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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브란스병원 청소노동자 순애 씨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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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브란스병원 청소노동자 순애 씨의 이야기

[세브란스병원 노조파괴 잔혹사] ① 내가 이 투쟁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

"병원이 민주노총은 안 된다고 했다." 

그 한마디를 시작으로 세브란스병원 청소노동자들의 지난 6년은 지옥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민주노총 탈퇴 3단계 전략" "부당노동행위 의식하여 노노대립으로 진행하라" 

세브란스병원이 청소노동자들의 노조파괴를 위해 작성한 문건에 등장하는 표현입니다. 국내 최고의 병원이라 자임하는 세브란스병원은 최저임금과 살인적인 노동강도, 사용자의 갑질에서 벗어나고자 만든 청소노동자들의 민주노조를 무참히 짓밟았습니다. 2021년 3월, 검찰은 결국 세브란스병원 당시 사무국장, 사무팀장, 파트장, ㈜태가비엠 및 태가비엠 부사장, 이사, 현장소장, 반장 등 9명에 대해 부당노동행위로 기소하였습니다.

청소노동자들이 바라는 것은 큰 것이 아닙니다. 교섭권을 보장해달라는 것과 악질 용역업체 ㈜태가비엠 퇴출, 그리고 노조파괴 공모 사태에 대한 병원의 사죄입니다. 너무도 당연한 이 세 가지 요구를 이루고자 청소노동자들은 6년째 투쟁하고 있습니다. 청소노동자들의 천막농성 200일을 앞두고, 공공운수노조 서울지역공공서비스지부(약칭 공공운수노조 서울지부)에서는 세브란스병원의 노조파괴 사태의 심각성과 이에 따른 인권탄압을 고발하기 위한 연재를 진행합니다.필자

올해 55세인 순애 씨는 신촌 세브란스병원 중환자실에서 일하는 청소노동자다. 올해 교섭권이 없이 6년간 노조파괴에 맞서 싸우고 있는 소수노조(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서울지역공공서비스지부)의 분회장이 되었다.

그녀는 민주노조가 출범하고 1년 뒤에 병원에 들어왔다. 회사가 갑자기 한 번도 주지 않았던 아침밥을 사줘 가며 조합원들을 감금까지 시켰던 '민주노조 출범식'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노동조합 분회장 자리도 부담스러웠다. "그런 것 잘 모른다"며 손사래를 치다가 결국 분회장 자리를 맡게 됐다.

어느 날, 병원장에게 면담을 요구하던 자리에서 그녀는 노래를 한 자락 부르겠노라 했다. 막걸리를 좋아하니 막걸리와 관련된 노래를 부르겠다던 그녀의 입에서 나온 노래는 뜻밖에도 '무노동 무임금을 자본가에게'라는 노래였다. 그 노래를 듣던 몇몇이 조용히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병원장에게 80년대를 함께 살아온 자가 응당 져야 할 사회적 책임에 관해 이야기했다.

▲중환자실에서 청소 노동을 하고 있는 변순애 연세세브란스병원분회 분회장. 코로나19 초기에는 통풍이 잘 되지 않는 부직포 가운에 고글까지 착용하고 청소 일을 해야했다. ⓒ공공운수노조 서울지부

노동자 대투쟁의 시대를 살아온 순애 씨의 이야기

80년대 말, 그녀의 이야기 속 순애 씨는 안산에 있는 '일성OO'이라는 제약회사에 들어갔다. 20대 초반의 나이였다. 거기서 그녀는 관리자가 지시하는 대로 약들을 선택해 정해진 비율로 섞어 다양하게 생긴 용기에 담는 일을 했다. 저녁에는 거대한 약제 조제 탱크에 들어가 바닥을 기면서 표면을 닦았다.

그러다 노조가 생겼다. 비밀리에 만들어졌지만 너도나도 당연한 듯 가입했다. 순애 씨는 쟁의부에서 활동했다. 난생처음 해본 40일간의 파업. 꽹과리도 치고 장구도 치고, 신이 났었다고 했다. 공단을 행진하다 보면 지나가던 시민들이 파업을 응원하며 간식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노조 위원장이 갑자기 의문사를 당했다.

“칼침 맞았다고 그랬어요.”

노조 위원장이라서 그런 거라고들 했다. 그가 죽고 노동조합은 와해되고 말았다. 그녀는 위원장의 장례식장에 가서 장미 한 송이를 놓고 나왔다. 그곳에서 그의 어린 자녀를 처음 봤다.

그녀도 그녀의 동료들도 위원장의 의문사 후 두려워졌다.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은 엄청난 공포다. 너무 오래전 일이라 구체적인 기억들은 이미 흐려졌지만, 공포만은 또렷하게 남았다. 이후 순애 씨는 콜센터 텔레마케터, 야쿠르트 판매, 부동산 사무실 상담 등 다양한 일을 했지만 노동조합 활동은 하지 않았다. 공포 때문이었다.

