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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정권 시대의 인권침해" 그 한 줄로 시작된 아버지 죽음의 진실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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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정권 시대의 인권침해" 그 한 줄로 시작된 아버지 죽음의 진실규명

[국가폭력과 여성] ⑥ '재일교포 실업인 간첩단 사건' 피해 유족 김호정 씨 下

<평범한 가정에 날벼락처럼 내려친 '간첩단 조작 사건'> 에서 이어집니다.

<국가폭력과 여성>

① '나주경찰부대 사건' 유족 곽정례 할머니 上 1950년 7월 25일, 10살 딸은 아버지가 총에 맞는 모습을 봤다 (☞바로가기)

② '나주경찰부대 사건' 유족 곽정례 할머니 下 "유족회 막내가 일흔 둘이야, 한국전쟁 때는 뱃속에 있었을 거라고" (☞바로가기)

③ 삼척 고정간첩단 피해자 김순자 할머니 上 대한민국이 간첩으로 내몬 한 여자의 '평생 자술서' (☞바로가기)

④ 삼척 고정간첩단 피해자 김순자 할머니 下 "내 아들 내 놓아라" 엄마들은 밤새 철창을 잡고 흔들어 댔다 (☞바로가기)

* 이번 연재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와 함께 기획했습니다.

아버지가 간첩 누명을 썼다는 사실을 알고도 10여년이 흐른 2005년이 되어서야 호정 씨는 억울함을 풀 실마리를 찾았다. 그해 연말 경기 광명의 한 지역신문에서 1기 진실화해위 출범 소식을 봤다. 피해 예시 중 하나로 "독재정권 시대의 인권침해"가 적혀있었다. 그 한 줄을 보고 아버지가 연루된 '재일교포 실업인 간첩단 조작 사건'의 진실 규명 신청을 다짐했다.

'이번에는 뭔가를 해볼 수 있을까'하는 마음을 품은 채 호정 씨는 탄원서와 판결문, 당시 기사를 들고 2006년 1월 진실화해위 사무실을 찾았다. 차분하게 사건을 설명하려 했지만 아버지의 죽음을 말할 때는 어쩔 수 없이 눈물이 고였다.

호정 씨의 이야기를 들은 사무국장은 솔직하고 진심 어린 조언을 해줬다. 진실을 찾는 과정은 고단하고 실익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것, 아버지 산소에 명예회복의 꽃 한 송이 바치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하라는 것, 최대한 많은 피해자와 함께 진실규명을 신청하는 편이 좋다는 것,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을지 고민할 것이며 자주 전화주시라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이후 두 달 동안 호정 씨는 최대한 많은 피해자를 찾기 위해 간절한 마음을 안고 직접 뛰기 시작했다.

아버지와 같은 일을 겪은 사람들을 찾기 위해 직접 뛰다

가장 먼저 만난 이는 외삼촌 허병선 씨였다. 2006년 1월이 끝나가던 어느날, 병선 씨는 호정 씨에게 처음 듣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결혼하고 2주 정도 지난 무렵 낯선 사람들에게 끌려가 남산 중앙정보부에서 5박 6일 간 고문을 당했다는 것이었다.

고문의 기억은 병선 씨의 마음에 새겨진 채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가해자들은 자신들이 간첩단 조작 사건의 주동자로 지목한 강우규가 간첩인 거 다 알지 않느냐며 병선 씨를 주먹으로 팼다. 기마자세로 서 있게 한 뒤 몸이 내려가면 배를 치고 뺨을 때렸다. 사지를 곤봉에 묶어 두 책상 사이에 매달기도 하고, 얼굴에 수건을 덮고 주전자로 물을 붓기도 했다.

이후로도 호정 씨는 가족들과 함께 온갖 곳에 수소문을 해 4명의 피해자와 1명의 피해유족을 찾아 그들이 겪은 일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 역시 끔찍한 고문의 기억과 이후 삶의 어려움 등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런 일이 쉽지는 않았지만 얻은 것도 있었다.

"처음에는 너무 막연했어요. 과연 이분들이 말을 해줄까.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서로 연락이 안 닿아서 그렇지 아무에게도 하지 못한 말을 꺼내놓으면서 서로의 삶에 대해 좀 안쓰러워하고 걱정해주는 그런 게 무척 따뜻하다고 느꼈어요."

생전 처음 본 자신에게 기꺼이 증언을 해주는 이들을 보며 진실 규명이 좌절되면 안 된다는 책임감도 커졌다. 그들을 만난 이상 더는 혼자 하는 일이 아니었다.

2006년 3월, 호정 씨는 두 달 간 만난 이들과 함께 강용규, 김문규, 김추백, 이오생, 이근만, 허병선 등 6명이 연루된 간첩단 조작 사건의 진실을 규명해달라는 신청서를 진실화해위에 제출했다. ‘재일교포 실업인 간첩단 조작 사건’이 발생하고 29년만의 일이었다.

▲ 2008년 시청 광장에서 1기 진실화해위원회가 열었던 사진전. ⓒ연합뉴스

길고 긴 기다림, 그리고 또 다른 상처

진실화해위의 진실 규명과 법원의 재심 과정 또한 길고 긴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진실화해위 결정문은 진실 규명을 신청한 날로부터 4년여가 지난 2010년 5월에야 나왔다. 결정문에는 김추백 씨 등 6명에 대한 불법구금과 가혹행위가 있었다는 내용이 담겼다. 같은 해 10월 법원에 제출한 재심 청구에 대해 대법원이 무죄 판결을 확정한 때는 2016년 6월이었다. 진실 규명 신청에서 재심 무죄 판결까지 10년이 걸린 셈이다.

