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흐로닝언(Groningen)시는 자전거 천국이다. 자전거 도로는 물론, 자전거만을 위한 신호등이나 지하주차장도 있다. 자전거 운전자들만의 수신호도 있다. 좌회전하려면 왼손을 내리고 흔들어서 뒷사람한테 알리는 식이다.
도로를 점령하고 빠르게 달리는 자전거에 오히려 보행자들이 눈치를 본다. 조금이라도 한눈팔면 곧바로 날카로운 괴성의 네덜란드어가 들려온다. 말투로 파악하건데 "조심 좀 해줄래?"라기 보다는 "눈 똑바로 뜨고 다녀!"였을테다. 몇 번의 호통을 경험한 뒤로는 왠지 모르게 주눅이 든 채로 거리를 걸었다. 보행자로서는 경험해보지 못한 기분이었다.
자전거가 '왕'인 도시에서 자전거를 타면 어떤 느낌일까 궁금해 직접 자전거를 타보기로 했다. 때마침 인터뷰 장소가 숙소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의 호스피스 병동이었다. 숙소에서 픽시 자전거를 빌렸다. 브레이크 없는 허전한 핸들을 잡고 몇 번의 급정거와 충돌 위험을 겪은 후에야 인터뷰 장소로 출발할 수 있었다. 눈대중으로 배운 수신호를 따라하기 위해 손을 허공에 휘적휘적 거리며 페달을 밟았다.
"우리는 백퍼센트 주민들을 위하는 정치인입니다"… 정치인의 뻔하고 흔한 말이 아니었다?
지난 8월 30일, <프레시안>이 자전거를 타고 만나러 간 주인공은 '100% 흐로닝언을 위한 도시정당'(Stadspartij 100% Voor Groningen) 소속 시의원 암루트 지볼츠(Amrut Sijbolts) 씨였다. 사전취재 당시 정당의 이름을 본 순간부터 흥미로웠다.
흐로닝언시는 네덜란드 흐로닝언주의 주도(州都)다. 주의 경계는 북해와 만난다. 이 지역정당의 이름은 한국으로 치자면 '100% 해운대구를 위한 도시정당' 정도가 될 것이다. 그냥 '흐로닝언을 위한 도시정당'으로 이름을 정할 수 있었을 텐데 굳이 '100%'를 강조하는 게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정치인이 흔히 내뱉는 공허한 구호처럼 느껴졌다.
'100%'의 이유는 시의원 암루트 씨에게 첫 질문을 던지자마자 알게되었다. "왜 지역정당을 창당했나요?"라는 물음이었다. 이 정당에 '100%'의 의미는 개발만 신경 쓰는 다른 시의원을 향한 비판인 동시에 진짜 주민을 만나는 정치를 하겠다는 이들만의 선언이었다.
'100% 흐로닝언을 위한 도시정당' 대표인 암루트 씨는 인도에서 태어나 7살 때 네덜란드로 입양을 왔다. 그의 사촌동생 중에는 한국에서 입양을 온 이도 있다고 전했다.
이후 호텔 레스토랑에서 일하다가 지역정당을 창당하고, 어느새 시의회에서 최장수 의원이 되었다. 레스토랑에서 일했다는 경력을 들어서일까, 그가 입고 온 하와이언 셔츠에 계속 시선이 갔다. 그는 시선을 강탈하는 꽃무늬와 함께 "주민들만을 바라보면서 정치를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라며 진지하게 말했다.
가스 추출로 무너진 도시...중앙 정치인은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않았다
흐로닝언은 유럽연합(EU) 내 최대 규모의 가스 매장지다. 1963년부터 가스 추출을 시작했다. 네덜란드 정부는 흐로닝언 내 천연가스 추출로 많은 수입을 얻었다. 가스 추출이 활발히 진행되던 1980년대만 하더라도 정부 전체 세수에서 가스 판매가 차지하는 비율이 15%에 달했다.