2017년, 다시 노동조합에 가입하다

야쿠르트 판매 일로 돈을 벌지 못해, 동네 빌딩 청소노동자에게 소개받아 온 곳이 세브란스병원이었다. 2017년 6월, 면접을 보러 간 자리에서 반장은 면접을 한 번 더 봐야 한다며 그녀를 한국노총 소속 친기업 노조 위원장에게 데려갔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한국노총에 가입하라는 친기업노조 위원장의 이야기를 듣고 노동조합 가입서를 썼고, 업체 관리자가 아닌 친기업노조 위원장에게 바로 출근 날짜를 받았다. 그가 설명하는 한노(한국노총 소속 노동조합), 민노(민주노총 소속 노동조합)가 어떻게 다른지와 같은 내용들은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친기업노조 위원장이 대단한 '파워'를 가지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고 했다.

그 노동조합은 30년 전, 그녀가 겪었던 노동조합과는 차원이 달랐다.

대기 시간에 떡을 먹다가 반장에게 불려가 시말서를 쓰게 되었을 때에도(심지어 순애 씨는 떡을 먹지도 못했다고 한다. 떡을 먹으려는데 반장이 들이닥쳐 떡은 입에 들어가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아무런 조치를 취해주지 않았다. 산재를 당했을 때 겪은 부당한 일들에 대해서도 침묵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경조사 휴가 하루를 더 주느니 마느니 하며 회사가 그녀의 억장을 무너뜨렸을 때도 친기업노조 위원장은 회사 편을 들었다. 오히려 그녀를 나무랐다. 30년 전 노동조합을 경험한 그녀로서는 이러한 노조의 태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럴 때마다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던 것은 민주노조였다.

입사 1년 후, 그녀는 친기업노조를 탈퇴하고 스스로 민주노조에 가입했다.

▲청소노동자들이 잠시라도 앉아있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은 탕비실이다. 의자는 걸레를 빨기 위해 순번을 대기할 때만 사용하도록 허락된다. ⓒ공공운수노조 서울지부

폭력이 일상이 되자 현실감각마저 사라지다

송골송골 맺힌 땀을 바닥에 뚝뚝 떨구며 일하는 청소노동자들에게는 녹초가 된 몸을 회복할 공간도 시간도, 여유도 주어지지 않았다. 결손이 생긴 현장에 불려 다니고, 잠시 쉬는 시간이 생겨 앉아있다가도 관리자들의 호통을 들어야 했다. 자기 구역의 일을 모두 끝낸 후여도 청소노동자들은 관리자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청소 일에 끝이 어디 있어요? 계속 돌다 보면 또 청소할 것이 생기는데?"

다리가 아파 마포걸레를 든 채로 잠시 앉아 있던 청소노동자는 관리자의 이런 비아냥을 견뎌야 했다.

"다리가 아픈데 왜 여기 앉아 계십니까? 조퇴하셔서 병원에 가셔아죠?"

쉬는 시간을 허락하지 않으니 기운을 내기 위해서 얼른 커피 한 잔을 들이켜다가도 관리자 발소리만 들리면 놀란 마음에 바로 개수대에 부어버렸다. 떡을 먹으려다 시말서를 썼던 그 순간부터였다. 숨어서 몰래 커피를 마시는 것, 휴게실이 따로 없어 잠시 계단 아래에라도 걸터앉아 있을라치면 관리자들이 들이닥쳐 앉아있지도 못하게 하는 것, 노조 탈퇴를 수시로 종용받고 그에 응하지 않으면 이러한 트집과 괴롭힘이 예고된 것, 이런 것들이 이곳의 일상이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순애 씨는 한동안 현실감각이 사라졌다. 반장이 청소노동자에게 욕설을 하거나 고함을 지르는 일을 목격했을 때도, 관리자가 폭력을 행사해 모욕과 폭행치상으로 유죄판결을 받은 일을 전해 들었을 때도 '아 여기서는 이렇게 사는 것이 정상인가 보다'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첫 달에 들어와 너무 힘들어 그만두려고 했는데, 7월에 보너스 준다고 해서 참았어요. 한 달만 더, 한 달만 더, 하다가 지금까지 못 그만두고 일하고 있네요."

아버지의 투병이, 병든 어머니를 돌봐야 하는 현실이, 그리고 늦은 나이에 결혼해 낳은 어린 딸의 존재가 그녀를 견디게 했다. 그녀는 견뎌야만 했다.

▲청소도구 등을 놓아두고, 걸레를 빨 수 있는 탕비실에서만 청소노동자들은 잠시 앉아있을 수 있다. ⓒ공공운수노조 서울지부

모두의 기본권인 집회시위의 자유마저 빼앗는 세브란스병원

그녀가 분회장을 맡은 공공운수노조 서울지역공공서비스지부(공공운수노조 서울지부) 연세세브란스병원분회는 아직도 교섭권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원하청이 공모해 민주노조를 파괴할 목적으로 계획적으로 민주노조 조합원들을 탈퇴시켜 소수노조가 되었기 때문이다. 노조파괴에 대해 아직도 병원은 책임지지 않고 있고 답변조차 없다. 

지난 3월에는 노동자들이 겪었던 일조차 이야기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업무방해 금지 가처분 소송을 제기했다. 내용은 세브란스병원 청소노동자들의 모든 종류의 집회 및 시위의 자유를 제한, 금지하도록 해달라는 것이다.

