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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7월 25일, 10살 딸은 아버지가 총에 맞는 모습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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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7월 25일, 10살 딸은 아버지가 총에 맞는 모습을 봤다

[국가폭력과 여성] ① '나주경찰부대 사건' 유족 곽정례 할머니 上

한국전쟁기 경찰의 총에 맞아 쓰러진 아버지의 모습을 직접 본 딸이 있었습니다. 간첩조작 사건으로 고문을 받은 여성과 아버지를 잃은 여성이 있었습니다. 실미도 사건으로 오빠를 잃은 동생과 노동조합 활동을 하다 경찰의 진압에 동료의 목숨을 잃은 한때의 여공도 만났습니다.

지난 한 달여 간 다섯 명의 국가폭력 여성 피해자‧유족을 만났습니다. 그들에게서 그간 살아온 삶과 당시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픈 이야기를 꺼내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어떤 이는 사연을 직접 쓴 문서와 사건 관련 자료가 가득 든 검은 가방을 들고 나타났습니다. 얼굴 드러내기를 꺼리면서도 어떤 사명감 혹은 답답함을 이기지 못해 인터뷰에 나선 여성도 있었습니다. 이제 다 극복했다는 듯 담담하게 자신의 삶을 말하다가도 막상 사건이 있던 날의 기억을 더듬으며 눈물이 고인 얼굴로 잠시 말을 멈추는 인터뷰이도 있었습니다.

인터뷰를 하며 한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국가폭력에 대한 기억이 이토록 생생하고 그 영향과 고통이 이토록 끈질긴데, '과거사'라는 말은 온당한가? 이들의 삶이 계속되는 한 이들이 겪은 일은 현재 진행형 아닌가. 

또 한 가지 짚고 싶은 점이 있습니다. 이들의 삶이 '피해자'라는 말 안에 가둬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인터뷰에 응한 이들은 자신과 가족, 동료가 겪은 일에 대한 억울함을 풀기 위해, 또 자신의 삶을 살아내기 위해 각자의 방식으로 분투해왔습니다. 하지만 그런 삶을 바라진 않았습니다.

<프레시안>에서 준비한 '국가폭력과 여성' 기획은 그런 이야기를 전하고자 합니다.

첫 번째 주인공은 1950년 7월 하순 해남에서 10살 어린 나이로 아버지가 총에 맞는 모습을 직접 지켜본 81살 곽정례 할머니입니다. 곽 할머니와의 인터뷰는 지난달 22일 국회 인근 카페와 지난 8일 사당역 인근 카페에서 이뤄졌습니다. 이후로도 몇 차례 전화 인터뷰가 있었습니다. 

* 이번 연재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와 함께 기획했습니다.

"지금도 아버지가 죽던 생각을 하면 눈물이 나. 옷을 꼭 붙들어. 그러고서는 하늘을 쳐다봐. (우는 걸) 누가 보면 곤란하잖아. 하품을 해버려. '저 여자가 하품해서 눈물 나지' 그러고 가라고. 자다가도 그 생각을 하면 이불을 쥐고 부르르 떨어. 화가 나서 그걸 누르느라. 이렇게 하면서 평생을 사는 거야."

한국전쟁 중이던 1950년 7월 25일, 경찰의 총에 아버지를 잃은 곽정례 씨(81)는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해남에 살던 10살 정례 씨는 그날 아버지와 16살 언니, 각각 7살, 4살이던 두 여동생과 집에 있었다. 아버지가 운영하던 공장의 공장장도 함께였다. '인민군'이 사람을 죽이고 다닌다는 소문을 듣고 하루 전 피난을 가야 한다고 했던 어머니는 피난처를 구하러 집을 떠나 있었다. 오빠도 밖에 나가 있었다. 

갑자기 담을 넘어 두 발의 총소리가 들려왔다. '들어가서 나오지 말라'는 아버지 말을 듣고 네 자매는 부엌에 숨었다. 정례 씨는 그곳에서 아버지와 공장장에게 일어난 일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같은 옷을 입은 사람 두 명이 총을 들고 정례 씨의 집에 들어왔다. 그 중 한 명이 아버지에게 총을 겨눴다. 다른 한 명은 아버지를 방 밖으로 끌고 나가려 했다. 나중에야 알았다. 그들은 소문과 달리 인민군이 아니었다. 경찰이었다.

아버지는 두 경찰에게 끌려 나가지 않으려 앉은 채로 버텼다. "나는 잘못이 없다", "이야기 좀 들어보라"고도 했다. 옆에 있던 공장장도 "이 양반 아무 잘못 없다"고 거들었다. 정례 씨 언니도 우리 아버지에게 왜 그러냐고 외쳤다.

