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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끊어진 계층 사다리 대안이 약물·알코올, 그리고?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절망사(Deaths of Despair)의 위험

GDP 1위이자 인구와 면적에서 세계 3위인 나라. 또한 군사력에서 압도적 1위인 나라이자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이민가고 싶어하는 나라. 바로 미국입니다. 2020년에 국내 구인구직 업체인 사람인에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60%가 이민 의향을 밝혔고, 그러한 이유 중 1순위는 '삶의 여유가 없어서(43.3%)' 였습니다. 이민가고 싶은 나라는 미국이 45%로 가장 높았습니다.

미국에 대한 호감은 구체적으로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객관적인 지표들은 미국에 대해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코노미스트에서 매년 발표하는 세계에서 가장 살기좋은 도시(The Global Liveability Index)순위에서 최근 5년 동안 미국 도시 중 10위 안에 든 곳은 단 한 곳도 없었습니다. 이 조사는 매년 세계 140개 도시를 대상으로 안정성, 의료, 문화 및 환경, 교육 및 인프라에 대한 평가를 바탕으로 30개 이상의 요인을 고려하여 평가합니다. 미국의 도시들이 점수를 잃은 것은 추측컨대 인프라와 안정성이 떨어지고 총기사고 등 범죄나 테러의 위험성이 높아진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UN의 세계행복지수 평가에서도 미국은 2022년 기준으로 16위에 순위를 올렸습니다. OECD 선진국 들 중에서는 가장 낮은 수준이고 미국 바로 아래에 영국이 위치해 있습니다. 한국은 59위입니다.

2015년에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앵거스 디턴은 미국 사회에서 주목할 만한 변화를 포착했습니다. 국제적인 비교자료에서 미국의 기대수명이 줄어들고 있는 역진적 현상이었습니다. 사회가 진보하고 의료 기술의 발달, 영양 등 삶의 질이 전반적으로 좋아짐에 따라서 많은 나라들이 보다 건강하고 풍요로운 삶을 영위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1950년 45.51세에 불과하던 전 세계의 평균 기대수명은 2021년에 72.81세로 비약적으로 증가하였습니다. 반면 세계 최고의 경제대국인 미국에서 1990년대 들어서서 기대수명이 늘어나는 폭이 둔화되었고, 2015년부터 2017년까지 3년 동안 연속적으로 기대수명이 낮아지는 기이한 역전 현상이 관찰되었습니다. 이제까지 기대수명을 낮추는 주요한 원인이었던 폐질환, 심장병, 암과 같은 질병들은 치료법과 예방법의 보급으로 점차 감소추세에 있었으나, 약물중독, 알코올에 의한 간 질환, 자살 이라는 3대 원인이 급속하게 증가하고 있었습니다. 디턴과 그의 동료 케이스는 이를 절망사(Deaths of Despair)라고 불렀습니다.

2015년도와 2017년에 발표된 디턴과 케이스의 연구를 간략하게 제시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990년대부터 2013년도까지의 분석 결과, 미국 중년(45~54세) 백인의 사망률이 높아지고 있었습니다. OECD 선진국인 프랑스, 독일, 영국, 캐나다, 호주, 스웨덴과의 비교에서도 그 차이는 뚜렷하게 나타났습니다. 비교 국가들의 사망률은 감소하고 있었으나, 미국 중년 백인의 사망률은 나홀로 높아지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충격적인 것은 미국 내 중년 히스패닉이나 흑인의 사망률이 감소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가장 급격한 증가율을 보인 사망원인은 중독 이었고, 사실상 30대에서부터 64세까지 경제활동인구 전체적으로 중독이나 자살로 인한 사망률이 높아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45~54세인 중년 백인의 사망률이 가장 높았다는 것입니다.

