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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된 광복을 원한다면 풀뿌리 정치와 지역정당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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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된 광복을 원한다면 풀뿌리 정치와 지역정당부터

[복지국가SOCIETY] 지역정당 창당 운동을 시작하자

77번째 광복절을 보냈다. 광복의 의미를 되새기기 보다는 광복절에 누가 특사로 나오는 가에 정치권의 관심이 쏠렸다. 제사보다는 젯밥에 관심이 많은 권력자들의 면모를 다시 엿볼 수 있다. 광복절은 일제 식민 상태에서 해방됨을 기리는 날인 동시에 해방 후 3년간의 미군정시대를 마감하고 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기념하는 날이기도 하다.

광복절은 1949년 9월 21일 국회가 제정한 '국경일에 관한 법률'에 근거해 국경일이 됐다. 첫 번째 기념식은 1949년 8월에 열려야 했지만, 법률이 49년 9월에야 제정된 탓에 한국 전쟁 중에 임시 수도인 대구에서 1950년 8월 15일에 초라하게 열렸다. 두 번째 기념식은 51년 임시수도였던 부산에서 열렸다. 기념사에 이승만 당시 대통령은 제3회 광복절을 기념한다는 것을 기념사에 밝히고 있었지만, 당시 신문들이 '광복 6주년 기념식'이라고 보도하면서 광복절 기념대상이 48년이 아니라 45년으로 굳어져 버렸다고 역사학자들은 주장한다.

광복인가? 독립인가? 해방인가?

77번째를 맞이하는 8.15를 당연히 광복절로 부르지만, 당시 이승만 정부의 입법 명칭에는 '독립기념일'로 제안되었다. 이후 국회의 입법과정에서 ‘광복절’로 명칭이 변경됐다. 이름의 변경은 단순해 보이지만,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하이데거의 주장처럼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1945년 광복이후 1949년 국경일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기 전까지는 그냥 8·15라고도 했고, 해방 1주년, 해방기념일, 독립 3주년 등으로 다양하게 불렸다. 광복절이라는 명칭은 1949년 국경일에 관한 법률이 제정된 이후에 비로소 전면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름을 두고 당시 국회에서는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먼저 '독립'이 '광복'으로 바뀐 배경에는 과거에 주권이 있었냐는 여부가 있다. 명지대 진태하 교수 등은 독립이란 용어는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것처럼 신생국이 다른 나라로부터 처음으로 자립하는 경우에 사용하는 말이며, 광복이란 용어는 종전에 독립국이었던 나라가 일시 주권을 강탈당했다가 저항으로 되찾은 경우에 사용하는 말이라고 정의했다. 유구한 독립국이던 우리나라가 일본에 35년간 주권을 일시 강탈당했다가 다시 찾은 것이기에 광복이라고 해야지 독립이라고 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기념일'을 '절'로 바꾼 것도 격을 높이는 의미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절'이라는 명칭을 쓰는 국경일은 3·1절,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이다. 다른 기념일은 식목일, 현충일, 법의 날, 한글날처럼 '일'이나 '날'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흔히 크리스마스를 성탄절이라 하고, 부처님 오신 날을 석탄절이라고 하지만 이는 법적 명칭이 아니다. "관공서 공휴일에 관한 규정(대통령령)"에는 크리스마스와 부처님 오신 날을 각각 기독탄신일과 석가탄신일로 이름하고 있다. 원래 '절'이란 중국에서 천추절(千秋節), 만수절(萬壽節)처럼 중국 황제의 생일을 일컬은 말이었다. 따라서 8월 15일을 두고 최고의 기념일을 의미한다는 뜻으로 절이라 붙였겠지만, 봉건적 냄새가 나기도 한다.

​물론 국회의 기록에서는 광복절 명칭 변경에 대한 세세한 내용은 없다. 이런 이유로 변경되었을 것이라는 학자들의 추정밖에는 없다. 국가기록물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45년에서 48년 사이에는 '해방'이라는 말도 해방둥이, 8·15해방 등으로 일상생활이나 학계에서도 많이 사용됐다. 하지만 북한이 8·15를 '조국해방기념일'로 하고, 중국이 인민해방군을 창설하면서부터 해방이라는 말은 우리에게서 점점 멀어져 갔다.

