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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착취물 제작에 기습 성추행범, 용서 없어도 돈만 내면 형량 줄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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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성착취물 제작에 기습 성추행범, 용서 없어도 돈만 내면 형량 줄여준다

[해설] 일방·기습 공탁 통한 '성폭력 감형전략', 어떻게 해결할까

"피고인은 피해자로부터 용서받지 못하였다. 다만 피해자를 위하여 상당금액을 공탁한 점을 피고인에게 유리한 정상으로 참작한다."

성폭력 가해자가 법원에 돈을 낸다. 피해자는 가해자를 용서하지 않았지만, 그 돈이 가해자의 형량을 줄인다. 지난해 12월 형사공탁특례제도가 시행된 이후로 법원에서 자주 볼 수 있게 된 풍경이다.

술에 취해 잠든 대학 동기를 상대로 구강에 성기를 집어넣는 등 유사강간한 A 씨, 고등학생 피해자를 대상으로 노출 촬영을 지시하는 등 성착취물을 제작한 B 씨, 술자리에 동석한 피해자의 특정 부위를 움켜잡는 등 기습적으로 추행한 C 씨, 중증 지적장애인인 피해자에게 탈의를 지시하고 특정 부위를 강제 추행한 D 씨...

모두 합의에 이르거나 용서를 받지 못했음에도 피고인이 '상당 금액을 형사공탁했다'는 점이 양형상의 유리한 정상으로 작용한 사례다. 항소심에 있었던 A 씨와 B 씨의 경우 원심의 형량이 감경됐고, 1심중이었던 C 씨와 D 씨는 집행유예로 징역을 피했다.

해당 판결들에서 재판부는 피해자가 △피고인을 용서하지 않았고 △상당한 정신적 충격에 빠져있으며 △피고인의 엄벌을 탄원하고 있는 점 등을 판결문에 명시했다. 다만 가해자의 공탁사실은 이와 별개로 가해자에게 유리한 정상으로 취급된다. 성범죄 양형기준표상의 형량감경 사유에 "상당한 피해회복(공탁 포함)"이 명시돼 있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공탁을 위해 주민등록번호 등 피해자의 인적사항이 필요해 일방적 형사공탁이 어려웠다. 그러나 공탁을 시도하려는 가해자들이 피해자의 개인정보를 불법 수집하는 등 2차 가해 사례가 이어지면서 이에 대한 대안으로 형사공탁특례제도가 시행됐고, 그러자 '피해자의 동의 없는 일방적 공탁'이 수월해지는 또 다른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 12월 9일 형사공탁 특례제도가 시행된 후로 성범죄 등 폭력 사건에서 형사공탁변제신청 건수가 늘어나고 있다. 지난해 7월 일어난 인하대 성폭력·사망사건의 가해자(사진) 또한 재판 과정에서 1억 원 상당의 금액을 공탁한 바 있다. 당시 유족 측은 공탁금 수령을 거부했다. 올 1월 인천지법은 해당 사건 가해자에게 준강간치사죄로 징역 20년형을 선고했다. ⓒ연합뉴스

새로운 감형 전략된 공탁제도… 피해자 대응 차단하는 '기습공탁'도

성폭력 법률지원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도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상근 변호사는 형사공탁특례제도의 시행 이후 "실제로 (전략적인 공탁 감형 사례가) 늘어났다는 체감이 든다"고 말한다. 피해자와의 교류 없는 일방적 공탁이 가능해진 만큼, 공탁이 가해자 측의 새로운 감형 전략으로 급부상하고 있다는 말이다.

법원 판결문 열람 서비스를 통해 제도가 시행된 2022년 12월 9일부터 2023년 6월 9일까지 반년간의 관련 판결문을 확인했다. 해당 기간 동안 강간·추행·성폭력특례법 등과 관련한 판결에서 "피고인은 피해자에게 용서받지 못했다"는 점을 명시하면서도 피고인의 형사공탁 사실을 양형상의 감경사유로 적용한 판례가 215건에 이르렀다. 특례제도 시행 이전 2022년 6월 9일부터 12월 8일까지 반년의 경우 같은 사례는 8건에 불과했다.

