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빈(가명, 35세) 씨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하얀색 롱패딩에 검정 모자를 푹 눌러썼다. 얼굴의 절반 이상을 가리는 마스크도 잊지 않았다. 그가 도착한 곳은 서울고등법원 정문.
그는 익숙한 듯 법원 알림판 옆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이곳은 그가 피켓을 상시 보관해두는 아지트 같은 곳이다. 가장 먼저 손수 만든 피켓부터 소중히 챙겼다. 피켓에는 한 남자아이의 사진이 담겨 있었다. 활짝 웃고 아이의 모습 옆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재판장님, 이 세상 전부인 제 아들을 어디에서도 볼 수 없습니다."
사진 속 아이의 이름은 이시우. 계모와 친부의 학대로 열두 살에 죽은 아이. 아이의 몸과 다리엔 연필로 찍힌 흉터가 남아 있었다. 횟수만 약 200회, 아이는 입에 화상을 입어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초등학교 6학년 진급을 앞두고 있던 시우의 몸무게는 29.5kg(키 149cm)에 불과했다.
계모는 알루미늄 봉, 플라스틱 옷걸이 등으로 아이의 온몸을 수차례 때렸다. 그리고 약 16시간 동안 커튼 끈으로 책상 의자에 결박해놓기도 했다. 결국 그 다음 날 아이는 숨졌다. 지난해 초 이른바 '인천 초등학생 아동학대 사망 사건'으로 알려진 그 사건이다.
계모 A와 친부 B는 현재 구속 수감돼 있다. 계모는 애초 아동학대살해 등의 혐의로 기소됐지만, 재판에서 살해 혐의가 인정되지 않았다. 1심 법원은 A에게 아동학대치사 등의 혐의를 인정해 징역 17년을 선고했다. B는 상습아동학대 등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판결을 보고 친모 김정빈 씨의 가슴엔 응어리가 맺혔다. 김 씨는 일주일에 두 번 서울고등법원 앞에서 1인시위를 하고 있다. 이렇게라도 나서지 않으면 죽은 아이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어서다. 1인시위는 지난해 9월부터 5개월째 이어지고 있다. 그는 아이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미안함에 엄마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을 하고 있다.
지난달 31일 낮 12시께. 그날도 김 씨는 아이의 얼굴이 담긴 피켓을 들고 법원 앞에 있었다. 직장인들의 점심시간이었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김 씨의 앞을 지나갔다. 사람들은 오가며 그를 힐끔힐끔 쳐다봤다.
"피켓을 들고 서 있다 보면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어요. 시우를 기억해주시는 분들도 있고요. 그런 분들에게는 (제가) 재판부에 제출할 온라인 서명 참여를 부탁드려요. 저한테 따뜻한 커피도 주시고, 응원도 해주시는 분들 덕분에 힘이 나요."
꼭 이날과 비슷한 날이었다. 겨울바람은 여전히 차갑지만 한낮의 햇볕에는 이따금 봄의 온기가 묻어나던 날. 2023년 2월 8일, 김 씨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경찰이 '아이 상태가 많이 안 좋아서 와주셔야 할 것 같다'고 말했어요. 처음에는 보이스피싱이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대뜸 시우가 사망했다고 말하는 거예요. 설마 하는 마음이었죠. 우리 시우가 아닐 거다, 무슨 사고가 났나, 이런 마음으로 경찰서로 향했어요. 도착해서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경찰이 '아동학대로 수사 중'이라고 하더라고요. 누가 그랬냐고 물어보니까, '(계모와 친부) 둘 다요',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부검은 아이의 고통을 직시하게 해줬다. 머리, 몸통, 팔, 다리 어디 하나 성한 곳이 없었다. 멍과 출혈, 상처가 곳곳에 자리했다. 입안도 화상으로 남아나질 않았다. 2023년 2월 7일, 사망 당시 시우의 신장은 149cm, 체중은 29.5kg이었다. 약 1년 전 38kg까지 나갔던 아이였다. 부검 결과 사망의 원인은 '여러 둔력손상'이었다.
"장례식장에서는 죽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어요. '그냥 시우랑 같이 죽어야겠다.' 제가 아이 화장하는 걸 결정 못해서 장례가 좀 길어지기도 했어요. 춥고 비도 오는데 어떻게 아이를 보내요. 진짜 미칠 노릇이잖아요. 저희 아빠한테 '아빠는 내가 죽으면 화장할 수 있겠냐, 내가 어떻게 내 자식을 화장하냐, 못한다' 그랬죠. 가족들이 설득해서 일단은 화장을 하게 됐는데, 납골당 위치는 가까운 사람들밖에 몰라요. 혹시 누가 해코지할까봐 걱정돼서."