광복절은 글자 그대로만 보면 '빛을 다시 회복한 날'로 풀이할 수 있지만, 동양고전을 전공한 김영민 서울대 교수는 '광'은 빛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영예롭게'라는 부사적 기능을 한다고 동양고전의 전거를 제시하면서 주장한다. 김 교수가 제시하는 전거에는 이런 것들이 있다.

<진서, 환온전> (晉書, 桓溫傳)에는 광복구경(光復舊京)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는 "옛 도읍을 회복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회복의 대상이 되는 것은 '구경'(옛 도읍)이지 '빛'이 아니다. '광'은 '회복하다'는 동사를 수식하는 부사적 역할을 할 뿐이다. 이러한 '광'의 용법은 오늘날에도 찾아볼 수 있다. 중국음식점에 가면 환영광림(歡迎光臨)이란 액자가 걸려 있곤 하는데, 그 '광' 역시 광복에서 '광'의 용법과 같다. 즉, '환영광림'이란 '빛'을 환영한다는 뜻이 아니라, 영예롭게 오신 것을 환영한다는 뜻이다. 이를 고려하면, '광복절'이라는 단어에는 무엇을 회복하는지 알려주는 목적어가 빠져 있다. (한국일보/17.08.13)

​김 교수에 따르면, 광복이란 말속에 회복의 대상은 구체적으로 없지만 회복해야 할 것은 '자결권을 가진 정치공동체'임을 짐작할 수 있다. 청나라 말기 사상가 장병린(章炳麟)은 혁명가 추용(鄒容)의 저서 <혁명군>(革命軍)의 서문에서 "중국은 이미 만주족에게 망했으니, 마땅히 도모해야 할 것은 광복이다"(今中國旣滅亡於逆胡, 所當謨者光復也)라고 주장했다. 이 말속에서 '광복'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다고 김 교수는 이야기 한다.

광복77년, 우리는 정치공동체를 얼마나 이루었는가​

광복이란 말에 대해 다소 지루하게 이야기했지만, 묻고자 하는 것은 단순하다. 광복77년이 됐지만, 과연 우리는 자치와 자결권을 가진 정치공동체를 만들었느냐는 질문이다. 한민족이 일제의 식민 대상으로 추락한 것은 제대로 된 정치공동체를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강한 정치공동체를 만든 곳들은 작은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주위의 강대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화려한 당대의 문화를 만들었다. 고대 그리스와 현대의 북유럽과 스위스에서 정치공동체의 중요성과 효능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여전히 제대로 된 광복을 맞지 못하고 있다. 해방 이전 대부분의 '민(民)'들은 주권과 정치를 경험하지 못하고 다만 통치의 대상일 뿐이었다. 해방 이전의 국가형태는 전제정 혹은 과두정이었으니 주권은 누린 이들은 왕과 소수의 귀족들뿐이었다. 해방이후 77년은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혹자는 한국을 제3세계에서 산업화와 민주화를 일군 유일한 나라라고 찬사를 보내기도 하지만, 껍데기를 벗기고 나면 우울한 자화상이 나온다. 거의 20년째 계속되고 있는 최고의 자살율과 최저의 출산율이 보여주는 것처럼, 현재와 미래가 잘 보이지 않는 것이 우리 사회의 진실에 가까운 모습이다. 겉은 화려해 보이지만, 속이 비루한 데는 제대로 된 정치공동체를 우리가 만들지 못한 탓이 크다.

​​헌법 제1조는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되어 있지만, 조금만 들여다봐도 국민들에게 실질적인 주권은 거의 없다. 몇 년 마다 돌아오는 선거에서 권력의 대리인을 뽑는 일 말고는 좋은 헌법과 필요한 법률을 제안할 권리도(국민발안권), 문제 있는 대리인을 소환할 권리도(국민소환권), 국가의 중대사를 정치공동체의 구성원들과 함께 고민하고 결정할 권한도 국민에게는 없다(국민투표권). 이처럼 주권자의 권한이 없는 상태에서 좋은 정치공동체를 만들기는 나무에서 물고기를 찾는 것과 비슷하다.

