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의 전‧현직 총통이 각각 중국과 미국을 방문하면서 국내 정치가 강대국 간 대리전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강대국 간 충돌이 벌어지는 동아시아에서 상대적으로 국력이 약한 국가가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29일 <연합보>등 대만 언론은 차이잉원 대만 총통이 9박 10일의 일정으로 중앙아메리카 순방길에 올랐다고 보도했다. 매체는 차이잉원 총통이 대만의 수교국인 과테말라와 벨리즈를 방문할 예정인데, 뉴욕과 로스엔젤레스 등도 방문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차이잉원 총통은 이날 출국에 앞서 발표한 담화에서 "대만과 글로벌 파트너들이 서로 돕고, 권위주의 확장에 대응해 함께 민주주의를 수호해 나가자"라며 "이번 방문은 우방과 교류 의지를 심화시키는 것"이라며 순방의 성격을 분명히했다.
그러면서 차이잉원 총통은 이번 방문이 세 가지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첫째, 대만은 자유민주적 가치를 확고히 수호하고, 러-우크라이나 전쟁과 천재지변 등의 도전에 맞서 국제사회가 필요로 하는 한 힘을 보태고, 난관에 부딪히면 민주적 파트너를 지원한다"고 말했다.
이어 차이잉원 총통은 "민주경제의 핵심 세력인 대만은 우방 및 유사한 이념의 국가와 농업 기술, 의료 공중 보건, 여성 권한, 공급망 및 기타 분야에서 협력할 것"이라며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대만은 공급망을 재구성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역할"을 하고 있다고 자평했다.
그는 "대만의 세계화 결심이 더욱 확고해질 것이며, 대만은 세계의 대만"이라며 "외부의 압력은 우리의 세계화 결심을 방해하지 않을 것이며, 냉정하고 자신감 있고 굴복하지 않으며, 도발하지 않을 것이며, 민주주의의 길을 확고히 갈 것"이라며 중국의 개입에 대한 반대 의지를 분명히 했다.
차이잉원 총통은 이번 방문에 케빈 매카시 미 하원의장과 만남을 계획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해 대만을 찾은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에 이어 이번에도 하원의장과 만남을 가지면서 대만의 존재감을 확실하게 부각시키기 위한 의도로 풀이된다.
차이잉원 총통의 이같은 계획에 중국 당국은 민감한 반응을 내놨다. 중국 국무원 대만판공실 주펑롄 대변인은 이날 정례 브리핑에서 차이잉원 총통과 매카시 하원의의 만남에 반대하며 "반드시 반격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주 대변인은 "(차이잉원 총통이) 매카시 의장과 만난다면 이는 '하나의 중국' 원칙을 위반한 것이고 중국의 주권과 영토의 완전성을 훼손하는 것"이라며 이를 "또 하나의 도발"이라고 규정했다.
앞서 지난해 8월 중국은 펠로시 하원의장의 대만 방문 당시 대만을 포위하는 형태의 군사 훈련을 진행하며 대만을 압박한 바 있다. 이에 이번에 차이잉원 총통이 실제 미 하원의장과 만남을 가질 경우 중국이 군사를 동원해 다시 한 번 무력 시위를 벌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한편 차이잉원 총통 집권 전인 2008년부터 2016년까지 총통을 역임했던 국민당 소속의 마잉주 전 총통은 27일부터 중국 방문 일정을 진행하고 있다. 차이잉원 총통이 속한 민진당에 비해 마잉주 총통이 속한 국민당은 전통적으로 중국 대륙과 적극적 교류를 강조해 왔다.
특히 마잉주 총통의 이번 중국 대륙 방문은 국민당 정부가 대만으로 철수한 이후 74년 만에 대만의 전·현직 총통을 통틀어 처음으로 이뤄졌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이처럼 전‧현직 총통이 각각 중국과 미국을 찾으며 어긋난 행보를 보이는 이유는 내년 1월 대선을 대비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민진당과 국민당이 각각 자신들의 우군인 미국과 중국의 지지를 받는 모습을 보이면서, 대만 유권자들에게 두 강대국 중 어느 쪽을 택할 것인지를 선택하게 한 셈이다.
미국과 중국의 대리전이나 다름없는 내년 선거에서 어느 세력이 정권을 가져갈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민진당이 우세했던 가운데 지난해 11월 치러진 지방선거에서는 야당인 국민당이 승리했고, 이후 지지율에서도 국민당이 4년 만에 민진당을 앞서고 있다는 여론조사가 나오기도 해 민진당의 정권 재창출을 확신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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