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심한 사과 말씀 드린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2년 전 여름 난데없는 '문해력 논란'이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군 적이 있습니다. 한 웹툰 작가의 SNS 메시지가 발단이었는데요, 일부 네티즌들이 '심심(甚深)'이라는 한자어를 '하는 일이 없어 지루하고 재미가 없다'라는 의미의 한글 단어로 오해하면서 빚어진 일이었습니다.
'문해(文解)'는 '글을 읽고 이해함'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문해력은 단지 문자를 읽을 수 있는 능력이라기보다 '이해력'까지를 포함하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심심'이라는 글자를 읽을 수는 있어도 '심심한 사과'의 '심심'이 어떤 뜻인지 모른다면 '의미적 읽기'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죠.
국회의원 선거가 다가오면서 바야흐로 여론조사가 넘쳐나고 있습니다. 어떤 조사결과를 보면 제1야당인 민주당이 유리할 것 같고, 또 다른 결과를 보면 여야 어느 한 편의 일방적인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울 것 같기도 합니다. 같은 시기에 조사된 결과가 왜 서로 다른지 의심이 가기도 하고요. 이런 현상을 이해하려면 여론조사가 보여주는 숫자의 맥락을 읽어내는 데이터 문해력이 필요합니다. 저는 여론조사가 '해석의 과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발표된 1월 4주차 2개의 여론조사 결과를 정당 지지도를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조사기관은 한국갤럽조사연구소와 리얼미터입니다. 자체 조사결과를 주 1회씩 정례적으로 발표하고 있어 비교하기 적합하다는 판단에서 이들을 선택했습니다.
한국갤럽은 이동통신 3사가 제공하는 휴대전화 가상번호를 사용해 무작위로 표본을 추출하는 방식을 사용합니다. 응답 방식은 전화 조사원 인터뷰인데, 전문 면접원이 전화 수신자와 직접 통화를 하며 조사를 진행합니다. 흔히 '전화 면접조사'라고 합니다. 리얼미터의 여론조사는 번호를 무작위로 생성해 추출하는 RDD(random digit dialing) 방식이며, 자동응답 전화조사로 진행합니다. 여론조사를 받으면 녹음된 성우음성이 나오고 보기를 선택해 전화기 버튼을 눌러 응답하는 방식입니다. 편의상 'ARS 조사'라고 부릅니다.
지난 1월 26일 갤럽이 공개한 조사 결과 중 정당 지지도는 국민의힘 36%, 더불어민주당 35%, 정의당 2%, 기타 정당/단체 5%, 지지하는 정당 없는 무당(無黨)층 22%로 나타났습니다. 국민의힘과 민주당의 격차는 1%포인트인데 통계적으로 오차범위(최대 6%포인트) 내의 차이이므로 우열을 가릴 수 없다고 해석해야 합니다. 29일 발표한 리얼미터의 정당 지지도는 더불어민주당 45%, 국민의힘 37%, 정의당 2%, 진보당 2%, 무당층 6%였습니다. 양당 간 차이는 8%포인트로, 오차범위 밖의 격차라 민주당이 우세하다고 분석할 수 있습니다.
같은 시기의 조사 결과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차이가 크다고 느껴지시죠? 이런 결과를 접하곤 대번에 '여론조사는 믿을 게 못 돼'라는 반응을 보이는 분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한국갤럽과 리얼미터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에 등록된 조사기관입니다. 공표한 조사 결과 역시 중앙심의위원회 홈페이지에서 누구라도 세부 사항까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조사가 잘못된 것도 아닐 텐데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온 걸까요?
두 기관의 조사에서 가장 의미 있는 차이는 전화 면접(한국갤럽)이냐, ARS(리얼미터)냐, 하는 점입니다. 이를 데이터 표집 방식이라고 하는데요, 조사방법이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현상을 '모드 효과(mode effect)'라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모드 효과는 조사 참여자의 성향을 갈라 결과의 차이를 가져오는 요인으로 작용합니다. 그러니 서로 다른 여론조사 결과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방법론이라는 변수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있어야겠죠.
리얼미터와 같이 ARS 방식을 사용하는 여론조사에는 정치 고관여층의 응답이 더 많이 표집됩니다. 무당층의 비율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한국갤럽은 22%, 리얼미터는 6%입니다. 내가 정치에 별 관심도 없고 선호하는 정당도 없는 사람이라고 가정해봅시다. 전화가 와서 받아보니 정치·선거 여론조사입니다. 만약 녹음된 음성이 플레이되는 ARS 조사라면 그냥 끊어버리고 맙니다. 그런데 전화를 받았는데 면접원이 잠깐이면 된다고, 잠시만 시간을 내 달라고 호소하면 마음이 약해져 조사에 참여할 수도 있겠죠. 평소 지지하는 정당이 있냐는 면접원의 질문에 '없는데요'라고 응답했다면 나는 22%의 무당층에 속하게 되는 겁니다.