김 씨는 2018년 4월 시우의 친부 B와 이혼했다. 소송까지 간 이혼 과정에서 김 씨는 양육권과 친권을 모두 빼앗겼다. B보다 경제력이 부족하다는 게 큰 원인이었다. B는 2018년 3월부터 A와 동거하며 시우를 키웠다. 김 씨에게는, 한 달에 두 번으로 정해진 면접교섭권도 잘 보장되지 않았다.
"시우 만나러 학교를 찾아간 적이 있어요. 걔네(계모와 친부)가 저를 차로 불러서 소리를 치더라고요. '애한테 몇 천만 원씩 들여서 키우고 있는데, 네가 왜 자꾸 아이를 찾아와서 피해를 끼치냐'는 식으로요. 시우를 끔찍하게 생각한다고 말했으니까 학대를 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죠."
A와 B는 2022년 11월부터 홈스쿨링을 한다는 명목으로 시우를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시우는 매일 오전 6시에 일어나 오전 8시까지 성경을 필사했다. 이를 못하면 방에서 감금을 당하거나 장시간 벌을 받았다.
검찰은 계모 A를 아동학대살해 혐의로 기소했고, 사형을 구형했다. 친부 B에는 징역 10년을 구형했다.
김 씨는 최소한 법원이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거라 믿었다. 이미 죽어버린 아이와 아이 몸에 남은 흉터가 그들의 죄를 증명했으니까. 하지만 법원의 판단은 기대와 달랐다.
1심을 맡은 인천지방법원(재판장 류호중)은 지난해 8월 25일 A에게 아동학대치사 등 혐의를 적용해 징역 17년을 선고했다. 살해 혐의는 인정하지 않았다.
B 역시 1심에서 상습아동학대 및 상습아동유기·방임 혐의만 인정됐다. 검찰의 공소 사실을 보면, 학대 행위와 정도 및 횟수의 차이만 있을 뿐 B도 시우의 죽음에 상당한 책임이 있었다. 하지만 법원은 B에게 고작 징역 3년을 선고했다.
"1심 판결은 납득할 수 없습니다. 도대체 법이 피고인들의 편인지, 피해자들의 편인지 모르겠어요. 시우가 죽을 때 입고 있던 옷이, 일곱 살 때 제가 사준 내복이에요. (계모와 친부가) 애한테 그동안 아예 신경을 안 썼다는 거잖아요.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거죠. 애한테 밥도 안 주고 물도 안 줘서 힘든 애를 결박하고, 때리고, 그것도 모자라 (연필 등으로) 찌르고…. 이게 어떻게 살해 의도가 없었다는 거예요?"
시우는 사망 당시 열두 살 초등학생이었다. 자기가 겪은 일을 인지할 수도, 표현할 수도 있었던 나이. 하지만 아이는 학대의 고통을 속으로만 삼켰다.
"시우가 겪었던 시간, 그 아픔을 제가 어떻게 가늠할 수 있을지… 내가 대신 죽고 싶었어요. 이 비통함은 말도 다 표현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재판이 이렇게 끝난다? 이건 완전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쟤네(계모와 친부)들은 재판장에 수감 중에 낳은 딸을 데리고 나와서, 이제서야 시우한테 용서를 구한다고 말해요.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지…."
지난해 6월 8일자 뉴시스 보도에 따르면, A는 수감 중 출산한 갓난아기를 안고 공판에 출석했다. 아기가 보채는 소리를 내면 쓰다듬으며 달래는 모습도 보였다. A는 법정에서 "마땅히 해야 할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며 "아이(시우)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구한다"고 전했다.
그들은 "가정의 회복을 위해" 선처를 바란다고 말했다. B는 약 4개월 동안 87번의 반성문을 재판부에 제출했다.
재판은 2심으로 넘어갔다. 김 씨는 항소심 재판부에 기대하는 바가 크다. 검찰은 항소심에서도 계모 A에게 사형을, 친부 B에겐 징역 10년을 구형했다.
"솔직히 사형이 선고돼도 제 마음과 시우의 고통에 비할 바가 안 되죠. 법원에서 시우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헤아려준다면, 가벼운 처벌을 못할 텐데…. 항소심에서는 조금은 납득할 수 있는 판결이 나오길 바라요. 저는 너무 염치없고 미안한 엄마지만, (시우에게) '엄마는 최선을 다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 정도만이라도요. 하늘에서 시우가 조금이라도 편하게 쉴 수 있게 해주는 판결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이날은 김 씨 혼자 법원 앞을 지키지 않았다. 전국 각지에서 온 다섯 명의 시민들이 함께 자리를 지켰다. 이들은 대한아동학대방지협회(이하 협회) 온라인 카페를 통해 인연을 맺었다.
