자는 관련해 실행까지 "몇 주"가 소요될 것이며 항구를 통해 "매일 트럭 수백 대 분량"의 구호품을 가자지구에 추가로 지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또 키프로스 라르나카 항구에서 이스라엘 당국이 물품을 검사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바이든 정부에서 대외원조기관 국제개발처(USAID) 고위 관리를 지낸 난민 지원 비영리단체 레퓨지 인터내셔널의 제레미 코닌딕 의장은 영국 일간 <가디언>에 해상 지원의 경우 진입 자체보다 "분배 단계"에서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스라엘이 모든 사람이 가자지구 북부에서 나가길 원했고 그 뒤로 접근을 제한하고 있기 때문에 북부에서 구호 단체의 존재는 0에 가깝다"며 "누가 (구호품을) 배분하겠는가?"라고 반문했다. 그는 "존재하지 않는 운전자, 존재하지 않는 트럭이 존재하지 않는 배분 시스템으로 공급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다만 그는 "매우 힘든 일이지만 시도해 볼 가치는 있다"며 "현 시점에서 도움이 되는 모든 것에 찬성한다"고 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연설에서 29살에 상원의원으로 당선된 뒤 부통령,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동안 "너무 어리다는 말도, 너무 늙었다는 말도 들어 왔다"며 "문제는 우리가 얼마나 늙었냐가 아니라 우리의 생각이 얼마나 낡았냐는 것"이라고 고령 관련 우려에 답하기도 했다.
그는 "혐오, 분노, 복수, 보복은 가장 낡은 생각들 중 일부"라며 자신은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선택할 권리 복구 및 다른 자유"를 지키며 "기후 위기로부터 지구를 구하고 총기 폭력으로부터 우리나라를 구하는 미래를 본다"고 덧붙였다.
미 CNN 방송은 바이든 대통령이 이날 고령에 대한 지지자들의 우려를 잠재우며 "힘이 넘치고 강력한" 연설을 내놨다고 평가했다. 방송은 이날 국정연설을 시청한 529명 미국 성인을 대상으로 문자 메시지를 통해 조사한 결과 65%가 긍정적으로 평가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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