한국갤럽과 마찬가지로 전화 면접으로 조사를 진행하는 전국지표조사(엠브레인퍼블릭/케이스탯리서치/(주)코리아리서치인터네셔널/(주)한국리서치 공동)에서도 1월 4주차 조사 결과 무당층이 26%로 나타났습니다. 무당층의 규모로 분석해 볼 때 전화 면접조사는 ARS 조사보다 정치 관심도가 일반적인 수준이거나 관여도가 낮은 응답자의 의견이 다수 포함되는 방식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정당 지지도 차이도 살펴보겠습니다.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요, 한국갤럽과 리얼미터 두 기관의 조사에서 국민의힘 지지도는 36%, 37%로 거의 차이가 없는데 비해 유독 민주당 지지도만 35%, 45%로 10%포인트나 차이가 납니다. 이런 결과로 볼 때 현재는 정치 고관여층 중 민주당을 지지하는 성향의 사람들이 더 많은 유권자 지형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각 정치 세력에게는 어느 선거나 중도·무당층으로 외연을 확장하는 전략이 승패에 결정적입니다만, 지금은 핵심 지지기반에서 다소 밀리는 국민의힘이 좀 더 절실한 처지에 놓여 있는 상황으로 판단됩니다.
민주당은 공직선거 후보자를 평가하고 심사하고 선출하는 데 ARS 방식의 여론조사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당원과 일반 유권자의 의견을 절반씩 반영한다는 취지입니다만, 앞서 살펴본 모드 효과에 따르면 상당히 적극적으로 민주당을 지지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의 선택이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칠 것 같습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 현재의 방식이 가진 함의를 이해한다면, 더 폭넓게 유권자의 의견을 수렴하고 공직 후보자를 추천하기 위해 보완할 부분은 없는지 고민이 필요해 보입니다.
미국의 철학자인 제이슨 브레넌(Jason Brennan)은 <민주주의에 반대한다(Against Democracy)>라는 다소 도발적인 제목의 책에서 유권자를 호빗(반지의 제왕), 훌리건(스포츠의 광적인 팬), 벌컨(스타트렉)의 세 유형으로 분류합니다. 호빗은 투표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로, 정치에 관심도 없고 지식도 많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훌리건은 꾸준하게 투표에 참여하며 정치에 관해 나름의 확고한 신념을 지녔지만, 정치지식을 편향된 방식으로 소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저자에 따르면 대다수 정치인도 훌리건에 속한다고 합니다. 벌컨은 정치에 관심이 있지만 증거를 바탕으로 냉정하고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려는 이성적인 유권자를 뜻합니다. 아주 소수에 불과하다네요.
우리 사회에서 정치적 양극화와 사회 분열은 어제오늘 얘기가 아닙니다. 정치와 정치인에 대한 불신과 혐오뿐 아니라 주요 정치 세력 간, 그 지지층 간 대립과 증오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죠. 각 정당 지도부가 쏟아내는 메시지, 편향적이고 자극적인 유튜브 채널 등이 계속해서 독설에 열광하는 정치 훌리건을 양산하고 있습니다. 정치가 이렇게 흘러가는 게 우려스럽습니다. 부디 많은 시민이 편견 없이 정치지식을 습득하기를, 사실에 근거해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기를, 그래서 우리가 더 좋은 공직자를 가질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오늘의 여론조사 독해법은, 여러분이 모두 균형 잡힌 뾰족한 귀의 벌컨족이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소개해 드렸습니다.
한국갤럽 1월 26일치 조사는 언론사 의뢰 없이 자체 시행됐다. 지난 23∼25일(1월 4주) 전국 만 18세 이상 유권자 1001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로, 표본오차는 95% 신뢰 수준에 ±3.1%p다. 조사는 무선전화 가상번호 인터뷰로 진행됐으며 응답률은 16.7%였다. 리얼미터가 29일치 조사는 에너지경제신문 의뢰로 지난 22∼26일(1월 4주차) 전국 18세 이상 2506명을 대상으로 조사(95% 신뢰수준에 오차범위 ±2.0%포인트)한 결과다. 두 조사 모두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조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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