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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족회 막내가 일흔 둘이야, 한국전쟁 때는 뱃속에 있었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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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유족회 막내가 일흔 둘이야, 한국전쟁 때는 뱃속에 있었을 거라고"

[국가폭력과 여성] ② '나주경찰부대 사건' 유족 곽정례 할머니 下

<1950년 7월 25일, 10살 딸은 아버지가 총에 맞는 모습을 봤다> 에서 이어집니다.

(관련기사 바로가기 ☞ : [국가폭력과 여성] ① '나주경찰부대 사건' 유족 곽정례 할머니 上 1950년 7월 25일, 10살 딸은 아버지가 총에 맞는 모습을 봤다)

* 이번 연재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와 함께 기획했습니다.

정례 씨의 서울살이

정례 씨가 큰아버지집을 나온 건 이모의 말을 듣고서였다. 외삼촌이 서울에 혼자 사니 같이 살며 집안일을 봐달라고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집을 떠났다. 일 잘하는 정례 씨가 서울로 갔다고 큰아버지집에서는 난리가 났다.

그 무렵 정례 씨 나이는 16살이었다. 외삼촌과 둘이 단칸방에 살기는 불편했다. 곧 정례 씨는 자신이 서울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온, 이미 결혼해 살고 있던 사촌오빠네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곳에서도 식모살이 삶이 계속됐다.

그런 중에도 정례 씨는 서울에서 일을 구했다. 처음 구한 일은 과자 공장에서 과자를 포장하는 일이었다.

"(사촌오빠네) 집 문 앞에 앉아 있는데 우리보다 나이를 더 먹은 아가씨가 와갖고 과자 공장에 사람이 없다고 사람을 구하는 거야. 데모한다고 다 가버렸다고. 과자를 많이 먹을 수 있대. 물어도 안 보고 따라갔어. … 처음에는 가져가도 되는 줄 알고 과자를 잔뜩 다 들고 왔어. 나중에 주인이 그래. '여기서 먹는 건 마음대로 먹는데 가져가지는 마라'고(웃음)."

여공의 급여는 과자 포장 개수에 따라 매겨졌다. 정례 씨는 한 푼이라도 더 벌려 새벽 4시에 집을 나섰고 밤 11시에 공장에서 나왔다. 손도 빨랐다. 하지만 젊은 여공의 벌이가 넉넉할 리는 없다. 그렇게 일해도 집세를 내고 생활비를 쓰면 남는 게 없었다.

2, 3년 정도 과자 공장에서 일하자니 이렇게 살아서는 미래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술을 배우고 싶었다. 해가 지면 일이 끝난다는 말을 듣고 직물공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직물공장 일은 정말로 해가 지면 끝났다. 그날 만든 천을 볕에 말려야했기 때문이었다.

퇴근하고 저녁 시간이면 정례 씨는 미용학원에 갔다. 미용기술이 생계를 위해 쓰일 한평생 밑천이 됐다.

"내가 아버지를 닮았나 봐. 손재주가 있었어. 학원에서도 일을 제일 빨리 배우고 옆에 애들이 못하면 내가 가서 선생 대신 가르쳐주고. 그러고 다녔어. 나중에는 미용학원을 차려서 한 7, 8년 선생도 하고."

정례 씨는 사촌오빠 집에서 나와 따로 방을 구해 살고 있었다. 곧 그 집에 자신보다 3살, 6살 어린 두 동생이 함께 살게 됐다. 첫째 동생은 한복 기술을 배웠다. 자매 중 유일하게 중학교를 마쳤던 둘째 동생은 모토로라 공장에서 일하면서 야학에 다녔고 나중에는 뜨개질 기술을 배웠다.

▲ 지난 22일 국회 인근 카페에서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나주경찰부대 사건' 유족 곽정례 씨. ⓒ프레시안(최형락)

정례 씨의 아픔이 세상과 만나기까지

바쁘게, 또 열심히 살았다. 그렇다고 10살 어린 나이에 부엌에 숨어 두 눈으로 본 아버지의 죽음이 잊힐 리는 없었다.

"1960년도부터 이걸 하려고(억울함을 풀어보려고) 사방을 돌아다녔어. 어디 가서 입을 못 벌리겠더라고. 친척한테도 말했어. 1970년대에 우리 집안에 고시에 합격한 애가 있었거든. 그래서 내가 '이걸(아버지에게 일어난 일) 좀 어떻게 해줘 봐라' 그랬어. 그러니까 '누나. 안 될 거에요' 그러더라고. '그게 나라에서 한 짓들이라 안 될 거에요.'"

