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8월에 택배 물류센터 아르바이트를 처음 갔어요. 일할 데가 없어서 더 우울한 거예요. 제가 몸으로 하는 일을 해보지 않았잖아요. 이제 젊지도 않고."
-박선유 씨
무더운 여름, 물류센터 안은 박선유(46) 씨처럼 일용직 아르바이트를 하러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푹푹 찌는 더위에 몸도 마음도 어지러웠다. 박 씨는 서울 성북구에 있는 우촌초등학교(학교법인 일광학원) 행정실에서 일하던 교직원이다. 그는 20년 동안 치열하게 일했던 행정실 풍경을 떠올렸다.
우촌초에 처음 출근했을 때 박 씨의 나이는 스물셋. 학교 업무는 물론, 당시 학교법인 이사장이었던 이규태 일광그룹 회장(74)의 집안일에도 불려가 밤낮없이 일했다. 이 회장이 서울 성북동 저택으로 이사하던 날에는 이삿짐을 날랐다. 정원에서 집들이 파티를 하던 날에는 음식을 나르고 설거지를 했다.
박 씨는 우촌초에서 일하는 동안 아들 둘을 낳았다. 새벽 두세 시까지 이어지는 야근 때문에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지도 못했다. 차가운 행정실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유치원생 아이들을 재운 밤이 열 손가락으로는 셀 수 없을 정도다.
지금 박 씨는 가끔 일용직으로 일하면서 아이들을 돌본다. 그는 2019년 우촌초 스마트스쿨 사업 비리를 폭로한 이후 학교에서 쫓겨났다. 박 씨의 큰아들은 이제 중학생이 됐다.
"큰애는 이규태 회장 얼굴을 아니까, 뉴스 보고 '엄마랑 이모(공익제보자 유현주)는 지금 저 할아버지 때문에 힘든 거지?'라고 물어보고 그랬어요. 애들이 저한테 '엄마 일 언제부터 할 거야?'라고 물으면, 저는 '아직 학교 일이 해결 안 됐어'라고 답하고 말죠."
-박선유 씨
박 씨가 학교로 돌아가는 길은 간단하다. 학교 법인이 복직을 결정하면 된다. 하지만 학교 법인은 약 4년째 박선유 씨 등 공익제보자들의 복직을 거부하고 있다.
현실적인 길은 학교 법인과 서울시교육청의 소송전에서 교육청이 승소하는 것. 하지만 소송은 3년 6개월째 지연되고 있다. 현재 2심에만 2년 2개월째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
2019년 5월 우촌초의 교장 최은석, 교감 이양기, 교직원 유현주․박선유 등 공익제보자 6명은 학교의 스마트스쿨 사업 비리를 제보했다.
당시 이규태 회장은 학교 운영에 공식적으로 개입할 자격이 없는 '전' 이사장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 회장은 약 3억 원 정도로 알려져 있는 스마트스쿨 사업 예산을 약 24억 원으로 부풀리라고 지시했다.
함께 범행을 모의한 업체가 입찰에 선정되게 만들고, 용역대금을 되돌려받는 수법으로 교비 횡령을 계획한 것. 학교 법인 이사장을 포함한 이사회는 이 회장의 가족과 측근들로 구성돼왔다.
공익제보를 접수한 서울시교육청은 즉시 감사에 나섰다. 그 결과 스마트스쿨 사업 계약은 취소됐다. 하지만 학교 법인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공익제보자 6명은 전부 해임 또는 면직 처분을 받고 학교에서 쫓겨났다.
이듬해인 2020년 8월, 서울시교육청은 학교법인 일광학원 임원 모두의 취임승인을 취소했다. 2006년 11월부터 2020년 1월까지 무려 13년 이상 이사회가 제대로 운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사회 회의가 실제로 열리지 않았음에도 회의록을 허위 작성했고, 이사가 아닌 사람이 회의록에 대리서명 하는 식으로 방만하게 운영돼왔다.
이 회장과 당시 교직원 유현주 씨의 대화를 통해서도 이사회 운영이 엉망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규태 : "내가 이사회를 우리 학교에서는 안 했잖아? 알다시피 한 번도 안 했지마는."
