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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간 배달하다 사망했으나 산재 불가, 사장이 둘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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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간 배달하다 사망했으나 산재 불가, 사장이 둘이라?

[오민규의 인사이드 경제] 특수고용·플랫폼 노동자들이 박물관으로 보낸 전속성 기준

40대 후반의 박 씨가 두 아이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생계수단은 음식 배달이었다. 작년 1월, 그녀는 별도 운송수단 없이 도보로 매일 12시간, 무려 8만 보를 걸어서 배달 일감을 처리했다. 배달의민족, 쿠팡이츠 … 일감을 받을 수만 있다면 플랫폼을 가리지 않았다. 하루 1만 보도 쉽지 않은데 매일 8만 보라니!

사장이 둘이라서 산재보험 적용 불가?

힘겹게 벌고 아껴서 2월에는 전기 자전거 한 대를 장만했다. 아픈 다리로 오르막길이라도 만나면 너무 힘겨웠지만 이젠 전동 바퀴가 생겼다. 하지만 보통의 자전거와는 구동 원리가 달랐기에 연습은 필수였다. 그래서 2, 3월에는 배달 일감을 많이 처리할 수 없었다.

일감을 늘려가던 3월 30일 낮 12시경, 배달을 위해 전기 자전거를 타고 강남 고속버스터미널 사거리를 지나던 그녀는 5톤 트럭에 치여 사망하고 말았다.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런데 더 믿기 힘든 소식이 뒤따랐다. 산재보험료도 착실히 납부했건만 이 안타까운 죽음에 산재보험이 적용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니 왜? 지난 글에서 다룬 얘기를 떠올리면 된다. 하늘 아래 사장이 둘일 수 없는데 박 씨는 배달의민족과 쿠팡이츠, 2곳으로부터 일감을 받았으니 안 된다는 것이다. 만일 그녀가 배달의민족, 혹은 쿠팡이츠에서만 일감을 받았다면 사장이 하나이기에 산재보험이 적용되어 보상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서울 시내에서 이동하는 배달 라이더. ⓒ연합뉴스

빌어먹을 ‘전속성 기준’

뭐 이런 황당한 법이 있단 말인가. 그런데 있었다. 퀵서비스, 대리운전, 학습지교사, 보험모집인, 레미콘 기사 등 특수고용 노동자의 경우 산재보험이 적용되기 위해서는 “주로 하나의 사업에 노무를 상시적으로 제공”해야 한다는 이른바 ‘전속성 기준’을 충족시켜야 한다.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박 씨와 같은 배달대행 노동자는 ‘음식물 늘찬배달업체’ 즉 퀵서비스업체 소속이 되어 특수고용으로 분류된다. 고용노동부는 배달업의 경우 이 전속성 기준을 ‘월 소득 115만 원, 종사시간 93시간 이상’으로 정했다.

만일 배달의민족, 쿠팡이츠 중 어느 한 곳에서만 일을 했다면 일한 시간과 무관하게 전속성 기준을 충족한 것으로 본다. 하지만 두 곳 이상에서 일을 했다면 어느 한 곳에서는 저 기준을 충족해야만 산재보험이 적용된다. 안타깝게도 박 씨의 경우 2~3월에 새로 구입한 전기 자전거 연습을 하느라 어느 업체에서도 이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 거다.

12만 대리기사 중 산재보험 가입자 12명?

그 결과 특수고용 노동자의 산재보험 적용 현실도 황당한 수준이다. 노조 추산 20만 명, 정부 추산 12만 명에 달하는 대리운전기사 중 산재보험 가입자 수는 얼마일까? 놀라지 마시라. 2021년 12월말 현재 꼴랑 12명이다. 12만 명이 아니라 12명이라니!

이 역시 그놈의 전속성 기준 때문이다. 배달 라이더의 경우 2~3개의 플랫폼을 통해 일감을 얻지만 대리운전기사의 경우 사용하는 앱이 10개 가까이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니 고용노동부가 제시한 전속성 기준, 한 업체에서 소득과 종사시간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충족시키는 기사가 얼마나 될까? 12명이나 된다는 사실이 오히려 놀라운 일이다.

국회 환노위 의원들을 통해 고용노동부로부터 제출받은 특수고용 산재보험 가입자 현황 자료를 보면 그 현실이 고스란히 드러난다.(아래 표) 산재보험에 가입한 대리운전기사는 2018~2020년 사이 2~4명에 불과했다. 정부 추산 40만 명에 달하는 배달 라이더와 퀵서비스 기사의 경우 2021년 말에야 겨우 10만을 넘어섰다.