그러나 가스 추출로 인해 흐로닝언은 무너졌다.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집들이 무너졌다. 지진이었다.
과학자들은 천연가스를 추출 후 생겨난 공간에 지반 침하를 막기 위해 폐수 등을 집어넣는 기존의 관행이 단층간의 균열을 일으켜 인근 지역에 지진을 발생케 했다고 분석했다. 셰일가스를 추출할 때 주로 사용했던 '수압파쇄법' 또한 지진의 원인으로 지목됐다. 셰일층의 가스 추출을 위해 물·모래 등 다양한 혼합물을 고압으로 땅에 밀어넣으면서 암석간 균열이 생겨 흐로닝언 가스전 인근에 지진을 유발했다. 강도 3.5 이상의 지진이 기록될 정도로 피해가 컸다.
흐로닝언대학교 경제연구소가 2018년 발간한 '흐로닝언 내 가스 생산과 지역' 보고서에 따르면 흐로닝언은 1991년부터 지속적으로 지진피해를 입었다. 주민의 집이 무너지고, 기반 시설도 주기적으로 파괴됐다. 연구소 조사에 따르면 1991년부터 2018년까지 8만5000여 회의 지진 관련 민원이 주민들로부터 제기됐다.
흐로닝언 내 가스 추출 이득은 국가 전체로 귀속되는데 정작 흐로닝언 주민은 지진 피해를 입었다. 주민들이 정부로부터 제대로 된 보상도 받지 못했다고 암루트 씨는 지적했다.
시의회가 지진 피해에 침묵하는 사이 주민들은 가스 산업에 터전만 내어줬다. 암루트 씨는 지진 피해는 흐로닝언 주민이 감수함에도 가스 추출로부터 얻은 이익은 모두 대도시로 돌아갔다고 주장했다.
도시 전체를 바꾸지는 못하지만… 꾸준히 주민 목소리 내는 지역정당
100% 흐로닝언을 위한 도시정당은 다른 정당들과는 지역 문제를 대하는 방식이 달랐다. 다른 중앙정당과 지역 지부들이 가스 수출로 인한 수입을 중시하며 지진 등 지역 주민 피해를 쉬쉬할 때, 이들은 지속적으로 가스 추출량을 과감하게 줄여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2001년부터 꾸준히 지역의 목소리를 낸 덕분일까. 네덜란드 정부 또한 가스 추출량을 감축해 늦어도 2024년까지 가스전을 폐쇄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주민들의 지속적인 지진 피해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최근 유럽 전역을 강타한 에너지 안보 문제로 가스전 완전 폐쇄 계획은 늦춰졌으나 감축 계획에는 변함이 없다.
물론 이 흐름이 100% 흐로닝언을 위한 도시정당만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일은 아니다. 다만 가스 추출이 흐로닝언 지역 지진 피해와 관계가 있다는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정부의 초기 대응을 바꾸는 데는 지역정당, 흐로닝언대 연구소, 시민사회의 힘이 컸다고 암루트 씨는 말했다.
100% 흐로닝언을 위한 도시정당은 도시 전체를 바꾸거나, 굵직한 정책을 곧바로 실현할 수 있는 힘 있는 정당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주민들은 끝까지 지역의 목소리를 내는 지역정당에 표를 주었다.
100% 흐로닝언을 위한 도시정당은 현재 흐로닝언 시의회 45석 중 4석을 차지해 지역정당 중에서 의석수가 제일 많다. 중앙의회에서 제1당을 차지할 정도로 세력이 큰 네덜란드 자유민주국민당(VVD)이 차지한 의석(3석)보다도 많다.