연구가 진행되면서 보다 세밀하게 밝혀진 것은, 미국 중년 백인이자 저학력 계층의 절망사 비율이 높았다는 점입니다. 고졸 이하의 저학력 중년으로 한정하여 인종별로 살펴보았을 때 백인의 증가세가 현저히 높았고, 가장 우려스러운 점은 증가세의 기울기가 매우 가팔랐다는 것입니다. 인종과 연령대, 학력을 기준으로 절망사를 비교한 결과는 이러했는데, 다만 '소득'은 이러한 절망사를 설명하기에 그다지 영향력이 없었다는 점도 특기할 만 합니다. 통상 소득이 삶의 질이나 사망률에 매우 중요한 원인으로 여겨지지만, 절망사에 있어서는 별다른 영향력이 없었다는 것이 디턴과 케이스의 설명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필 저학력인 미국 중년 백인의 절망사가 늘어나는 것일까요? 디턴과 케이스에 따르면, 누적된 불리함(Cumulative Disadvantage)이 그 원인입니다. 미국 저학력 중년 백인들은 제조업에 종사하며 호황을 누리던 노동자 계급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전형적인 미국 가족의 가장으로서 1인 생계부양자 모델을 대표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전례없이 경제적 성장을 이루었던 황금 시절에 그들은 학력이 높지는 않았지만 높은 수준의 임금을 안정적으로 받는 괜찮은 일자리에 속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짧은 황금기가 끝나가고 산업과 경제 체제가 변화함에 따라 괜찮은 일자리는 서서히, 그러나 생각보다 빠르게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혼자 벌어서 가족의 삶을 책임지던 사회경제적 구조가 약해지게 되었고 이는 세대를 걸쳐 소득의 감소 뿐만 아니라 결혼, 지역사회 참여에 대한 삶의 전 영역에 부정적인 영향력을 주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저학력의 중년 백인들은 개개인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삶의 무너짐을 누적적으로 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소득, 관계, 개인의 내적 심리 등 다차원적인 절망에 내몰렸고, 오이오피드(최근 한국에서도 심각해지고 있는 팬타닐) 중독, 알코올에 대한 의존도 증가, 자살이라는 결과를 보인다는 것이 디턴과 케이스의 주장입니다. 이러한 주장의 핵심은 거시적인 사회경제적 환경의 변화입니다. 산업이 변화하고 기업의 체질이 바뀌는데 이를 효과적으로 또는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개인이 얼마나 가능할까요? 이미 잘 알려져 있듯이, 급격한 세계화로 제조업 등의 일자리는 인건비가 싼 후진국으로 넘어갔고, 기존의 저학력/저숙련의 노동자들은 생계를 위해 괜찮지 못한 일자리인 서비스업으로 이동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더욱이 기업들은 인간의 노동력이 덜 필요한 구조로 전환하는데 박차를 가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빈곤이나 박탈, 사회적 배제는 그 자체로 개입이 필요한 문제이나, 그 결과가 약물 중독, 알코올 과의존, 자살로 나타나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미국의 주류라고 여겼던 백인 중년 계층에서 전 세계적인 추세인 기대수명의 증가를 역행하고 절망사로 인한 사망이 늘어난다는 점은 한국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큽니다. 한국 사회가 알면서도 모르는 것 같은 세계 최저 수준의 출산율과 최고 수준의 자살률, 부의 양극화는 절망사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더욱이 최근 약물의 문제가 수면 위로 부상하게 되면서 이러한 문제를 예방하기 위한 연구와 정책적 노력이 그 중요성을 더해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절망사의 문제를 개인의 일탈이나 잘못 정도로 치부하는 것은 문제의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분명한 사회구조적인 문제로 바라보고 사회적 차원의 개입이 절실합니다. 한국은 전례 없이 물질적 풍요를 이룩한 위대한 성공을 이루었으나, 성장만 보고 달려오며 너무 많은 것들을 무신경하게 넘어왔습니다. 현재까지 밝혀진 현실적인 해법은 국가적 차원의 사회보장이 강화되는 것입니다. 절망사의 개념을 적용하여 독일을 살펴본 한 연구에서, 폭넓은 실업보험, 사회수당과 건강보험이 사회경제적인 충격으로부터 개인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며 특히 중년 계층을 포괄하기 때문에 절망사의 현상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Haan et al. 2019). 아울러 미국은 오이오피드와 같은 마약성 약물의 처방이 자유로운 극단의 시장체제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도 독일이나 다른 유럽 국가들의 예방적 통제의 차이를 보이기 때문인 것으로도 설명이 됩니다.

자살이라는 문제만으로도 한국은 절망적인 상황이고, 더욱이 알코올과 약물의 문제가 가중되고 있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악영향이 이를 더욱 가속화 시키는 듯 합니다. 유감스럽게도, 미국 중년 백인들은 절망사 현상이 나타나기까지 삶의 소소한 부분에 대해서는 선택의 자유를 누렸겠지만, 자신과 가족, 자녀들에게 미칠 중차대한 영역에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내몰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중 어떤 이는 상황과 환경이 변한 것을 자신의 탓으로 돌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전후좌우가 모두 막힌 사회경제적 환경 속에서 관계가 끊어지고 계층의 사다리가 끊어졌음을 매일같이 확인하였을 때의 대안이 약물·알코올·자살이라는 것은, 미국을 많이 닮아가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도 반드시 경각심을 가지고 대처해야 할 문제입니다.

잘 먹고 잘 살고 싶은 것은 인간의 보편적인 욕구입니다. 한편 미국의 절망사 현상을 보며 잘 '죽는' 사회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언제까지고 탄탄대로의 길을 걷기 어려운 현대 사회에서 부디 절망사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내가만드는복지국가는 의제별 연대 활동을 통해 풀뿌리 시민의 복지 주체 형성을 도모하는 복지단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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