유현주 : "이사회 그분들 회의도 그 전에 ○○○ 실장 때부터 계속 안 하고 (회의록을) 이렇게 막 만들고 그랬었잖아요?"
이규태 : "어, 그래그래."
-2018년 12월 이규태와 유현주의 대화 녹취 일부, 서울행정법원 1심 판결문 인용
애초에 임원을 선임할 때도 같은 문제가 있었다.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부실 이사회. 서울시교육청은 이사회 임원의 선임도, 그들이 내린 결정도 전부 무효라고 결론 내렸다.
공익제보자들은 기뻐했다. 그들의 용기가 결실을 맺었다고 생각했다. 이사회 임원 자격이 취소되면, 서울시교육청은 사학분쟁조정위원회를 통해 학교 법인에 임시이사를 파견하고, 그들은 학교의 정상화를 위해 2~4년간 이사회를 운영한다.
하지만 학교 법인은 그대로 물러나지 않았다. 2020년 9월 이들은 서울시교육청을 상대로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공익제보 하고 일광학원 임원 취임승인 취소 처분까지 1년여 시간이 지났어요. 임원 승인 취소하면 다 끝나는 줄 알았어요. 일광학원이 행정소송으로 맞서면서 문제가 심각해진 거죠. 소송이 이렇게 오래 걸릴 거라고 전혀 생각 못했어요."
-이양기 교사
1년 2개월이 지났다. 2021년 11월 행정소송 1심 판결은 서울시교육청의 승리였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한 달 뒤 학교 법인 측의 항소로 2심에 돌입했다.
또 1년이 지났다. 2022년 12월 2심 양측의 변론도 모두 마무리됐고, 이제 판결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학교 법인 측은 중요한 증거물을 발견했다며 변론기일을 다시 열어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다. 결국 한 차례 변론이 더 열렸다. 그리고 판결은 3개월 뒤, 2023년 3월에 내리는 것으로 연기됐다.
다시 2개월이 지났다. 그런데 이번엔 법원에서 변수가 터졌다. 판결을 코앞에 두고, 2023년 2월 재판부가 사건 '재배당 요청'을 한 것이다. 사유는 "변호사와 재판부의 연고가 있는 경우".
당시 2심 재판부 판사 한 명이 명예퇴직 의사를 밝혔다. 문제는 그 판사가 '공교롭게도' 학교 법인 측을 대리하고 있던 대형 A로펌의 변호사로 이직한다는 것. 재판부는 공정성 문제가 불거질 우려가 있다고 판단해 판결을 내리지 않고 새로운 재판부에 판결을 맡기기로 했다. 1년 넘게 진행해온 재판은 원점으로 돌아갔다.
또 다시 7개월이 지났다. 2023년 9월 새로운 재판부가 2심 재판을 다시 시작했다. 그 사이 학교 법인 측은 판사 출신 전관 변호사를 추가로 선임했다. 이미 변론은 끝난 상태였지만, 학교 법인 측은 새로운 카드를 꺼냈다. 이사 13명 개개인의 '이사직 취소 사유'를 한 사람씩 따로따로 따져봐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십수 년 동안 이사회를 열지도 않고 후임 이사를 뽑아왔는데, 그럼 (이사 취임 자체가) 아예 무효인 거죠. 그런데 원고(학교 법인 측)가 각각 개별 사례로 보자고 최근에 변론을 다시 시작한 겁니다. 이사 13명 사건을 개별적으로 다툰다면 소송이 몇 년은 더 갈 수 있어요."
-손영실 변호사, 서울시교육청 소송대리인
그리고 5개월이 더 지나 현재까지 왔다. 그 사이 두 번의 변론기일이 열렸다. 2심 판결 날짜는 아직 잡히지 않았다. 2심만 2년 2개월째. 1심부터 따지면 재판은 3년 6개월째 진행 중이다.
행정소송이 지연되면서 학교 법인의 이사들은 대부분 이사직을 유지하거나 임기를 무사히 마쳤고, 더러는 개방이사에서 이사로 선임됐다. 학교에는 여전히 이규태 회장의 측근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행정소송이 너무 지지부진해요. 스트레스도 상당하고, 이 회장 측근들을 학교에서 마주칠 때마다 너무 화가 나요. 저들이 왜 아직도 학교에서 근무하고 있나. 정말 학교에서 열심히 일했던 사람들은 (복직을 거부당해서) 근무를 못 하는 상황이고…."
