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게 깨지자"던 여공들의 결의, 유신 정권을 무너뜨리다> 에서 이어집니다.
<국가폭력과 여성>
① '나주경찰부대 사건' 유족 곽정례 할머니 上 1950년 7월 25일, 10살 딸은 아버지가 총에 맞는 모습을 봤다 (☞바로가기)
② '나주경찰부대 사건' 유족 곽정례 할머니 下 "유족회 막내가 일흔 둘이야, 한국전쟁 때는 뱃속에 있었을 거라고" (☞바로가기)
③ 삼척 고정간첩단 피해자 김순자 할머니 上 대한민국이 간첩으로 내몬 한 여자의 '평생 자술서' (☞바로가기)
④ 삼척 고정간첩단 피해자 김순자 할머니 下 "내 아들 내 놓아라" 엄마들은 밤새 철창을 잡고 흔들어 댔다 (☞바로가기)
⑤ '재일교포 실업인 간첩단 사건' 피해 유족 김호정 씨 上 "15년 만에 알게 된 아버지 죽음의 진실, 범인은 '국가'였다"(☞바로가기)
⑥'재일교포 실업인 간첩단 사건' 피해 유족 김호정 씨 下 "독재정권 시대의 인권침해" 그 한 줄로 시작된 아버지 죽음의 진실규명(☞바로가기)
⑦ 실미도사건 유족 임충빈 씨 上 1968년, 실미도 사건 이후를 살아가는 사람들(☞바로가기)
⑧ 실미도사건 유족 임충빈 씨 下 실미도 사건, 남은 사람들의 절규 "사형하고 암매장…어디 묻었는지도 말 안해요"(☞바로가기)
* 이번 연재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와 함께 기획했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무너졌지만 그 계기를 만든 YH무역 여공들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신민당사 농성 뒤에는 경찰의 조사가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순영 씨가 임신 중이어서 고문만은 피할 수 있었다.
조사 뒤에도 YH무역 여공들의 고초는 계속됐다. 순영 씨를 포함한 YH무역 노조 간부 4명은 1982년 3월 법원으로부터 '국가보위에관한특별조치법(이하 국가보위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사건 이후 간부들에게 경찰의 감시가 붙기도 했다.
농성 진압 뒤 정부가 준비한 버스에 실려 강제 귀향된 YH무역 여공들은 이후 정부가 만든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라 취직도 하지 못했다.
YH무역 사건의 가장 큰 피해자, 경찰의 강경진압으로 목숨을 잃은 김경숙을 추모하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 박정희 정권이 무너진 뒤 전두환의 쿠데타로 또다시 군사독재정권이 들어선 탓이었다. 1980년 첫해 추모행사는 새문안 교회 지하실에서 비밀리에 치러졌다. 1983~4년과 1986년의 추모제는 경찰에 의해 원천 봉쇄됐다.
6월 항쟁이 있은 뒤인 1987년 8월 30일 김경숙열사 추모식은 노동자 대회와 병행해 제대로 치러질 수 있었다. 이후로도 추모제는 매해 진행됐다. 순영 씨도 이를 함께했다.
31년 만에 밝혀진 'YH무역 사건'의 진실
노동시민사회와 달리 국가 차원에서 김경숙을 비롯한 YH무역 여공들의 복권이 이뤄지기까지는 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사건 발생으로부터 29년이 흐른 2008년 3월 13일, 진실화해위는 순영 씨가 낸 김경숙의 죽음과 YH무역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 결정을 냈다.
결정문을 보면, 경찰의 발표와 달리 김경숙은 강제진압 이전이 아닌 이후 사망했다. 시신의 후두부에서는 치명적인 상처가 발견됐고, 손등에도 파이프와 같은 둥근 관에 가격당한 상처가 있었다. 추락지점도 경찰이 발표한 건물 뒤편 창문 아래 지하실계단 입구가 아닌 건물 왼편 비상계단 아래였다.
경찰이 자신의 과오를 가리고자 한 여공의 죽음에 대해 사인부터, 시간, 장소에 이르기까지 거짓으로 점철된 발표를 했던 셈이다. 구체적인 사실에 바탕한 그 결정문을 받아든 순영 씨는 다시 한 번 마음이 아팠고, 다른 한편 기가 막혔다.
같은 결정문에서는 정부가 YH노조 여공의 '블랙리스트'를 작성해 이들의 취업을 제한한 것도 사실이라고 적시됐다. 도시산업선교회가 이들의 농성을 배후조종했다고 한 경찰의 발표도 거짓으로 판명됐다.
진실화해위의 결정 이후 김경숙의 유가족과 전 YH무역 노조 조합원 24명은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승소 판결을 받았다. 2018년에는 순영 씨 등 노조 간부 4명과 시민운동가 1명에 대한 국가보위법 위반 혐의 재심재판에서 무죄가 선고됐다.
"또 그렇게 살 것 같아요"
20대 시절 노조 활동부터 40여 년에 걸친 복권까지, 그 길을 함께 해온 YH무역 여공들은 지금도 가끔 만난다. 그들은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을까. 힘들게 산 이야기도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후회는 없다"는 그 말처럼 순영 씨는 지금도 노동자들과 무언가를 함께 하고 있고, 그들에 대한 애정과 애잔함을 갖고 있다.
인터뷰를 시작할 즈음에는 1970년대에 노동운동을 한 43명의 여성 노동자가 쓴 수기가 책으로 나온다며 잘 알려지지 않은 평범한 여성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알리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한국도로공사 요금수납원이나 건강보험공단 콜센터 상담사들의 투쟁에 대한 생각을 물을 때는 "제가 싸울 때보다도 전선이 복잡해져 더 힘들 것 같다"고 안타까워했다.
'노동자와 함께 살다 잠들다'는 비문을 남기고 싶다던 20대의 YH무역 여공. 1000명의 경찰병력을 앞세웠던 국가도 그 여공의 양심에 따른 삶을 꺾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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