또 하나의 허들, 적용제외신청 제도

사실 특수고용 노동자들의 산재보험 가입에는 전속성 기준 말고도 ‘적용제외신청’이라는 커다란 장애물이 하나 더 있었다. 산재보험은 사회보험이기에 강제가입이 원칙이다. 원하든 원치 않든 무조건 가입해야 한다. 그런데 특수고용에만 예외조항을 두었다. 산재보험 적용을 제외해달라는 서류를 제출하면 가입이 안되는 거다.

사용자가 부담해야 할 보험료도 내기 싫고 산재 관련 책임도 지기 싫은 사용자들은 계약을 체결할 때 아예 산재보험 적용제외신청서를 함께 들이민다. 이걸 작성하지 않으면 일감을 안 주겠다는 으름장이다. 그러니 특수고용 노동자들에게 산재보험 가입은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었다.

이게 얼마나 큰 장애물이었는지는 특수고용 산재보험 가입자 수의 변화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적용제외신청 제도가 사실상 폐지된 2021년, 산재보험 가입자 규모가 18.3만 명에서 76.2만 명으로 전년(2020년) 대비 무려 4배로 치솟게 된다. 특히 보험설계사·방문강사·골프장캐디·택배기사·퀵서비스기사 가입 규모가 급증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낡은 틀 깬 특수고용·플랫폼 노동자 저항

특수고용 노동자들은 산재보험 가입이 허용된 시점(2008년)부터 적용제외신청 제도 폐지를 내걸고 투쟁을 전개해왔다. 그들의 저항은 2012년 대선에서 당선된 박근혜 후보까지도 적용제외신청 제도 폐지를 공약으로 내걸도록 만들었다.

대선 직후 여야 합의로 국회 환노위까지 통과되긴 했으나 권성동 의원을 비롯한 새누리당(현 국민의힘)이 법사위 통과를 방해하며 제도 폐지가 좌절되고 말았다. 하지만 특수고용 노동자들의 끈질긴 투쟁 끝에 마침내 2020년 12월 9일 적용제외신청 사유를 엄격히 제한하는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게 되었다.

‘전속성 기준’의 경우 앞서 언급했던 박 씨의 사망사고 직후(작년 3월말) 라이더유니온이 윤석열 당선자 인수위를 상대로 제도 폐지를 요구하며 투쟁을 시작하게 된다. 빠른 속도로 인수위 면담과 협상이 시작되었고, 마침내 지난해 5월 29일 국회 문턱을 넘게 된다. 산재보험 전속성 기준 폐지는 윤석열 정부 출범 후 통과된 1호 노동법안으로 기록되었다.

특수고용 산재보험 가입을 가로막고 있던 2개의 거대한 장애물, 적용제외신청 제도와 전속성 기준을 폐지시킨 중요한 원동력은 특수고용·플랫폼 노동자들의 저항이었다. 시대는 빠르게 변화하는데, 내가 노무를 제공하는 사장이 둘 셋 아니 열 스물까지로 늘어나는데, 사장이 하나여야만 노동법·사회보험 적용이 가능하다는 구시대적 유물을 박물관으로 보내버린 것이다.

▲5일 오전 서울 종로구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앞에서 열린 배달노동자 산업재해 문제 해결을 위한 인수위 면담요청 기자회견에서 박정훈 라이더유니온 위원장 등 참가자들이 인수위원회로 면담요청서를 배달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특수고용 산재보험 가입 100만 명 시대

2017년까지도 6만 명에 머물렀던 특수고용 산재보험 가입자 규모는, 적용제외신청 제도를 폐지시키며 4년 만인 2021년 76만 명으로 무려 10배 이상 폭증했다. 전속성 기준 폐지 법안은 지난해 국회를 통과했지만 효력이 발생하는 시점은 올해 7월 1일이다. 그렇다면 올해 하반기에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될까?

우선 12명에 머물러 있던 대리운전기사 산재보험 가입자 수가 10만 명 이상으로 늘어날 것이다. 퀵서비스기사로 분류되어 있는 배달 라이더들 역시 2~3배 규모로 가입이 급증할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76만 명이던 특수고용·플랫폼 산재보험 가입자 규모는 올해 연말이면 이제 100만 명 시대를 열 것으로 예상된다.

