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무섭다. 대한민국 중부 지방에는 한 세기만의 폭우가 쏟아졌는데, 유럽 여러 나라는 폭염과 가뭄으로 고통 받고 있다. 서울의 한강 이남 지역에 난데없는 물길이 생긴 반면 중부 유럽에서는 내륙 운송을 책임지던 라인강 물길이 끊어져 버렸다. 과잉과 결핍의 양극단이 엄습한다. 마치 인간의 변덕을 심판하듯 이제는 지구가 변덕을 부린다.
그런 와중에 미국에서는 기후 위기 대응 법안이 오랜 논란 끝에 '인플레이션 감축법'이라는 예상치 못한 이름으로 상하 양원을 통과했다. 기후 위기의 급진전에 맞서 드디어 세계에서 가장 강대한 국가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 같다.
한데 이 나라가 러시아, 중국과 벌이는 각축 탓에 다른 여러 나라의 관심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기후 위기에서 멀어져 있다. 기후 위기 대응에서 전 세계 선두 주자라 자처하던 유럽연합마저 동쪽의 전쟁 소식에 촉각을 곤두세운 채 기후 위기 대응 계획을 크게 후퇴시키고 있다.
지금 인류와 지구의 시계는 어디쯤에 와 있는가? 기후 위기에 맞서 인류는 한 발자국이라도 전진하고 있는가, 아니면 돌이킬 수 없이 후퇴하고 있는가? 최근의 급박한 상황 전개를 반영한, 기후 위기의 중간 결산이 시급히 필요하다.
이미 시작된 기후 재앙 시대
첫 번째로 확인해야 할 것은 기후 재앙 시대가 '이미' 시작됐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벌써 기후 재앙 시대의 한 복판에 있다.
생활인의 감각으로 보더라도, 재앙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이상 기후가 최근 몇 년 새 빈발하고 있다. 굳이 다른 나라 사례를 댈 것 없이 한국만 봐도 엄청나게 더운 여름과 그만큼 엄청나게 추운 겨울, 기나긴 장마와 처음 겪는 가을 태풍 릴레이가 2010년대 후반에 집중하여 나타났다. 이제 우리에게는 평온한 사시사철보다는 뭔가 거기에서 엇나간 한 해 날씨가 더 익숙할 정도다.
그럼에도 우리의 기후 위기 관념은 현재의 일상과 기후 재앙 사이에 아직 상당한 시간적 간극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들었다. 기후 재앙 시대란 미래에 닥칠 수도 있는 위험한 '시나리오' 중 하나이며, 지금 나타나는 재앙들은 (재앙 자체가 아니라) 그 '전조'라 여기게 만들었다. 이러한 전조들이 인류를 각성시키면 오히려 최악의 시나리오는 충분히 피할 수 있다는 신화가 21세기의 첫 몇 십 년 동안 그나마 기후 위기에 가장 민감하다는 이들을 지배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기후 과학자들이 진지하고 치열하게 고민한 끝에 내놓은 메시지의 형태와 방식이 이런 신화를 부추겼다. 산업화 이전과 대비해 지구 평균 기온이 1.1도까지 치솟았고, 이번 세기 안에 그 상승을 1.5도에서 중단시키지 않으면 재앙이 닥칠 것이며, 그러자면 2050년까지 탄소 순배출이 제로인 상태에 도달해야 한다, 운운. 이 메시지에는 여러 문제가 있지만, 그 중 하나는 우리가 2050년까지 뭔가를 열심히 하면 기후 재앙을 피할 수 있다는 생각을 부추긴다는 점이다.
이런 생각 탓에 지금껏 기후 위기 대응 담론은 탄소 배출을 더 빨리, 더 크게 줄이는 데에만 집중됐다. 아래에서 다시 말하겠지만, 이런 노력은 분명히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이 기후 위기 대응의 전부여서는 안 된다. 기후 위기 대책은 각국 정부의 탄소 중립 실현 계획이 담고 있는 기술 관료적 전망보다는 훨씬 더 사회적으로 민감하며 정치적으로 불온한 내용을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
기후 재앙 시대가 이미 시작됐기 때문이다. 2050년까지 뭔가를 잘 하면 최악의 상황을 피할 수 있다는 식의 전망은 경제 성장 신화만큼이나 환상적인 또 하나의 신화가 돼버렸다. 지구는 인간들의 이러한 자기위안적 낙관주의를 비웃으며 온실가스 증가의 결과를 인간 사회에 고스란히 돌려주고 있다. 해를 거듭할수록 빈발하는 극단적 기상 현상만이 그 증거는 아니다. 이런 날씨가 전 세계 농업에 가하는 긴장과 압박 탓에 지금 불황과 동시에 펼쳐지고 있는 인플레이션 또한 이를 증명한다.
