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기 경찰의 총에 맞아 쓰러진 아버지의 모습을 직접 본 딸이 있었습니다. 간첩조작 사건으로 고문을 받은 여성과 아버지를 잃은 여성이 있었습니다. 실미도 사건으로 오빠를 잃은 동생과 노동조합 활동을 하다 경찰의 진압에 동료의 목숨을 잃은 한때의 여공도 만났습니다.
지난 한 달여 간 다섯 명의 국가폭력 여성 피해자‧유족을 만났습니다. 그들에게서 그간 살아온 삶과 당시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픈 이야기를 꺼내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어떤 이는 사연을 직접 쓴 문서와 사건 관련 자료가 가득 든 검은 가방을 들고 나타났습니다. 얼굴 드러내기를 꺼리면서도 어떤 사명감 혹은 답답함을 이기지 못해 인터뷰에 나선 여성도 있었습니다. 이제 다 극복했다는 듯 담담하게 자신의 삶을 말하다가도 막상 사건이 있던 날의 기억을 더듬으며 눈물이 고인 얼굴로 잠시 말을 멈추는 인터뷰이도 있었습니다.
인터뷰를 하며 한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국가폭력에 대한 기억이 이토록 생생하고 그 영향과 고통이 이토록 끈질긴데, '과거사'라는 말은 온당한가? 이들의 삶이 계속되는 한 이들이 겪은 일은 현재 진행형 아닌가.
또 한 가지 짚고 싶은 점이 있습니다. 이들의 삶이 '피해자'라는 말 안에 가둬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인터뷰에 응한 이들은 자신과 가족, 동료가 겪은 일에 대한 억울함을 풀기 위해, 또 자신의 삶을 살아내기 위해 각자의 방식으로 분투해왔습니다. 하지만 그런 삶을 바라진 않았습니다.
<프레시안>에서 준비한 '국가폭력과 여성' 기획은 그런 이야기를 전하고자 합니다.
두 번째 주인공은 1979년 6월, 간첩으로 몰려 고문과 감옥살이를 한 79세의 김순자 할머니입니다. 김 할머니를 비롯한 친정의 친인척 12명이 가족 간첩단으로 누명을 썼고 김 할머니의 아버지는 형장의 이슬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믿기지 않는 억울하고 기막힌 사연. 김 할머니는 가족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삶을 빼앗을 국가의 사과를 받기 위해 40여 년을 싸웠습니다. <프레시안>이 10월31일과 11월9일, 두 차례에 걸쳐 각각 관악구 민가협 양심수후원회와 경기 안양시 인근에서 김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 이번 연재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와 함께 기획했습니다.
서울에서 홀로 세 아이를 키우던 서른셋의 김순자는, 어느 여름날 회사에 들이닥친 사복경찰 두 명에게 수갑이 채워졌다. 김순자의 친정식구들은 이미 끌려간 뒤였다.
어딘지도 모르고 들여보내진 곳은 남영동 대공분실이었다. 경찰, 혹은 중앙정보부 소속의 수사관은 잠을 재우지 않는가 하면, 구두를 벗어 얼굴과 머리가 부르트게 때렸다. 긴 꼬챙이를 가져오더니, 가슴과 성기를 찌르겠다고도 위협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두렵고 아픈 건 옆방에서 들리는 가족의 비명이었다. 수사관은 가족을 고문하겠다고 협박했다. "간첩질한 걸 자백하라"면서.
1979년, 삼척의 산골짜기에 살던 열두 명의 일가족에게 '삼척 고정간첩단'이라는 낙인이 붙었다. 누명을 벗는 데 37년이 걸렸다.
만들어진 간첩
반공주의가 서슬 퍼렇던 1979년 6월, 백주대낮에 벌어진 일이었다. 김순자는 대한교육보험(현 교보생명) 외무사원이었다. 그땐 인터넷이 없어 보험사원이 직접 보험료를 수금하러 다녔었다.