이제는 8·15 광복절을 식민 상태에서 해방됨을 단순히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정치공동체를 어떻게 만들지를 고민하는 날로 만들어야 한다. 회복해야 할 것은 전제정과 과두정에서 소수의 사람들이 누렸던 빛과 영광이 아니다. 대부분의 민들에게는 회복해야 할 과거의 빛이나 영광은 없었고, 한 맺힌 고통스런 삶이 있을 뿐이었다. 그런 점에서 광복절의 빛(光)을 명사가 아니라 부사로 해석하는 김영민 교수의 해석에 공감한다.

▲지역정당은 풀뿌리 민주주의의 기초이지만, 한국에서는 설립이 어렵다. 사진은 지난 6.1 지방선거 당시 선거에 출마한 '직접행동영등포당' 당원들의 선거운동 모습. 서울 선거관리위원회는 이 당의 창당등록 신청을 반려했다. ⓒ프레시안

지역에 기초하는 혁신적 정치공동체 지역정당을 제안한다

국가의 혁명적이고도 전면적인 정치적 전환이 있으면 좋겠지만, 거의 불가능 하려니와 설령 된다고 하더라고 형세는 사상누각처럼 위태롭다. 지난 6년 전에 시민들은 화려한 촛불혁명을 만들고, 정권 교체를 이루었지만 바뀐 현실은 별로 없다. 대부분들의 민들에게 현실은 여전히 누추하고 초라하다. 토대를 바꾸지 못하고 껍데기만 바꾼 탓이 크다.

토대를 바꾸고 튼튼히 하려면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과 생활세계부터 바꾸어야 나가야 한다. 그것을 할 수 있는 정치시스템이 직접민주주의에 기초한 풀뿌리 지역정당이라고 할 수 있다. 1961년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가 정당법을 만들어 국민들의 정치참여 활동을 배제한 이후로 지금까지 그 시스템이 유지되고 있다. 현재의 정당법은 중앙당은 서울에 두어야 하며, 5개 광역에서 각각 1천명 이상의 당원이 있어야 한다는 조항으로 구성돼 지역정당 자체를 불법화하고 있다. 반면 유럽, 미국 등 선진국에는 정당법 자체가 아예 없으며, 독일처럼 정당법이 있는 경우에도 지역조직이나 당원 숫자를 요구하지 않는다. 이웃 일본만 하더라고 수많은 지역정당이 있어 자민당의 장기집권에도 불구하고 지역공동체는 건강하게 유지되고 있다.

왜곡된 정치가 일으키는 폐해는 말할 수가 없다. 지역, 세대, 성별 갈등과 지방의 소멸, 지역의 황폐화는 모두 왜곡된 정치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정치가 국민에게 희망과 행복, 통합과 연대감을 안겨주기 보다는 근심과 걱정거리가 되어버린 지 오래되었다. 거대 양당의 정치독점을 해체하기 위해 시민사회가 노력해왔지만, 공고해진 그들의 기득권을 깨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광복 77주년. 제대로 된 광복을 맞이하기 위해서라도 풀뿌리 지역에서부터 혁신적인 정치공동체를 만들어가야 한다. 여전히 현실의 벽은 두껍고, 빛은 멀리 있지만 지역정당의 필요를 느끼는 단체들과 주민들과 함께 다시 지역정당 만들기에 나선다. 226개의 기초자자체에서 10%지역에서만 지역정당이 만들어져도 현재의 정치 독과점체제는 무너질 것이다. 현재는 영등포, 은평, 과천, 진주에서 지역정당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앞으로 씨앗을 뿌릴 지역들은 지역정당 창당학교에 문을 두드리면 된다. 지역정당 창당학교의 자세한 내용은 복지국가소사이어티 홈페이지를 참고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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