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과 진보당, 새진보연합은 22대 총선용 비례연합정당인 '민주개혁진보연합(가칭)'을 다음 달 3일 창당하기로 했다. 이에 참여할 것을 요청받은 녹색정의당은 당내 논란 끝에 '비례연합정당'에는 참여하지 않지만, '윤석열 정권 심판'을 위해 지역구 선거연대는 적극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4년 전 총선에서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무력화하는 꼼수 정치의 상징이었던 '위성정당'이 이번 총선에서는 '반윤석열 연대'를 이룰 '연합정치'의 빅텐트로 돌변한 것이다. 특히 '위성정당' 비판에 앞장섰던 시민운동 세력이 '연합정치시민회의'로 결집해 이를 주도하는 후안무치의 행태를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참담하다.
'노동자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기치로 길게는 30여 년 이상 이어온 '진보정당운동'의 한 순환이 마감되고 있다. 2000년 낙천‧낙선운동 이후 '정책연대'와 '정치적 중립성'을 내세우며 형성된 '시민운동의 정치' 역시 마찬가지다. 민주당과 함께 비례명부를 작성하겠다는 것은 단지 이번 선거에만 적용될 '전술'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오랫동안 이어지고 있는 지역구 선거연대에 이어, 정당지지를 근간으로 하는 비례명부까지 공유하겠다는 것은 이제 민주당과의 선거연합이 상수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운동의 한 순환을 마감하는 이러한 큰 변화가 단지 '위성정당'이라는 꼼수 때문에 갑자기 일어났을 리 없다. '위성정당'을 넘어 근본적인 '정치의 위기', '민주주의의 위기'를 직시해야 한다.
그들만의 리그, '정치의 위기'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보수양당정치가 자본과 공모하여 만들어낸 지난 신자유주의 30년을 돌아보자. 비정규 불안정 노동의 확산은 가혹한 경쟁과 각자도생의 삶을 구조화했다. 성별, 학력, 연령, 지역 등은 생존경쟁의 자원이 되어 사회는 더욱 쪼개졌다. 그럴수록 '반차별‧평등'을 향한 열망도 커져갔지만 오히려 정치는 이를 부추기며 자신들의 정치적 자산 만들기에 몰두했다. 2007년 이후 20여년 가까이 차별금지법이 가로막혀온 이유이기도 하다. 주거, 의료, 교육, 교통, 에너지와 같은 사회공동체의 기반이 되는 물적 토대들은 지속적으로 민영화‧사유화의 흐름에 내맡겨졌고, 우리는 그 결과를 지난 몇 년동안 '부동산 시장 폭발', '전기‧가스 요금 폭등', '공공‧필수의료 붕괴', '학교‧교육 현장의 위기'로 경험하고 있다. 그리고 기후위기는 바로 자본이 이윤을 위해 사회와 자연을 가혹하게 착취, 수탈한 폐허의 다른 이름이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도 자본의 권력은 오히려 공고해졌다. 우리 삶의 모든 영역들이 신자유주의적 금융화 아래 놓였고 투자수익논리, 시장논리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이 되었다. 시장은 공정함, 정치는 불공정의 대명사가 되었다. 정치는 자본의 영역을 침범해서는 안되며, '경제정책'으로 자본에 대한 봉사를 수행했다. 그런데도 우리가 현재 겪는 삶의 위기와 고통, 분노는 '자본주의 체제'를 겨냥하지 못한 채, '정권 탈환'의 불쏘시개로 소비되고 있다. 바로 이것이 보수양당이 합심해 만들어 낸 정치의 핵심이다. 이것이야말로 '정치 위기', '민주주의 위기'의 본질이다. '반보수‧반윤석열 연대'는 이를 더욱 심화시킬 뿐이다.