1980년 즈음 인권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갔다. 자신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본 일을 이야기해도 믿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다. 한참 사연을 이야기하다"이건 우리가 못 다루는데요"라는 말을 듣고 할 말이 없어 발길을 돌렸다.

아버지를 잃고 55년이 지난 2005년 어느날이었다. 그날 정례 씨는 언니 집에서 TV를 보고 있었다. 우연히 진실화해위 출범 소식을 다룬 뉴스를 봤다.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 피해 신고를 받는다는 말도 들었다. '피해를 신고해야겠다' 마음먹었다.

"벽에 캘린더(달력)가 걸려있어서 쭉 잡고 찢으니 찢어지더라고. 거기에 아버지가 이렇게 돌아가셨다고 딱 한 줄 썼어. 쓰고 나니까 무서워. 이놈들이 신고를 받아주기는 할지, 잡아가려고 그러는 건 아닌지 그걸 모르겠더라고. 그때 인터넷이 있었거든. 인터넷에 찾아보니 (진실화해위) 사무실이 충무로에 있대. 갔어. 접수하는 아가씨한테 '이거 넣어도 안 잡아가냐' 물어보니까 그렇대. 그래서 접수했지."

정례 씨는 진실화해위 사람의 소개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학살자 전국 유족회(아래 유족회)'에 가입했다. 자신과 비슷한 일을 겪은 사람이 많았다. 어떤 사람은 아버지 시체도 찾지 못했다고 했다. 군경이 사람들을 운동장에 모아놓고 한꺼번에 쏘아죽인 탓이었다. 아버지와 형을 한꺼번에 잃은 사람도 있었다. 가족이 죽은 뒤 떠돌며 식모살이를 했다는 이도 있었다.

비슷한 아픔인 사람들을 만나며 정례 씨는 위안을 얻었다. 지금도 정례 씨와 유족회 사람들은 같은 뜻을 품고 함께 싸운다.

▲ 지난해 5월, 곽정례 당시 한국전쟁유족회 여성위원회 부위원장이 20일 오후 국회 본회의에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일부개정법률안(대안)이 통과되자 눈물흘리고 있다. ⓒ연합뉴스

진실 규명 과정에서 얻은 위로와 상처

아버지가 죽은지 58년이 지난 2008년, 진실화해위는 정례 씨가 아버지를 잃은 '나주경찰부대 사건'을 "경찰의 불법행위로 발생한 민간인 희생"으로 규정했다. 국가에는 피해에 대한 사과와 명예회복 조치를 권고했다.

진실화해위의 결정문을 받아든 정례 씨는 38명의 유족과 함께 '나주경찰부대 사건'의 재심을 받기 위해 법원 문을 두드렸다.

사건의 실체에 관한 한 재판부는 유족의 손을 들어줬다.

2012년 1월 1심 재판부는 "나주경찰부대 등은 무고한 주민을 어떤 절차도 거치지 않고 총살했다"며 "전쟁 중이라고 해도 절대 허용될 수 없는 극단적이고 조직적인 범죄행위에 대해 국가는 희생자와 유족들의 정신적 손해를 배상할 의무가 있다"고 판결했다.

유족 38명에 대한 배상금은 총 27억여 원으로 책정됐다. 1인당 7000만 원이다.

같은 해 11월, 2심 재판부도 사실관계에 대한 한 1심 재판부와 같은 취지의 판결을 내렸다. 배상금은 1심 재판부와 같은 금액을 인정하되 연 5~20%의 지연이자를 더해 총 55억여 원으로 정했다. 60여 년 한을 품고 살아온 정례 씨에게 국가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위로였다.

"고등법원에서 만난 판사가 되게 착한 사람이야. 처음 재판에 들어갔을 때 우리 걸 읽어보더니 '아무리 전시라도 뭐 이런 일이 있어' 혼잣말로 이래. 마이크가 꺼진 줄 알았나 봐. 나중에 배상액 판결 내리면서는 우리를 보면서 그러더라고. '이거 갖고 위로가 되시겠어요?' 내가 지금도 그 판사를 찾고 싶어."

그 최소한의 위로는 완성되지 않았다. 2014년 7월 당시 양승태가 이끌던 대법원은 '나주경찰부대 사건' 원심을 깨고 서울고법에 돌려보냈다. 다른 과거사 사건과 같은 액수의 배상금을 책정하라는 것이 파기환송의 이유였다. 8484(희생자 8000만 원, 배우자 4000만 원, 자녀 800만 원, 형제자매 400만 원)이라는 법원의 내부 지침에 비슷한 판결이 이어지던 때였다.