절규는 소용없었다. 두 경찰은 아버지를 잡아끌었다. 마루에 닿자 아버지가 마루 기둥을 잡고 버텼다. 한 명이 아버지의 목을 잡아채더니 다시 끌고 갔다. 대문에 닿자 아버지는 대문 기둥을 잡고 버텼다. 잠시 뒤 "탕" 하고 총소리가 들렸다.

쓰러진 아버지의 왼쪽 가슴에서 피가 쏟아졌다. 입에서는 "이놈들"이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그 말이 아버지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왼쪽 눈을 노려 또 한 번 총알이 발사됐다.

두 경찰은 멈추지 않았다. 이번에는 공장장을 양쪽에서 잡고 문밖으로 끌고 나갔다. 아버지가 끌려가는 걸 막으러 따라가다 벗겨진 공장장의 하얀 신발 한 짝이 마당에 남아있었다. 다시 두 발의 총소리가 들렸다.

"아버지 쏜 걸 봤어. 그런데 나는 그냥 그 어…. (아버지 옆에) 서 있었어요. 몇 시간을 서 있었는지 모르겠어. 우리 언니가 부엌 미닫이문을 열고 그 사이로 손가락 하나를 보이더니 이러는(까딱하는) 거야. 다시 들어와서 숨으라고. 거기까지 어떻게 걸어갔는지 기억이 지금도 안 나요."

진실화해위는 이 사건을 '나주경찰부대 사건'이라고 이름 지었다. 1950년 7월 하순 인민군에 밀려 퇴각 중이던 나주경찰부대 및 완도경찰이 민간인을 집단 살해했다.

진실화해위 조사를 보면, 당시 경찰은 해남에서 좌익을 척결한다며 집집마다 찾아가 주민을 사살했다. 완도, 마산에서는 인민군 환영 행사를 연다며 주민을 모아놓고 찾아온 이들에게 난사했다.

'나주경찰부대 사건' 희생자는 정례 씨 아버지 곽준 씨(사망 당시 39세)를 포함 97명이다. 모두 비무장 민간인이었다.

▲ 지난 22일 국회 인근 카페에서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나주경찰부대 사건' 유족 곽정례 씨. ⓒ프레시안(최형락)

정례 씨의 행복이 무너진 그날...마을에는 관이 부족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의 삶을 물었을 때, 정례 씨는 "정말 정말. 내가 생각만 해도 그때는 행복해요"라고 했다.

정례 씨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손재주가 좋은 사람이었다. 목화씨 빼는 기계, 풍로, 기계 베틀까지 못 만드는 것이 없었다. 해남에 살면서는 '해남 철공소'라는 이름의 공장을 운영했다. 주로는 자동차 부품을 만들었고 차 수리도 했다.

"아버지가 자동차를 만들려고 했어. 1950년대니까 얼마나 빨라. 부품도 만들고 하다 보니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겠는 거지. 아마 그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지금쯤 '해남 자동차'가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었을 거야."

정례 씨는 공장에 숨어들어가 아버지가 일하는 모습을 보는 걸 좋아다. 아버지와 공장장이 함께 일하던 선반 밑에 몰래 들어가 있으면 머리 위로 떨어지는 쇳가루가 꼭 은가루 같았다.

그런 정례 씨를 발견할 때마다 아버지는 "애 언제 들어와 있었어"하며 밖으로 내보냈다. 위험해서이기도 여자아이여서이기도 했을 거다. 쫓겨나고도 시간이 지나면 정례 씨는 같은 자리로 또 숨어들어갔다. 공장과 아버지의 일하는 모습이 그만큼 좋았다.

공장 장사는 썩 잘 됐다. 가족뿐 아니라 직공에게도 보리밥이 아닌 쌀밥을 먹였다. 그 소식을 듣고 일하러 온 사람도 있었다. 정례 씨네 집 앞 항아리에는 오가는 이웃들 먹으라고 어머니가 담근 술이 가득했다. 옆에는 안줏감으로 홍어회와 낙지회가 놓였다.

아버지가 떠났고 그런 행복이 완전히 무너졌다. 마을 전체가 마찬가지였다. 큰 도시도 아닌데 한번에 많은 사람이 죽으니 관집에 관이 부족했다.

"엄마가 집에 들어가면서 아버지가 총을 맞은 걸 보고 통곡을 하니까 마을에 키 큰 사람 하나가 그래. '형수님 지금 울 때가 아닌 것 같아요. 어서 관이나 있나 한번 알아봐 보세요.' 그래서 엄마랑 같이 관집에 갔어. 엄마가 치마 붙들고 얼굴 박고 따라오래. 가는 길에 보니 시체가 나자빠져 있어. 전부 왼쪽으로 누워서. 나중에 왜 그런지 알았어. 심장이 왼쪽에 있잖아.