'정치의 위기'를 심화시키는 '반보수‧반윤석열 연대'
2010년 지방선거 이후 본격화된, 진보정당을 포함한 사회운동의 '반보수 전선' 투쟁, '민주대연합' 선거전술의 역사와 뿌리는 깊다. 비례위성정당은 '반보수 전선' 투쟁의 2024년 판본인 것이다. 지금 우리가 마주한 현실은 선거 시기 횡행하는 '정치공학'의 결과가 아니라, 삶의 위기를 초래한 자본주의‧신자유주의 체제의 문제를 회피해 온 사회운동의 '정치적 전망의 부재'가 켜켜이 쌓인 결과다. 지난 30년동안 번갈아 집권해 온 보수양당을 누구나 쉽게 비판하지만, 보수양당이 자본과 함께 만들어낸 공고한 신자유주의 질서와 사회현실에 대한 저항은 점차 사라져갔다. 그러는 사이, 민주당은 보수정당이 아닌 민주진보세력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민주당은 김대중, 노무현 정권 시기 한국사회에 신자유주의의 기틀을 다진 정당이다. 80년대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사유화하며 스스로를 '민주주의 세력'으로 칭했지만, 신자유주의를 통해 정치로부터 독립적인 시장경제를 관철시키며, 정치의 한계를 설정하고 민주주의의 토대를 허물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2004년 민주노동당의 의회 진출로 가시화된 진보정당운동은 신자유주의 반대와 보수양당정치 타파를 외치며 '진보정치'의 지향과 전망을 벼렸다. 지금 오로지 '제3지대'를 외치며 이합집산하고 있는 이들의 내용없는 '보수양당정치 타파'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정치였다.
누군가는 그래도 지금 '윤석열 정권'을 막아내는 게 가장 중요하지 않냐고 되물을 것이다. '윤석열 정권'이 아니라, 윤석열 정권을 통해 이루어지는 자본의 폭력과 수탈을 막아내야 한다. 정말 윤석열이 아닌 이재명이면 우리의 삶이 달라질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건 누구나 예상할 것이다. 그럼에도 '반보수‧반윤석열 연대'가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민주당과의 정책연대를 넘어 정치연합에까지 이르게 된 데는 진보정당을 포함한 사회운동이 보수양당을 넘어설 새로운 정치의 전망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반보수 연대'를 넘어설 때 열리는 '사회운동의 정치'
지난 30년동안 보수양당이 공모하여 신자유주의 원리에 따라 한국사회를 해체하고 재편해왔지만, 그 방식은 상이했다. 국민의힘이 극우세력의 뒷받침 속에서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신자유주의를 관철시켜왔다면, 민주당은 신자유주의를 관철하기 위해 사회적 갈등을 관리하려 했고, 이는 정책과 재정을 통한 시민운동과의 거버넌스 기구 구축, 여의도 연합정치 시도로 이어졌다.
총선을 앞두고 정치개혁과 연합정치를 내걸고, 진보적 가치에 기반한 정치연합이 외쳐지지만 실상은 일부 진보정당과 시민운동의 '생존과 이해'가 달린 이합집산이다. 오직 '의석'을 따내기 위해, 각종 정책‧거버넌스 기구를 유지하기 위해 신자유주의 세력과 결탁한 것이다. 비례위성정당에 참여하지 않기로 했지만, 녹색정의당의 정치적 전망은 여전히 민주당과 함께하는 '반보수 연대'에 머물러 있다. 보수양당체제에서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전략이었던 선거법 개혁이 위성정당으로 막을 내린 상황에서도 말이다.
현장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정책연대나 거버넌스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지배체제'를 넘어서려는 사회운동이 이를 위한 '민중의 세력화'에 실패하고, 당장의 현안과 정책대응 그 다음을 예비하고 전략을 짜는 '운동의 이념과 전망'이 부재했다는 것에 있다. 운동이 축적해온 힘과 세력이 사라지고 미래에 대한 전망과 이념이 부재할 때 남는 것은, 오직 '생존'을 위한 운동의 앙상한 '현재'일 뿐이다.
체제전환을 향한 사회운동의 정치를 시작하자
하지만 22대 총선을 앞두고 벌어진 이러한 참담한 현실 속에 주저않지 않겠다고 선언한 사회운동들이 있다. 신자유주의와의 결탁으로 막을 내린 '시민운동의 정치'와 단절하고 '체제전환운동의 정치'를 시작하려 한다. 이는 신자유주의와 결탁한 연합정치를 비판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체제전환운동의 정치'는 자본주의 체제 변혁을 위한 투쟁 속에서 '정치'의 성격과 경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투쟁하는 민중이 정치적 주체로 세력화하는 과정이다. 또한 자본주의 체제와 단절하고 대안사회로 나아갈 운동의 이념과 전망을 밝히는 과정이다. 해방의 꿈을 잃지 않고, 삶의 현장에서 운동을 일궈온 모든 이들과 함께 이 기나긴 투쟁의 여정을 3월 23일 '체제전환운동 정치대회'에서 시작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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