결코 과장이 아니다. 가입에 장애물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산재보험에 비해서는 비교적 문턱이 낮은 고용보험의 경우, 이미 지난해 4월 현재 특수고용·플랫폼 가입자 규모가 100만 명을 넘어선 상태이다. 끈질긴 저항으로 고용보험보다 가입 문턱을 더 낮춰버린 산재보험의 경우 100만 번째 가입자가 나타나는 것은 시간 문제라 할 수 있다.

보험료와 세금은 1건당 떼어가면서

여기서 궁금증이 하나 생긴다. 배달 라이더나 대리운전기사처럼 다수의 사장, 다수의 플랫폼과 앱을 사용하는 노동자들의 경우 사회보험료는 어떻게 징수하고 있을까? 놀랍게도 이들의 경우 배달이나 운행 1건마다 보험료를 계산해 원천징수를 한다. 3.3% 소득세도 마찬가지다. 세금과 보험료 징수를 위해 무려 국세청이 동원된다.

특수고용·플랫폼 노동자들이 벌어들이는 개개인의 수입규모는 물론이고 건별로 얼마를 받았는지까지 국세청이 모조리 파악하여 1건당 사회보험료와 세금을 거둬들이고 있다. 노동자들이 수행하는 일감은 모조리 플랫폼 서버에 기록되고 저장되기 때문에 집계에 누락되는 건수는 단 한 건도 없다. 월급 생활자만큼이나 투명한 유리지갑이라 할 수 있다.

문재인 정부 시절부터 기획재정부가 예상한 세금 수입보다 훨씬 많은 세금이 걷혀지고 있었던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플랫폼·특수고용 노동자들의 소득수준을 파악해 호주머니에서 빼가는 데에는 이토록 용의주도한데, 이들에게 사회보험을 적용하고 노동기본권을 보장하는 데에 역대 정부들 모두 신경쓰지 않았다는 거다.

다른 상상력은 불가능한가

하려고 하는 이는 방법을 찾고, 회피하려는 이는 구실을 찾는 법이다. 노동자와 사용자는 반드시 일대일 대응 관계여야 한다, 사장이 둘 이상이면 노동법과 사회보험 적용이 불가능하다는 구시대적 발상을 깨기 위해 특수고용·플랫폼 노동자들이 끊임없이 방법을 찾으려 했다면, 정부와 자본가들은 그게 안된다며 핑계 찾기에만 골몰해 왔다.

자, 그렇다면 우리의 상상력은 여기에 머물러선 안 된다. 1건당 세금과 산재보험료 산정과 징수도 가능한데, 그렇다면 건강보험도 지역가입이 아니라 직장가입으로 운영할 수 있는 게 아닐까? 노무제공을 통해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하도록 하려면 1건당 최저임금에 해당하는 최저기준을 만들어볼 수는 없을까?

바로 그 상상력에서 출발해 만들었던 제도가 바로 화물운송 분야의 ‘안전운임제’였다. 운송 1건당 화물트럭기사들이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하도록 하기 위한 적정 운임의 최저기준을 정한 것이다. 운행하는 구간, 거리, 도로비, 운송물품의 중량, 차량 크기에 따라 달라지는 무려 1300여 가지의 운임을 설계해 3년 동안 성공적으로 운영해온 것이다.

심지어 안전운임제는 화물트럭 기사가 노동자인가 자영업자·프리랜서인가를 묻지 않고 적용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노동자들에게나 적용할 수 있다고 믿었던 최저임금과 같은 제도를 노무를 제공하는 모든 이들, 일하는 모든 사람에게 확대할 수 있다는 매우 중요한 선례를 만들어낸 것이다.

시대가 변화하고 노동의 형태, 노사관계도 격변을 겪고 있는데 여전히 낡은 틀이 새로운 노동의 역동성을 구속하고 있다. 노동기본권을 자꾸 제한하려고만 하고, 사회보험과 안전망에서 배제하려고만 한다. 하지만 낡은 틀을 깨고 새로운 제도를 만들어내는 원동력은 노동자들의 저항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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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민규

노동문제연구소 '해방' 연구실장입니다. 2008년부터 <프레시안>에 글을 써 오고 있습니다. 주로 자동차산업의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문제 등을 다뤘습니다. 지금은 [인사이드경제]로 정부 통계와 기업 회계자료의 숨은 디테일을 찾아내는 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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