"시우가 꼭 제 아들 같아서 1인시위 현장에 나와요. 제 첫째 아들과 (시우가) 나이가 같아서 그런지 더 마음이 쓰이더라고요. 주변 엄마들, 단골 식당, 남편 친구들한테 다 부탁해서 가해자 엄벌 진정서 받고 다니고 있어요."
-대한아동학대방지협회 회원 C
1인시위를 시작하고 약 20분이 흘렀을 때, 중년 여성 두 명이 김 씨 앞에 멈춰 섰다. 피켓에 적힌 글을 읊조리듯 조용히 읽어 내려갔다. 김 씨는 온라인 서명 QR코드가 인쇄된 명함을 건넸다.
김 씨를 향하는 안타까운 시선. 시민들은 온라인 서명 참여를 약속하고 돌아섰다.
약 1시간 동안 이어진 고독한 시위. 점심시간이 끝나는 시간에 가까워지자, 현장을 지나가는 인파도 점차 줄어들었다. 김 씨는 처음 왔을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내내 그 자리를 묵묵히 지켰다.
함께 피켓을 들던 협회 회원들도 하나둘 자리를 떠났다. 김 씨는 그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한 회원과는 뜨거운 포옹도 나눴다.
곧이어 시위를 마친 김 씨는 서둘러 법원 민원실로 향했다. 자필로 작성한 엄벌 진정서를 손에 꼭 쥐었다. 항소심 선고 전 담당 판사가 진정서를 읽을 수 있도록 서둘러 제출해야만 했다. 지인들에게 엄벌 진정서 참여를 독려했던 협회 회원 C도 동행했다.
항소심 선고 공판은 2일 열린다. 항소심 선고 전 마지막 1인시위를 그렇게 마무리했다.
오후 2시경, 김 씨는 협회 회원들과 함께 한 식당으로 향했다. 협회 회원 배문상 씨가 운영하는 곳. 테이블마다 온라인 서명 QR코드가 인쇄된 명함들이 꽂혀 있었다.
"지난 5개월 동안 법원에서 1인시위를 마치면, 꼭 이곳으로 와서 회원들과 늦은 점심을 먹었어요. 1심 재판 때부터 인연 맺었던 회원들이 2심 재판 때까지도 직접 법원에 와주고 진정서도 같이 내주고 있어요. 이제는 진짜 친언니들 같아요."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은 사람은 더 있다. 그동안 그의 곁을 지켜준 시민들이다.
"이혼한 후에 암에 걸려서 병원이랑 집만 오갔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법원이랑 집만 오가요. 피켓 들고 함께 나와 계신 분들은 온라인 카페에 가입한 일반 시민 분들이시거든요. 혼자 1인시위를 시작했는데, 한두 명씩 와주셔서 같이 길에 서 있어 주시고, 진정서도 써서 내주시니까 힘이 되죠.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도와주신 게 미안해서 (제가) 죽고 싶어도 못 죽는 것 같아요. '저런 분들이 이렇게까지 시우를 위해주시는데, 나까지 죽으면 얼마나 더 마음이 아프실까' 이런 생각이 들면서 제가 더 나아갈 수 있는 것 같아요."
김 씨는 시우의 마지막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시우는 계모 A의 눈을 피해 몰래 집을 나와 편의점으로 가 음료수를 사먹었다. 편의점 테이블에 앉아 음료수를 마시다가 들켰고, A의 차를 타고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CCTV에 찍힌 그 모습이 시우의 마지막 흔적이었다. 다음 날 시우는 집에서 숨졌다.
"시우는 그냥 해맑고, 밝았어요. 아들이지만 마치 ‘딸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애였어요. 애교도 많고, 사랑도 많고, 정말 똑똑했어요. 보고 있어도 보고 싶고, 애틋하고 그런…. 같이 살 때 정말 애지중지 키웠어요. 음식도 단 한 번도 밖에서 인스턴트, 편의점 음식 먹인 적도 없어요. 그때그때 다 밥해서 먹이고 그랬죠.
그렇게 키운 시우의 마지막 모습이 몰래 편의점에서 음료수 먹던 모습이라서 제일 속상했어요. (시우가) 이미 많이 아픈 상태로 거기까지 갔는데, 돈도 없어서 거기에서 세일 하는 음료수를 샀어요. 입에 아픈 화상 자국도 있었는데 탄산음료를 사먹는다는 것 자체가 가슴 찢어지게 아팠습니다."
항소심 선고는 오는 2일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5일 후 시우의 첫 번째 기일이 김 씨를 기다리고 있다.
※ 이 기사는 <프레시안>과 <셜록>의 제휴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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