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 집 뒷마당에 작은 대추나무가 있다. 실하게 열매를 많이 맺어 어머니의 은근한 자부심이 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 가을에는 대추를 많이 얻지 못할 것 같다. 대추꽃이 필 때면 붕붕 벌들이 달려들어서 시끄러울 정도였는데, 이번 봄에는 벌이 오지 않았단다. 앞마당 텃밭에 심은 호박꽃에도 벌이 오지 않아 손으로 수정을 시켰지만, 시원치 않단다. 남도에서 사라진 꿀벌의 사연과도 연결된 것이 아닐까 싶다. 오지 않은 벌들을 원망하며, 늙은 어머니 입에서까지 '기후 무시기' 걱정이 나온다. 곳곳에서 세상이 조금씩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낙담의 감정을 피하기 어렵다.
2020년 9월, 국회는 결의안을 통과시키면서 '기후위기 비상상황'을 선언하였다. 한해 전 서울 대학로에서 5천 명, 전국적으로 7천 명의 시민들이 참여한 집회와 시위가 '기후위기 비상행동'을 촉구한 결과였다. 그 결의안의 1항을 다시 한번 읽어 보자.
기후 강의를 하면서 종종 묻는다. 이 문장의 주어가 누구인지. 대한민국 국회다. 환경단체나 기후과학자의 선언이 아니다. 헌법기구의 비상상황 선언이다. 그만큼 무거운 말이고, 정말로 심각한 상황이다.
또 묻는다. 이 선언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는지. 열 명 중 두세 명이 전부다. 아예 듣지 못 한 사람이 전부인 경우도 있다. 말하자면, 아파트 화재를 발견하고 관리소장이 "불이야"라고 방송을 했는데, 들은 사람이 거의 없는 상황과 비슷하다. 불이 번지고 있는데, 하던 대로 계속 자고, 밥 먹고, 일하고, 공부하고 있다. 그 상황이 어떤 비극으로 이어질지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국회의 기후위기 비상선언을 듣지 못한 시민들이 이리 많은 것은 누구의 탓일까? 듣지 못한 시민들의 잘못인가. 아니면 알리지 못한 국회의 잘못인가. 국회는 스스로 이 비상선언을 무력화했으니 답은 명확하다.
기후위기로 비상상황이라 선언하고도, 국회는 다섯 달이 되지 않아서 가덕도 신공항 특별법을 통과시켰다. 부산시장 보궐 선거를 이길 욕심으로, 토건개발 사업을 법제화하기까지 했다. 딴 나라는 온실가스 감축을 위해 기존 항공노선도 없애는 마당에, 신공항이라니. 누가 국회의 비상선언을 귀담아듣겠는가.
국회만의 문제는 아니다. 2050년 '탄소중립'을 천명했지만 당장 자신의 일은 아니라 여긴 대통령도 가덕도 신공항 특별법을 통과시키기 위해 대놓고 움직였다. 너무 비합리적인 사업이라 비판하는 입에 재갈을 물리며, 국토부 장관을 억지로 굴복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내놓은 감축목표와 기후정책이 제대로일 리 없다. 2050년 탄소중립이 엄청난 비전인 것처럼 호들갑 떨지만, 기후위기를 막고 국제적 정의를 바로 잡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청년들의 탄소예산 분석에 입각해 보았을 때 2040년 이전에 온실가스 배출 중립에 도달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의 감축 책임을 떠넘기려는 탄소중립 개념은 탄소식민주의와 불확실한 기술에 의존하게 만든다. 부정의하다.
비슷하게 2018년 대비 40% 감축으로 강화했다는 2030년 감축목표 설정 역시, 불충분하고 부정의하다. 그나마의 목표 달성 의지도 의심받고 있다. 2018년을 정점으로 하여 낮아지고 있던 배출량이 2021년에는 반등하여 증가하기 시작했다. 코로나 재난으로 인한 경기회복 때문이라고 하지만, 재생에너지를 중심으로 한 '녹색회복'이 아니라 화석연료 기반 산업에 투자하는 '회색회복' 때문이다.
탄소중립을 천명하였더라도, 정부는 지금껏 하던 대로 움직였다. 하늘이 두 쪽 나도, 아니 기후가 망가지더라도, 대기업의 이익을 침해하려 하지 않았다.
