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9월 26~27일 열린 최고인민회의 회의에서 '핵무력강화 정책기조 헌법화'를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지난해 9월 최고인민회의에서 '국가핵무력정책을 법제화한 데에 이어 사회주의 헌법 제4장 58조에도 이를 명시함으로써 불가역적 핵보유국으로서의 입지를 분명히 하겠다는 속셈이다.
특히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현 단계 핵무력 강화의 중대과제는 핵무력의 급속한 질량적 강화"라며, 기하급수적인 핵무기 증산과 핵타격수단 다종화 실현, 그리고 여러 군종에 강력한 실전배치를 주문했다. 여기서 눈에 띠는 대목은 '기하급수적인 핵무기 증산'이다. 이는 김 위원장이 작년 말부터 부쩍 강조해온 바이지만, 북한이 과연 이러한 능력을 갖고 있는지는 의문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저명한 핵 전문가인 미국의 지그프리드 헤커 박사의 진단과 우려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9월 21일 자 <38노스>와의 인터뷰에서 북한의 핵물질 대량 생산 능력은 제한적이라며, 러시아의 지원이 복병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우선 북한의 플루토늄 생산 능력이 '기하급수적인 핵무기 증산' 목표와는 거리가 멀다고 진단한다. 영변에 있는 5메가와트 원자로의 연간 플루토늄 생산량이 핵무기 1개 분량인 6kg 수준이고, 실험용 경수로에서도 플루토늄을 생산할 수 있지만, 본인이 2010년에 방문해본 이후 13년이 지난 2023년 9월 현재에도 가동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또 소련이 1960년대에 지어준 IRT-2000 원자로는 소련 붕괴 이후 원자로 연료를 공급받지 못해 가동 중단 상태에 있다고도 덧붙였다. 더구나 수소폭탄 제조에 필요한 삼중수소도 원자로에서 생산해야 하는데, 삼중수소 생산을 늘릴수록 플루토늄 생산량은 줄어들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헤커는 러시아가 다양한 옵션을 갖고 있다고 본다. 러시아가 북한의 실험용 경수로 가동을 지원하거나 IRT-2000 원자로 연료를 공급하는 방식으로 북한의 핵 능력 강화를 도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특히 "러시아가 은밀히 플루토늄을 북한에 제공할 가능성이 가장 큰 우려"라고 말했다. 구소련은 모두 12만 5000kg의 플루토늄을 생산했고 이 가운데 상당량을 러시아가 보유하고 있는데, 그 일부를 북한에 보내는 데에는 "기술적인 장애물"이 없다는 것이다.
헤커는 또한 북한의 고농축 우라늄 생산 능력도 연간 150kg에 해당하고 2010년부터 2023년 9월 현재까지 약 1200kg을 생산한 것으로 추정한다. 이는 핵무기 약 50개에 해당되는 양이다. 북한은 고농축 우라늄을 많이 보유하고 있고 추가 생산 능력을 갖고 있는데 왜 플투토늄이 필요한 것일까?
이에 대해 헤커는 플루토늄이 고농축 우라늄보다 핵탄두 소형화 및 수소폭탄 제조에 유리하다고 분석한다. 그는 아울러 러시아가 고농축 우라늄, 핵실험 및 장거리 미사일 시험발사 정보 등을 북한에 제공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물론 헤커의 우려는 아직까진 기우라고 할 수 있다. 북러의 무기 거래는 아직까진 가시화되지 않은 가능성의 영역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또 러시아가 북한의 핵 능력 강화를 지원하는 것은 유엔 안보리의 대북 결의를 정면으로 위반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핵확산금지조약(NPT) 정신에도 위배된다. 안보리 상임이사국이자 NPT 탄생의 주역 가운데 하나였던 러시아가 섣불리 북핵 지원에 나서기는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비관적인 전망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우선 미국의 '내로남불'을 지적할 수 있다. 미국은 인도가 1998년 여러 차례의 핵실험을 실시하고 핵보유를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인도에 대한 제재를 해제했다. 심지어 2005년에는 인도와 원자력협정을 체결해 "평화적 목적의 핵 이용"을 지원해오고 있다.
또 최근에는 미국·영국·호주 3자 안보협력(AUKUS)을 통해 호주의 핵추진 잠수함 개발을 지원하고 있다. 러시아가 이러한 사례를 들먹이고 평화적 목적을 앞세워 북한의 핵 능력 강화 지원에 나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보는 이유이다.
이렇듯 핵비확산체제가 크게 흔들리고 있는 데에는 강대국들의 지정학적 셈법의 변화가 주된 원인으로 똬리를 틀고 있다. 미국이 인도 및 호주의 핵 능력 강화를 지원하는 데에는 '전략적 경쟁자'로 부상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속성이 강하다. 러시아 역시 대북 제재에 동의했을 때와는 달리 지정학적 환경이 크게 달라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대안의 실마리도 이 지점에서 찾을 수 있다. 유엔 안보리 및 공식적인 핵보유국들인 미국·중국·영국·프랑스·러시아 등이 지정학적 경쟁과 대결을 완화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당면 과제는 하염없이 길어지고 있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출구를 찾는 것이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그래서 지정학적 대결이 첨예해질수록 북러 간의 무기 거래 및 러시아의 북핵 개발 지원 가능성도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 정욱식 소장은 최근 신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북한이 온다>를 출간했습니다. 변화된 북한과 그에 따른 동북아시아 향후 정세 및 남한이 나아가야 할 대외 정책 방향을 모색해보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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