-이양기 교사
학교에서 쫓겨난 교직원 중 일부는 해고무효소송을 통해 일부 복직했다. 하지만 학교 측이 복직을 끝까지 거부한 4명은 여전히 학교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2022년 10월 이양기 교사는 2년 8개월간의 법정 투쟁 끝에 복직에 성공했다. 학교는 과학전담교사인 그에게 교무실 책상 하나 내어주지 않았다. 이 교사는 그보다 이 회장의 측근들을 학교에서 마주치는 순간이 더 고통스러웠다. 복직을 거부당한 공익제보자들은 당장 생계를 걱정하고 있는데, 이들은 버젓이 학교에 출근한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 관련기사 : '회장' 비리 고발 교사, 복직한 학교에 책상이 없어졌다)
"이 싸움은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상대가 죽거나 내가 죽어야 끝나는 거예요. 서울시교육청이 행정소송에서 승소하지 않는 한 공익제보자들이 학교로 돌아갈 길이 없어요. 지금은 그래요. 만약 (서울시교육청이) 지면 영원히 못 돌아오는 거예요. 1심도 이겼고, 일단 끝까지 가보자고 (공익제보자들) 다들 얘기하는데, 만만치 않죠."
-이양기 교사
행정소송 결과는 공익제보자의 복직뿐만 아니라, 학교의 정상화를 위해서도 중요하다. 학교는 공공성을 가지는 교육기관이다. 이사회는 더 좋은 교육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학교의 돈은 아이들에게 더 좋은 교육을 제공하기 위해서 쓰여야 한다.
하지만 그동안 일광학원 이사회는 이규태 회장의 가족이나 측근으로 채워졌다. 이 회장의 지시에 따라, 이사회를 제대로 열지 않고 회의록을 허위로 작성해 학교의 대소사를 결정했다.
'무기중개상'이 본업인 이 회장은 다른 사건으로 이미 구속 수감된 상태에서, 2018년 우촌초 스마트스쿨 사업을 '옥중지시' 했다. 교비 24억 원을 집행하는 대규모 사업. 하지만 그 돈은 이 회장 개인의 주머니로 들어갈 뻔했다.
우촌초는 대한민국에서 학비가 가장 비싼 사립초등학교다. 2022년 기준 학부모 부담금은 연간 1468만 원에 달한다.
스마트스쿨 사업 비리가 밝혀지자, 우촌초 학부모 70% 이상이 2019년 2학기 등록금 납부를 거부했다. 이들은 서울시교육청 앞에서 비리척결 궐기대회를 열고, 공익제보자들을 향한 보복성 징계 처분이 부당하다고 외쳤다. 학교 법인이 제기한 소송을 기각해달라고 법원에 탄원서도 제출했다.
우촌초 구성원과 공익제보자들은 3년 6개월째 행정소송 판결을 애타게 기다리는 중이다. 재판이 지연될수록 학교 정상화라는 희망도 미뤄지고 있다.
"나중에 학교를 그만두더라도 (일단은 학교로) 돌아갈 거예요. (현 이사회가 물러나고) 이사회가 바뀌면 어떻게 학교를 운영하는지 지켜봐야죠. 저는 끝까지 우촌초에서 제대로 마무리할 거예요. 이양기 선생님도, 행정실 선생님들(유현주・박선유)도 마찬가지예요."
-공익제보자 최은석 씨
한편, 이규태 회장과 스마트스쿨 비리에 연루된 학교 관계자 등 12명은 형사 재판을 받고 있다. 2021년 12월 이들은 업무상횡령, 입찰방해 등의 혐의로 기소됐다. 하지만 이 재판 역시 2년째 1심 판결조차 나오지 않았다. (☞ 관련기사 : 책상 뺏긴 그 교사에게 학교는 또 '경고장'을 내밀었다)
기사가 작성된 13일, 우촌초 공익제보자들이 스마트스쿨 비리를 폭로한 지 1743일째 되는 날이다.
※ 이 기사는 <프레시안>과 <셜록>의 제휴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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