"아버지 배상금이 8000에 우리들 받은 게 800이야. 내가 따졌어. 우리 아버지 목숨 값이 이것밖에 안 되냐. 우리가 70년 동안 고생한 게 800? 무슨 법이 이러냐."

8000만 원의 배상금을 지급한 국가의 그해 예산은 355조 8000억 원이었다.

배상 문제와는 별개로 국가의 입장을 방어하겠다며 소송 상대로 나온 경찰관이 한 말이 정례 씨의 마음을 후벼판 날도 있었다.

"해남에 O 경장이라고 있어. 법원에 와서 뭐라고 하냐면은 '시효가 지났는데요' 이래. 판사가 못 들었나 봐. 다시 물어보니까 또 '시효가 지났는데요' 판사가 '뭐라고요?' 하니까 '법적으로 시효가 지났다고요' 그래. 내가 벌떡 일어났어. 그러고 악을 썼어. 지금 뭐라고 했냐고. 당신 법이라고 했냐고. 우리 아버지 죽일 때는 어떤 법으로 죽였냐. 우리 아버지가 어떤 잘못이 있어서 어떤 법으로 죽였는지 대답을 해라."

▲ 지난 22일 국회 앞에 피켓을 들고 서 있는 곽정례 씨(왼쪽). ⓒ프레시안(최형락)

아직 끝나지 않은 정례 씨의 싸움

진실화해위의 진실 규명 과정과 법원의 재심 결정, 유족회 활동을 거치며 정례 씨는 투사가 됐다. 10살 정례 씨는 투사로 살 마음이 없었다. 정례 씨의 삶을 고달프게 만든 건 누구일까.

2020년 국회에서 이명박 정부 시기 활동이 중단된 진실화해위의 재가동과 과거사 사건 유족과 피해자에 대한 배보상 조항 신설을 주 내용으로 하는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아래 과거사법)' 개정안이 논의될 때도 정례 씨는 국회에서 유족회 회원들과 함께 피켓 시위를 했다.

"국회 남문에서 피켓 시위를 하는데 나는 계란 한 10개쯤 안고 커피를 이만한(큰) 통에 한나(많이의 전라도 방언) 끓여가지고 새벽에 나가는 거야. 그러면 아침에 국회의원들이 그길로 출근을 해요. 그런데 재밌는 거는 (다른 유족회 회원은) 남자들이니까 가만히 있어. 나는 그렇게 해서 안 된다고. (유족들의 사연과 요구를 적은) 판넬을 들고 (의원들) 차에 막 들이대. 그러면 어떤 의원은 그냥 가고. 어떤 의원은 꼭 문을 내리고 손을 흔들어줘. 그런 게 진선미 의원이었어."

정례 씨에게 그 활동을 계속한 이유를 물었다. 아버지는 돌아올 수 없다. 자신의 한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아픈 과거를 품고 사는 사람이 많다는 답도 돌아왔다. 정례에게는 한국전쟁기 학살 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둘째 큰아버지가 있다. 유족회에는 정례 씨 같은 한을 품고 사는 사람이 많다.

"우리가 나이가 80이니까 죽을 나이 다 된 거지. 지금 유족회 막내가 일흔 둘이예요. 그러면 한국전쟁 때는 뱃속에 있었다고. 얼마 지나면 사람이 안 남아. 이제 잡아가지도 않아. 나도 가기 전에 내가 다 정리하고 가고 싶은데 쉽지가 않네. 

그래서 나는 (자신과 비슷한 일을 겪고도 진실 규명을 망설이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다 하고 가라는 말을 하고 싶어요."

2020년 5월 과거사법 개정안은 통과됐다. 지난 5월 진실화해위가 재가동됐다. 정례 씨와 같은 일을 겪은 사람들이 겪은 일을 말할 수 있는 국가적 제도가 다시 작동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개정 과거사법에 유족과 피해자에 대한 배보상 조항은 담기지 않았다. 지금도 국회 앞에서는 유족회 1인시위팀장 정례 씨와 유족회 회원들이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피해자 배보상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는 내용을 담은 피켓을 들고 1인 시위를 진행 중이다.

목숨의 값이라도 인정받아 세상을 떠난 이들이 잃어버린 생명의 존엄성과 살아남은 이들이 겪어낸 세월의 아픔을 위로를 받고 싶어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70여 년, 정례 씨는 싸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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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락

내 집은 아니어도 되니 이사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집, 잘릴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충분한 문화생활을 할 수 있는 임금과 여가를 보장하는 직장, 아니라고 생각하는 일에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나, 모든 사람이 이 정도쯤이야 쉽게 이루고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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