이제는, 기후 위기를 둘러싸고 이제껏 단단히 굳어져 온 상식을 해체해야 한다. 최악의 경우가 도래하기 전까지 인류에게 남은 시간이란 '없다'. 최악의 상황은 이미 우리 눈앞에서 전개되고 있다.
세 개의 c는 하나다 – 기후, 계급, 자본주의
이와 함께 시급히 확인해야 할 또 다른 진실은 기후 문제가 계급 문제라는 것이다. 물론 선각자들은 오래 전부터 이에 관해 지겨울 정도로 이야기해왔다. 그러나 기후 재앙 시대의 한 복판에서 이 경고는 그저 시대를 앞선 고담준론만이 아니라 지금 당장 우리 목숨을 쥐고 흔드는 현실로 육박한다.
한국 사회는 8월 8일에 인천, 서울, 경기 남부를 덮친 폭우에서 이를 너무도 뼈아프게 실감했다. 연립주택 반지하층에 살던 가족이 성난 물살에 휩쓸려 생명을 잃었다. 희생자들은 상대적 저소득층이고 노동계급이었으며, 여성이고 장애인이고 어린이였다. 누구에게는 일상의 안락과 수익의 교란 요인이었을 뿐인 극단적 기후가 이들에게는 죽느냐 사느냐는 위협으로 닥쳤다.
이 사실은 기후 문제가 온 인류가 공통으로 직면한 보편적 위기가 '아님'을 말해준다. 어떤 계급에 속하는지에 따라 위기의 성격과 강도가 전혀 달라진다. 적도 인근 국가의 농민이 체감하는 바와 대개 온대인 자본주의 중심부 국가의 도시인이 느끼는 게 천양지차다. 그리고 같은 도시 안에서도 서울 강남의 초고층 건물 같은 곳에 사는 이들과 반지하 셋집 거주자들 사이에서 엄청난 차이가 나타난다. 지구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피라미드에서 보다 아래쪽에 자리한 이들일수록 기후 위기는 생존과 생명의 급박한 위협으로 다가온다.
반면에 기후 위기에 기여한 정도는 피라미드의 위쪽에 자리한 이들일수록 커진다. 국가별로 따져서 빈국일수록 탄소 배출량이 적다는 것은 이미 상식이다. 계층별로 봐도 비슷한 양상이 나타난다. 2020년에 옥스팜과 스톡홀름환경연구소가 낸 보고서에 따르면, 1990년부터 2015년까지 상위 10%의 부유층이 전 세계 탄소 배출량의 절반 이상을 배출했다. 상위 1%는 하위 50%보다 두 배 이상을 배출했다. 탄소 배출의 직접적 원인은 화석 연료 사용이지만, 화석 연료를 태우게 만드는 근본적 힘은 소비 자본주의이며, 그 주역은 북반구 부유층과 상위 중산층이다.
지금껏 통상적인 기후 위기 대응 담론에서는 이런 차이가 쉽게 은폐됐다. 기후 위기 대책은 21세기 후반 언젠가를 살 후세대를 위해 현존 인류 모두가 함께 노력해야만 하는 과제가 되어 버렸다. 마치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의 임원과 번화가에서 비싼 외제차를 모는 이들, 반지하에 거주하는 노동자 가정, 폭우와 가뭄에 신음하는 농민이 모두 같은 무게의 짐을 짊어지기나 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런 깔끔한 은폐도 더는 힘을 발휘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우리 시대가 이미 기후 재앙 시대임이 분명히 드러날수록 계급에 따라 다가오는 곤란과 위험의 무게가 확연히 다르게 체감되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문제가 계급에 따라 불편이나 불로소득 감소로 나타나기도 하고 생존의 위협으로 다가오기도 한다면, 이 문제의 또 다른 이름은 항상 계급 문제일 수밖에 없다. 즉, 기후 문제는 계급 문제다.