관집을 들어가니까 관집 아저씨가 '형수님 여기 왜 오셔요' 그러더라고. 엄마가 '그 양반이 총에 맞았어요' 하니까 아저씨가 '아이고. 관 딱 하나 남은 거 팔려버렸는데' 그래. 그래도 아는 사람이라 팔린 관을 거둬다 우리를 줬어. 그런데 공장장 관은 못 구했어. 어떻게 해. 가마니로 싸서 묻어줬어."

▲ 1기 진실화해위가 작성한 '나주경찰부대 사건' 조사보고서에 담긴 해남읍 나주경찰부대 진입로 및 주민 희생지. ⓒ진실화해위

어머니의 유언 "순경들이 우리를 왜 죽여"

아버지를 잃은 뒤 정례 씨네 가족은 한동안 해남에 살았다.

처음에 어머니는 떡장사를 하려 했다. 남은 재산이 있었지만 거기에 기댈 수는 없다. 생전 해본 적 없는 일을, 전쟁통에 하기는 쉽지 않았다.

"엄마가 떡집에서 떡을 해갖고 왔어. 다리에 가서 앉아 있는데 도저히 못 팔고 돌아오는 거야. 안 팔아봐서. 나도 따라갔어.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우리를 보고 혀만 끌끌 차. 그 소리가 그렇게 듣기 싫더라고. 떡은 안 팔려. 그래서 남은 떡을 며칠을 가족들끼리 나눠 먹는데 정말 죽겠더라고. 못 먹겠어서."

얼마 뒤 정례 씨네 가족은 강진으로 이사를 갔다. 아버지가 떠난 뒤 홧병으로 시름시름 앓던 어머니는 그곳에서 쓰러졌다. 밥숟갈을 놓더니 혼자서 씻지도 화장실에 가지도 못했다.

11살 정례 씨는 학교에 다녀오면 어머니가 누워있던 자리를 치웠다. 어머니 머리의 가려운 곳을 긁어드렸다. 그때 어머니 머리를 한 번도 감겨드리지 못한 게 정례 씨에게는 한으로 남았다.

TV도,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 혼자 집에 누워있던 어머니는 외로움을 어떻게 견뎠을까. 유언을 남기던 날, 어머니는 시계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어려서도 잠을 잘 안 자는 습관이 있었어. 어느 날 밤에 어머니가 그러시는 거야. '내가 저 시계가 없으면 어떻게 살았을지 모르겠다. 밤에 너네들이 다 잠들면 적막강산인데 한 시에는 한 번 치고 두 시에는 두 번 치고. 네 번 치면 날이 밝아오는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그때 내가 어려서도 알아들었어. 유언을 하시려나 보다."

그날 어머니는 남매들이 남은 재산을 어떻게 나눠 가질지 말했다. "남은 재산이면 남매들이 먹고 살 수 있다. 항아리에 돈이 한나(많이의 전라도 방언) 있으니 보리밥 말고 쌀밥을 먹어라"고도 했다. 학교를 꼭 다니라는 말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가 숨을 거뒀다. 아버지가 숨진 다음 해 음력 유월 초열흘의 일이었다. 떠나던 날 어머니는 가슴속에 한으로 남은 말을 계속했다.

"순경들이 우리를 왜 죽여.", "돈이 무슨 소용이 있어", "공장장을 가마니에 묻었는데 어떻게 해."

아직 어린 남매들이 따로 살림을 꾸리기는 쉽지 않았다. 남매는 곧 큰아버지집에 옮겨가 살기 시작했다. 정례 씨보다 여섯 살 많았던 언니는 곧 시집을 갔다. 남은 자매 중에는 정례 씨의 나이가 가장 많았다. 아침 아궁이 치우기, 방 닦기, 20명 남짓한 식구들의 식사 준비…. 온갖 집안일이 정례 씨에게 밀려왔다.

그로부터 1년 여가 지나고 이번에는 오빠가 세상을 떠났다. 나무에서 떨어져 부러진 허리를 고치지 못한 탓이었다.

정례 씨는 그 뒤로도 5년여 간 큰아버지집에서 살았다. 남매들이 재산을 나눠갖고 모두 학교를 마치라던 어머니의 유언은 이뤄지지 않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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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락

내 집은 아니어도 되니 이사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집, 잘릴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충분한 문화생활을 할 수 있는 임금과 여가를 보장하는 직장, 아니라고 생각하는 일에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나, 모든 사람이 이 정도쯤이야 쉽게 이루고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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