이처럼 지역정당이 지방의회에서 중앙정당보다 많은 의석을 차지하는 경우는 흐로닝언 뿐만의 일이 아니다. 2018년 네덜란드에서 발표된 논문 '지역정당의 선거 승리를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를 보면 네덜란드 전국 지방선거에서 중앙정당보다는 지역정당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네덜란드 기독민주당(CDA), 자유민주국민당(VVD), 사회민주당(PvdA)의 지방선거 의석 점유율은 1998년 60%에서 2018년 38%로 쪼그라들었다. 반면 특정 지역에만 존재하는 지역정당의 비율은 같은 기간 25%에서 37%로 늘어났다. 지역정당 의석이 존재하지 않는 지방의회는 전체 도시 중 2%밖에 되지 않는다.
100% 흐로닝언을 위한 도시정당은 이처럼 커져가는 네덜란드 내 지역정당의 위상을 잘 보여준다. 매 선거마다 꾸준히 3석 이상의 의석을 차지하는 안정된 모습을 보인다. 100명~120명이 되는 주민들이 매년 당비 30유로(약 4만2000원)를 내며 당원으로 활동한다. 당원들은 주기적으로 열리는 공청회에 참여해서 의견을 내고, 선거 때는 비례대표 순번을 정하는 일에도 참여한다.
왜 지방선거에 대해 중앙정당 대표가 토론을 할까?
주민들의 단단한 지지를 받는 지역정당이지만 고민은 있다. 지역정당을 소외시키는 정당 지원 제도다.
네덜란드는 중앙의회인 상원과 하원에 의석이 있어야만 정당 보조금을 지급한다. 지방의회에 의석이 많더라도 지방선거에만 나서는 지역정당은 정당 보조금을 받지 못한다. 오히려 지방의회에서 의석이 더 적은 중앙정당이 지역정당 대신 보조금을 받아가는 일이 발생한다.
암루트 씨는 이런 보조금 차별 문제가 지역정당 성장을 막고 있다고 지적했다. 다른 중앙정당처럼 당 차원의 정책개발 연구소도 만들고, 당원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싶어도 재정 문제로 인해 한계가 있다고 그는 토로했다.
재정뿐만 아니라 미디어에 노출되는 빈도에도 차이가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TV 토론 기회의 차별이다.
보조금도 못 받고, TV 토론회에도 나가지 못하지만 희망적인 건 지역정당들이 꾸준히 의석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흐로닝언 시의회만 해도 지역정당 의석 수를 합치면 전체 의석의 20%에 달한다. 비록 제도상의 차별과 한계가 있더라도 정당 설립의 자유와 선거제도의 변화만으로도 큰 변화가 나타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수치다.
네덜란드는 정당 설립에 제한이 없으며 선거 또한 개방형 비례대표제를 채택한 국가다. 의석을 차지하기 위한 최저 득표율인 봉쇄조항도 없어 소수정당의 의회 진입이 쉽다. 중앙의 지원과 미디어의 관심 등에 한계가 있더라도 비례대표제와 봉쇄조항 철폐로 대표되는 두 제도의 변화만으로도 주민들의 지지를 받는 지역정당 탄생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바비큐 파티에서 나누는 자질구레한 문제들
최근 지방선거를 성공적으로 마친 100% 흐로닝언을 위한 도시정당은 요즘은 큰 이슈 없이 내부 활동을 정비하고 있다. 이슈가 없다고 해서 가만히 쉬는 것만은 아니다. 6주마다 당원들이 모여 바비큐 파티를 하면서 다양한 이슈들을 편하게 이야기하는 행사가 열린다.
당원들이 모인 바비큐 파티의 주된 주제는 먹고 사는 이야기다. 어느 공원에 쓰레기가 많아졌다거나, 불량 청소년들이 특정 지역에 모인다는 등의 자질구레한 지역 문제들이 이야기 무대에 오른다.
암루트 씨는 "그런 생활밀착형 문제를 해결하는 게 지방정치의 역할"이라고 힘줘 말했다. 어느새 12년째 시의원 활동을 하는 그는 여전히 시의원이라는 직업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하며 인터뷰를 마쳤다.
(통역=장광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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