특례제도가 시행된 시점을 이용해 극적 '반전'을 이뤄낸 사례도 있었다. 지난해 9월 만취한 피해자의 양손을 묶고 그를 강간한 혐의로 징역 4년을 선고 받은 피고인 E 씨는 특례제도 시행 이후 이뤄진 항소심에서 5000만 원의 금액을 법원에 공탁, "피해 회복을 위한 진지한 노력"을 인정받아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이 재판부 역시 E 씨가 "피해자로부터 용서받지 못했다"고 판결문에 명시했다.

피해자 측 변론이 종결된 이후 이루어지는 '기습공탁'에 대한 긴장감도 높아지고 있다. 피해자 측이 이의 의견을 제출할 수 없도록 변론이 종결된 이후 기습적으로 행해지는 공탁이다. 선고 직전에라도 공탁 사실을 인지한 경우엔 피해자가 의견서를 제출할 수 있지만, 이는 선고에 직접 영향을 줄 수 없는 참고서류에 불과하다. 아예 인지 자체를 하지 못해 선고 후에야 '피고인이 공탁을 했고, 그로인해 감형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경우도 많다.

이 같은 상황에 대한 우려는 이미 존재했다. 박미정 사법정책연구원 연구담당관은 지난해 11월 열린 '사법보좌관 제도와 형사공탁 특례 제도의 현안과 쟁점' 토론회에서 "피해자에 대한 진지한 반성과 피해 회복을 위한 노력 없이 피고인의 경제력 자체가 피해 회복 노력의 정도로 평가됨으로써, 현실적으로 형사공탁제도가 남용될 가능성이 있다"라며 "공탁이 남용되지 않도록 대책을 강구해 나가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법원 내부에서 특례제도 남용의 문제를 이미 예상했음에도, 그에 대한 적절한 보완책은 설계되지 않은 셈이다. 이 변호사는 "피고인들이 공탁을 위해 피해자 개인정보를 알아내려 하는 등 2차 피해를 유발하는 문제는 현장에서 충분히 공감된 사안"이라며 특례제도의 취지를 인정하면서도 "다만 법원은 '피해자의 의사에 반한 공탁' 자체에 대한 문제의식은 얕았던 것으로 보인다"고 평했다.

재판부 따라 대우 달라지는 '피해자 의사' … 성범죄 양형기준표 개선해야

어떤 공탁이 '실질적인 피해회복'에 해당하는지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은 없을까. 현재로선 모든 판단이 재판부의 재량에만 달려있는 상황이다. 피해자가 공탁에 대한 거부의사를 명확히 밝힌 경우에도 재판부에 따라 그 의사가 반영될 수도, 전혀 반영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실제로 서울고등법원은 지난 2월 진행된 아동·청소년의성보호에관한법률위반 관련 2심 재판에서 "피해자의 부친이 피고인에 대한 엄벌을 탄원하고 있다"면서도 "(피고인이) 변론종결일 후 피해자에 대한 손해배상금으로 2000만 원을 공탁"한 점을 "원심의 양형을 변경할 만한 특별한 사정변경에 해당한다"고 판결했다. 피해자 동의가 없이 이뤄진 '기습공탁'을 피해자 측의 의사도 고려하지 않은 채 '피해회복'이라 판단한 것이다.

이 변호사는 성범죄 양형기준표가 '상당한 피해회복(공탁 포함)'에 대해 "명확한 해석을 첨부하지 않고 있다"는 점을 핵심적인 문제로 꼽았다. "무엇이 '상당한 피해회복'인지에 대한 공식적인 기준이 명시돼 있지 않으니, 공탁에 대한 양형 판단이 판사의 재량에만 맡겨지게 되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디지털성범죄 양형기준표의 경우 감경요소인 '상당한 피해회복(공탁 포함)'에 대해 "피고인이 피해 회복을 위한 진지한 노력 끝에 합의에 준할 정도(재산적 피해만 발생한 경우에는 그 손해액의 약 3분의 2 이상)로 피해를 회복시키거나 그 정도의 피해 회복이 확실시되는 경우"라고 공식적인 해석을 덧붙이고 있다. 공탁이 피해회복으로 평가받기 위해서는 합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피해자의 의사'가 반영돼야 한다는 점을 기준으로 제시하고 있는 셈이다. 이 경우 판사가 피해자의 의사를 조금이라도 더 고려하는 것이 하나의 경향성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 이 변호사는 "일반 성범죄의 경우 이 같은 기준 자체가 제시되고 있지 않아 판사가 피해자의 의사를 반영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것으로 여겨버릴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이 변호사는 "(공탁 남용 방지를 위해) 지금 당장 제도적으로 바꿀 수 있는 부분은 일반성범죄 양형기준표에 해석을 다는 것"이라며 "아예 '피해자의 의사를 반영한다'는 표현을 포함하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그게 어렵다면 최소한 디지털성범죄 양형기준표에 있는 정도의 해설이라도 지금 당장 설시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는 특례제도 시행 이전인 지난해 6월 대법원 양형위원회에 제출한 의견서를 통해 '성범죄 양형기준'의 감경 사유 중 '피해자의 동의 없는 공탁 제외' 조항을 삽입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피해자의 피해 회복이 형사공탁특례제도의 목표라면, 공탁에 대한 "피해자의 의사를 살피고 반대 의사를 확인하기 위한 과정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는 게 이들의 입장이다.