피켓에 기재할 수 없도록 금지해달라고 목록에 올린 문구들은 "떡 먹었다고 경위서", "경위서 3번 쌓였다고 해고 종용?", "5년간의 노조파괴 범죄에도 사과는커녕 면담도 거부, 병원장에게도 보고된 노조파괴 공작"과 같은 것들이다. 청소노동자들이 겪은 부당한 일을 있는 그대로도 이야기하는 것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청소노동자들의 목소리 1회당 100만 원을 내라는 병원이다. 순애 씨는 "정말 해도 너무하는 것 아니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당시 병원 사무국장, 사무팀장, 파트장은 모두 기소되었고 첫 공판에서 혐의를 모두 인정했다. 또 노동부가 압수수색한 문건 중에는 병원장 보고용으로 사무국장이 만든 문서도 있었다. 기소와 재판 과정에서 탈퇴 종용, 해고 협박, 표적 징계, 직장 내 괴롭힘, 자리 이동 등 역시 병원과 용역업체가 공모하여 꾸민 공작이라는 사실도 드러났다. 청소노동자들은 작년 11월부터 매주 목요일마다 노조파괴에 대한 책임 있는 답변을 요구하며 병원장실을 찾아가고 있지만 병원장실은 굳게 닫힌 채 열리지 않고 있다. 이 같은 세브란스병원의 무책임한 태도로 인해 현장에서는 아직도 노동자들에 대한 탄압과 인권침해가 매일같이 발생하고 있다.

▲변순애 분회장은 매주 목요일마다 세브란스병원의 노조파괴에 대한 책임을 촉구하기 위해 목요집회에 앞장서고 있다. 맨 앞줄 제일 오른쪽이 변순애 분회장. ⓒ공공운수노조 서울지부

내가 지키고 싶은 것

코로나19 확산으로 청소노동자들의 일은 많게는 4배 가까이 늘어났다. 노동자들이 날라야 하는 감염물질을 담는 감염박스가 하루 4박스에서 18박스로 늘어났을 때도 있다. 코로나19 확진이나 다른 질병으로 동료들이 격리에 들어가면 그 자리를 동료들이 메워야 해 두 사람 몫의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기 일쑤였다.

응급실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우주복과 같은 방호복을 입고 일을 해야 했는데, 일을 하다 보면 공기가 빠져나갈 데가 없어 옷이 풍선처럼 부풀고는 했다. 그 옷을 입고 2~3시간 동안 일하면 호흡이 되지 않아 진땀이 나고 머리가 아파왔다. 그런데 관리자가 또 다른 업무를 추가하자 한 노동자는 견디다 못해 일하다 말고 바닥에 앉아 엉엉 울었다고 했다.

"안 그래도 그 옷 입고 일하면 어지러워 죽겠는데 그 일까지 내가 어떻게 해요. 일하다 쓰러지면 어떡하냐고, 반장님이 한번 해보라고 이야기하면서 땅바닥에 앉아 울었어요."

바닥에 주저앉아 울며 호소해도 바뀌지 않는 살인적인 노동강도였다. 쓰레기를 묶다가 주삿바늘에 찔리거나 어디서 나왔는지도 알 수 없는 피가 터져 나와 얼굴이 피범벅이 되는 일, 허락된 휴식이라고는 탕비실에서 걸레 빠는 순번을 기다리며 잠시 간이의자에 앉아있는 시간뿐인 현실이었다.

이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 순애 씨는 용기를 냈다. 노동조합이라면 쳐다도 보지 않겠다던 30년 전의 그 공포에서도 한 발짝 걸어 나왔다. 소수노조의 분회장이 된 그는 지금 이 지독한 노조파괴의 역사를 종료시키기 위해 동료들과 함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5월 29일이면 천막농성을 시작한 지 200일이 된다. 제대로 된 휴게공간도 없는 청소노동자들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그 작은 공간이 너무 소중하다고 말한다. 그들은 처음 농성 천막에 오순도순 앉았을 때 느꼈던 서로의 온기를 기억하고 있다.

"잘못된 것들이 눈앞에 보이는데 어쩌겠어요. 내 스스로에게 창피하고 싶지 않아요."

그녀는 80년대의 한 가운데를 살아낸 사람으로서 30년 전처럼 무력하게 노동조합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함께 버티고 있어서" 목소리라도 낼 수 있다고 말하는 그녀는 조합원들만 있으면 무서운 것이 없다 했다. 그리고 노동조합을 반드시 지켜낼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민주노조를 지켜내는 것. 그것은 30년을 건너와 이제 그녀가 지키고 싶은 사회적·역사적 책임이자 한 사람의 노동자로서의 절박한 요구다.

격동의 80년대, 그때도 지금도 세상을 지탱하는 이들은 바로 현장에서 목소리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버티고 있는 수많은 순애 씨들이다.

▲청소노동자들이 모여 서로의 목소리를 모으는 공공운수노조 서울지부 연세세브란스병원분회 농성 천막. 5월 29일이면 천막 농성 200일을 맞는다. ⓒ공공운수노조 서울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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