이것이 2022년 8월 8일 이후 한국 사회에 깊이 새겨져야 할 깨달음이다. 영어 단어에서 모두 c로 시작되는 두 단어, 기후(climate)와 계급(class)은 서로 긴밀히 얽혀 있다. 사실 두 c는 오늘날 또 다른 c(자본주의, capitalism)의 두 얼굴일 뿐이다.
기후 위기 대응 - 탈탄소화만이 아니라 보편적 돌봄 사회를!
그렇다고 탈탄소화 노력이 의미가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최악의 상황이 이미 열리고 말았지만, 최악에는 한계가 없는 법이다. 벌써 기후 과학자들 사이에서는 지구 평균 기온이 이번 세기 안에 산업화 이전보다 3도 이상 상승하는 상황을 예측하는 연구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문명 붕괴, 인간 멸종 등과 직결될 수밖에 없기에 그 동안 거의 금기시되던 시나리오조차 지금부터는 진지하게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이다. 그만큼 기후 재앙은 극적으로 가속화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기에 탈탄소화 노력은 더욱더 치열하고 빠르게 추진돼야만 한다. 2050년 넷제로(Net-Zero) 실현 구상이 한갓 신화에 불과하더라도, 탈탄소화 요청 자체에는 변함이 있을 수 없다. 만약 탈탄소화가 시도되지 않는다면, 3도 이상 상승 시나리오가 끝내 현실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미 벌어진 최악의 상황에 그나마 한계선을 긋기 위해서도 오히려 2050년보다 더 빠른 시점에 탈탄소 사회를 실현하는, 그야말로 혁명적인 전망과 고투가 필요하다.
그러나 더는 탈탄소화 노력만이 기후 위기 대응 담론의 전부인 양 치부돼서는 안 된다. 기후 재앙 시대가 이미 시작됐다면, 시작되고 만 이 재앙에서 생명을 최대한 구하려는 조치가 기후 위기 대책의 또 다른 기둥이 되어야 한다. 기후 재앙이 더욱 극악한 상황으로 치닫지 못하게 '예방'하려는 노력뿐만 아니라 기정사실이 된 기후 재앙에 '적응'하려는 조치들 또한 시급히 필요하다.
실은 '적응'은 지금껏 기후 운동에서 기피하거나, 아니면 쓰더라도 아주 조심스럽게 꺼내던 개념이다. 탈탄소화에 소극적이거나 이를 훼방 놓으려는 세력이 “기후 위기에 적응하자”는 주장을 퍼뜨리며 에너지 체제 전환 등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곤 했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이런 식의 '적응'론이 기후 위기를 극복하는 궁극적 해법인 사회 전환을 가로막고 나설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제는 이들과는 다른 차원과 입장에서 어쨌든 '적응'의 노력이 필요하게 됐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를테면 기후 재앙에 대한 '계급적 적응'이다. 극단적 기후에 취약한 주거 환경을 탈시장-공공 주거 정책을 통해 해결하고 재난 시에 기민하게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도록 공공 안전 인력을 대폭 확대하는 식의 적응 말이다. 일상적인 위험과 재난을 최대한 막고 안전을 보장하는 활동 역시 돌봄의 일부로 본다면, 이는 기후 위기에 맞서는 보편적 돌봄 사회를 실현하는 과업이라 하겠다.
보편적 돌봄 사회의 재원은 기후 재앙의 원인 제공자들에게 그 책임을 물음으로써 확보해야 한다. 사회 전체의 자원 중 상당 부분을 시장의 논리와 지배에서 떼어내 기후 재앙에 맞선 돌봄 활동 영역에 우선 투입해야 한다. 코비드-19 팬데믹 기간에 그랬듯이, 상시적 재난 대응이라는 정언명령이 이윤 동기보다 위에 놓여야 한다.
이런 요구가 하루빨리 노동운동을 비롯한 민중운동들의 가장 긴급하고 중대한 과제가 되어야 한다. 탈탄소화를 위한 에너지 체제 전환이 그 동안 사회운동들에조차 조금은 먼 미래의 과제로 느껴지는 면이 있었다면, 당장의 기후 재앙에 맞선 보편적 돌봄 사회의 조속한 실현은 그렇지 않다. 아니, 그럴 수 없다. 이 여름 이후, 우리는 결코 과거와 같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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