"중요한 것은 피해자의 마음"… 법원 내 '성폭력 이해도' 높아져야

공탁 남용 문제는 결국 형사공탁 제도 자체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합의 이외의 금전 공탁이 형량을 줄일 수 있다는 점엔 소위 '유전무죄'를 둘러싼 형평성 문제와 정의 관념에 관한 논쟁 소지가 있다. 미국의 경우 해당 사유를 들어 재산범죄가 아닌 폭력범죄의 경우 금전 공탁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다만 법원이 공탁을 감형 요소로 삼는 데에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성폭력 등 폭력범죄의 피해자는 범죄로 발생한 손해를 금전적으로나마 배상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시간이나 비용의 감수, 신원노출 등의 이유로 손배 관련 민사소송을 진행하지 못하는 피해자들에겐 형사공탁제도가 피해회복의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

이 변호사는 "공탁을 감형 사유로 삼는 것이 (피해회복을 위한) 공탁 제도를 활성화시키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는 생각한다"라면서도 "다만 배상 받을 권리는 범죄 피해자가 당연하게 가지는 민법상의 권리다. '당연한 보상'을 했다고 가해자가 (재판에서) 유리해지는 건 문제의 소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공탁 남용 방지를 말하는 피해지원 단체들 사이에선 민법상의 손해배상 소송을 가명으로 진행할 수 있게 하는 등의 대안도 제시되고 있다. 민사소송 시의 신원노출 부담을 덜어 손해배상 소송을 활성화하면 형사공탁의 필요성이 그만큼 줄어들 수 있다.

다만 이 변호사는 '공탁을 감형 요소로 삼느냐, 마느냐' 여부 보다 '재판 과정에 피해자의 의사가 적절히 반영되고 있는가'에 먼저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현행 성범죄 양형기준표는 '2차 피해 야기'를 가중처벌 요소로 명시하고 있지만 △피해자의 가해자 용서 여부나 △공탁에 대한 피해자의 거부 의사 등은 '2차 피해'에 해당하지 않아 일반양형인자로 고려되지 않고 있다. 재판에서 기습공탁 등이 감경요소로 고려될 경우 피해자의 심리와 실제 양형수위 사이에 괴리가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 변호사는 "피해자가 원하지 않는 공탁을 하고, 가해자가 그 공탁 통해 감형을 호소하는 것 자체가 피해자에게는 심리적인 2차 피해 아닌가" 물으며 "법원은 피해자가 회복하기 위해 '정말로 무엇이 필요한가'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지난 12일 성명을 통해 "(피고인이) 기습공탁을 할 시 선고를 연기하고 피해자의 의사를 확인하는 것" 등 현실적인 보완책을 제시하기도 했다. 

여성폭력방지기본법 제3조는 여성폭력 피해자의 '2차 피해'에 대해 "수사·재판·보호·진료·언론보도 등 여성폭력 사건처리 및 회복의 전 과정에서 입는 정신적·신체적·경제적 피해"라는 설명을 첨부하고 있다. 재판 결과나 그 과정 상의 특이점이 피해자 및 주변인 평판 등에 강력한 영향을 끼치는 성범죄의 경우, 2차 피해의 범위를 특히 더 폭 넓게 해석할 필요가 있다. "근본적으로, 법원이 성폭력 피해와 피해회복이란 개념에 대해 이해도를 높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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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섭

몰랐던 말들을 듣고 싶어 기자가 됐습니다. 조금이라도 덜 비겁하고, 조금이라도 더 늠름한 글을 써보고자 합니다. 현상을 넘어 맥락을 찾겠습니다. 자세히 보고 오래 생각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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