온실가스를 거대하게 배출하든 말든, 짓고 있기 때문에 계속 지어야 한다는 포스코의 삼척 석탄발전소 건설을 중지시키지 않았다. 인도네시아와 베트남에 짓기로 한 석탄발전소에 대한 공적자금 지원도 그대로 유지했다.
대기업들의 악행을 제대로 규제하지 않고, 대기업들의 모호한 사업을 그린워싱해주고 또 지원해주는 일도 지금껏 하던대로 이어졌다. 언제 내연기관차 생산을 중단할 것인지에 대한 선언도 없이, 그린뉴딜이라는 이름 아래에 자동차산업의 전기차 생산 전환을 돕겠다며 엄청난 공적 자금을 투여하고 있다.
재생에너지산업은 해외 투자 자본까지 끌어드린 민간 기업에 의해서 장악되었고, 정부는 시장 개방이 에너지전환을 촉진한다며 우회적 에너지 민영화를 추진하고 있다. 기후위기 명분삼아 대기업/자본의 이윤을 보장하려는 노력이 기후정책으로 포장되고 있다.
2019년 9월 7천여 명의 시민들의 '기후위기 비상행동'은 정부와 국회의 '기후침묵'을 깨는 데 기여했지만, 기후위기의 해결과 기후정의로 가는 길을 열어내지는 못했다. 코로나 재난으로 시민들이 모여서 외치고 행진하는 일이 불가능한 사이, 정부와 기업들은 거버넌스라는 이름으로 여러 전문가와 활동가들을 불러 들러리를 세워 놓은 채 그들만의 기후정책(2030년 NDC와 2050년 탄소중립 시나리오)을 만들어내 발표하였다.
충분하지도 정의롭지도 않은 기후정책에 항의하여 청소년 위원과 종교계 위원들이 사퇴하고 기후시민들이 거세게 저항했지만, 막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나날이 가속화되고 현실화되는 기후재난을 목격하며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 기후보다는 기업을 지키기 바쁜 정부와 이윤을 챙기기 바쁜 기업들을 향한 규탄의 목소리를 다시 높여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지난 6월 16일, 전국 110여 개의 단체들이 모여서 '9월 기후정의행동 조직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9월 24일에 서울에서 '기후정의행진'을 벌이기로 결의하였다. 2019년 9월 이후, 3년 만에 수만 명의 시민들이 대규모로 모여서 기후위기 해결과 기후정의 실현을 요구하는 집회와 행진을 벌이기로 한 것이다. 또한 9월 19일에서 24일까지, 기후정의주간 동안 전국 각지에서 기후행동이 전개될 것이다. 이를 위해서 이미 집행위원회를 구성하고 준비에 돌입했다.
3년 만의 대규모 행진은 몇 가지 변화가 있다. 2019년에는 기후위기를 인정하라는 요구가 핵심이었지만, 2022년에는 '기후정의' 요구가 도드라진다. 기후위기의 심각성뿐만 아니라 그 피해와 책임이 차별적이라는 고발도 크게 늘었고, 시민 인식이 많이 높아진 덕분이다. 나아가 기후정의라는 슬로건 아래, 기후위기와 사회적 불평등은 쌍생아이며 이를 야기한 현행 사회․경제 체제를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한 동감도 넓어지고 있다.
둘째, 기후정의행진을 준비하기 위해서 모인 단체들이 폭넓어졌다. 지금까지 기후운동은 환경운동의 일환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기후위기의 심각성과 광범위한 영향 때문에, 기후운동은 3년 사이에 다른 많은 사회운동이 참여하는 운동으로 변화했다. 특히, 노동운동, 종교운동, 인권운동, 페미니즘운동, 반빈곤운동, 평화운동 등의 참여가 두드러진다.
셋째, 기후위기 심각성과 기후부정의에 슬퍼하고 또 분노하는 시민들의 수가 거대하게 늘었고, 이들은 거리에 나서 대규모 시위를 다짐하고 있다. 또 급진적 직접행동이 필요하다는 공감대도 커지고 있다.
연일 무더위다. 새로운 기후재난의 기록이 나오고 있다. 아마 내년에 또 깨어질 기록을 무기력하게 바라보는 일은 이제 그만 두자. 9월 24일, 서울로 모이자. 거리로 나서자. 기후위기를 해결하라, 기후정의 실현을 외치자! 싸울 때만이 희망을 매만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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