한편 진실화해위는 결정문을 내며 강용규 씨와 김문규 씨에 대한 범죄사실 조작을 인정하지 않았다. 검찰이 간첩단의 주동자로 지목했던 강우규 씨가 2007년 사망해 공소내용을 부정할 있는 직접 증거를 확보할 수 없었다는 이유에서였다.

두 신청인과 그들의 가족은 물론 호정 씨에게도 서운하고 아쉬운 결과였다. 호정 씨는 2006년 일본에 가 직접 강우규 씨를 찾아보려 여권까지 만든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공공기관이 해야지 민간인이 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당시 조사관의 만류에 뜻을 꺾었었다.

가해자들이 고문 사실을 부인하는 것을 보는 일도 힘들었다. 77년 당시 간첩단 조작 사건 수사관들은 진실화해위 조사에서도, 재심 공판에서도 고문은 없었다고 말했다. 호정 씨의 외삼촌 병선 씨가 진실화해위 결정문에 당시 고문은 없었으며 병선 씨가 호정 씨의 어머니를 위해 유리한 증언을 했다는 수사관들의 진술이 담긴 것을 보고 불같이 화를 낸 일도 있었다.

간첩단 조작 사건 피해자들에게 힘이 되어 준 사람들

다행히 호정 씨가 하려는 일에 진심을 내어준 사람들이 있었다. 생면부지의 사람을 돕기 위해 일본에서 '강우규를 구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결성됐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감동을 받았다. 호정 씨가 회원으로 있는 인권연대 사람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나 이령경 릿쿄대 교수 등 연구자도 큰 힘이 됐다.

2014년 12월 서울고등법원에서 재심 선고일 무죄 판결을 내린 판사도 기억에 남는 이 중 한 명이다. 판결문 자체보다도 판결문을 읽어 내려가던 그의 태도가 마음을 울렸다.

"그날 판사님이 판결을 하면서 진심 어린 사과와 저희를 이해해주는 말을 하다 울먹이셨어요. 재판정에 있던 사람들도 울었고요. 그날 목이 메어서 판사님이 재판을 빨리 마무리하고 들어가시던 게 기억나요. 그런 모습에 사람들이 무척 위안을 받았어요."

서울고법의 판결문에는 피해자들이 느꼈을 절망과 공포에 대한 공감, 사법 절차에서 피해자가 심각한 상처를 받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법관의 중대한 임무라는 점을 새삼 깨달았다는 고백, 30여 년 전 법원이 내린 잘못된 판결에 대한 반성, 이번 판결이 피고인들의 마음에 작은 위안이 되었으면 한다는 기원 등이 담겨있었다.

막상 2016년 6월 대법원 선고는 "검사의 상고를 모두 기각한다"는 한 줄의 문장으로 되어 있었다. 정말로 아버지에게 명예회복의 꽃 한 송이를 바칠 수 있게 된 순간이었지만 '이것 때문에 이렇게 기다려야했나' 허탈한 마음도 들었다.

▲ 호정 씨가 재일교포 실업인 간첩단 조작 사건 피해자 11명의 이야기와 진실 규명을 기록한 책 <발부리 아래의 돌> ⓒ우리학교

폭력은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다, 그 이야기에 조금만 귀를 기울인다면

무죄 판결이 확정된 뒤 호정 씨는 '재일교포 간첩단 조작 사건'의 진실과 사건이 남긴 상처에 대한 기록을 남기기 위해 위해 책을 쓰기 시작했다. 자신의 기억을 곱씹고, 그간 만난 피해자와 유족의 이야기를 다시 정리하고, 1만 장이 넘는 사건 관련 자료를 뒤적였다.

"제 스스로 좀 정리를 하고 싶었어요. 이게 어떤 일이었는지를 좀 알고 싶었고. 재판은 한계가 있으니까. 재판은 재판관과 우리들만 아는 건데 더 중요한 건 이런 사건이 가능하게 한 사회가 있었다는 걸 알리고 기록하는 거고 저 자신에게 그 일을 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쓰고 나서는 숙제를 한 느낌이 있었던 것 같아요. 책에 나오는 피해자들, 제가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신 피해자들에게 누가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컸고요."

호정 씨의 노력은 2018년 1월 <발부리 아래의 돌>(우리학교)로 결실을 맺었다. 서문에서 호정 씨는 "저는 우리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과거사'가 아니라 '지금 여기'의 이야기,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누구나'의 이야기, 나아가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아픔들과 손잡는 이야기로 들려주고 싶었습니다"라고 썼다.

지금도 그 마음은 그대로다. 인터뷰의 말미, 과거사 사건을 접한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물었을 때 호정 씨는 서문에 썼던 문장을 풀어낸 것 같은 말을 꺼냈다.

"저도 직접 겪지 않았다면 국가폭력 사건을 접했을 때 '그런 일이 있었구나' 하며 지나갔을 것 같아요. 꼭 고문 폭력이 아니더라도 산업재해, 성폭력 같은 사건들. 정말 아무런 근심 없이 살던 사람에게 불현듯 닥치는 그런 일들에 대해 그들이 겪는 고통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가진다면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도 줄여나갈 수 있고, 그런 일로 상처 받은 사람들의 마음도 한결 덜 슬퍼질 것 같다고 생각해요."

호정 씨가 책에 쓴 문장을 한 번 더 인용하자면, "진실규명이나 재심무죄 판결은 피해자들의 고통을 해결해주는 마법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국사회가 진심을 다해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지속한다면, 그들의 슬픔을 조금은 덜어낼 수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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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락

내 집은 아니어도 되니 이사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집, 잘릴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충분한 문화생활을 할 수 있는 임금과 여가를 보장하는 직장, 아니라고 생각하는 일에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나, 모든 사람이 이 정도쯤이야 쉽게 이루고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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