평소처럼 퇴근하고 집에 왔더니 마산에 있던 올케, 그러니까 남동생 태룡의 아내가 100일 남짓 된 조카를 안고 와 있었다. 회사에 간 태룡을 경찰들이 들어오더니, '살인죄에 연루됐다'며 권총을 들이밀고 데려갔다고 했다. 태룡의 회사 동료가 이를 올케에게 전했고, 올케가 조카와 함께 서울로 올라와 김순자에게 알렸다. 나중에 알고보니 태룡이 끌려간 날 다른 남동생 태일, 부모님과 두 작은아버지, 아버지의 외사촌 등 친인척 열한 명도 끌려갔다.
늘 외근인 김순자는 뒤늦게 잡혀 들어갔다. 김순자의 집에도 경찰이 왔었으나 김순자의 행방을 몰랐는지 집에 있던 올케에게 "김순자가 오거든 집에서 기다리라"고 했단다. 그 말을 전해듣고 김순자는 계속 경찰을 기다렸다. 두렵기보다는 가족들이 어디로 갔는지가 걱정됐다. 하지만 기다려도 경찰은 오지 않았다. 일도 계속 밀렸다. 김순자는 네 살 막내아들을 업고 밀린 일을 하며 부모님이 계신 고향 삼척으로 갔다.
친정집엔 다른 가족들 모두 끌려가고 중학생이던 여동생 명숙만 남아 있었다. 심상치 않음을 느낀 김순자는 명숙에게 아들을 맡기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리고 회사에 출근한 날, 그렇게 됐다.
일가족 열두 명이 각각 고문실에서 끔찍한 고문에 시달렸다. 사람이 많아 나중엔 근처 여관에 몰아넣고 불러다 고문하며 조사했다. 매일 조사받고 여관방에 돌아오는 가족은 깁스를 하고 있는가 하면, "그저 죽고만 싶다"고도 했다. 모진 고문 끝에 김순자와 가족은 결국 하지 않은 일을 했다고 자술서를 썼다. 김순자는 "거의 불러주는 대로 썼다"고 했다.
김순자는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엄마 김경옥. 고모(김순자 아버지 외사촌 진항식의 아내. 김순자가 고모라고 표현) 윤정자 3년 6개월. 남자 가족은 더 가혹했다. 김순자의 아버지 김상회와, 아버지의 외사촌 진항식은 사형을 선고받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김순자의 남동생 김태룡과, 진항식의 동생 진창식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진항식의 아들 진형대 징역 10년, 김순자의 작은아버지 김달회와 김건회, 김순자의 동생 김태일 징역 7년, 진항식의 막내 동생 진윤식은 징역 5년이 확정됐다.
간첩이 된 이유, '친척을 신고하지 않아서'
사건의 발단은 11년 전인 196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8년, 결혼해 출가한 김순자가 첫 아이를 낳고 친정에 몸조리하러 갔을 때였다. 한국전쟁 때 소식이 끊겼던 김순자의 진외당숙(아버지의 외사촌) 진현식이 왔다. 아버지 김상회와 나이가 비슷해 어렸을 때 단짝처럼 지낸 이였다.
진현식은 전쟁 때 북으로 넘어갔었다. 당시 북한은 남한 출신을 간첩으로 만들어 자기 고향으로 보냈다. 십여 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 진현식 또한 남파간첩이었다. 진현식은 1965년 즈음부터 자신의 부모와 형제가 사는 자신의 고향집을 오갔다. 마을에서 '진 씨네'라 불리던 집이었다. 진 씨네 또한 죽은 줄 알았던 가족이 그저 반가웠을 테다.
전쟁 때 많은 사람이 행방불명돼 생사를 알 수 없었다. 남은 가족은 그가 사라진 날을 제삿날 삼아 제사를 치르곤 했다. 진현식도 그런 이들 중 하나였다.
1968년 그날, 북으로 돌아가던 진현식은 어느 절벽에서 떨어져 다리를 심하게 다쳤다. 마침 그 근처에 어렸을 때 친하게 지낸 김상회가 산다는 게 생각난 것이다.
잠시 머무르다 갈 줄 알았던 진현식은 몇 년을 지냈다. 다친 다리가 점점 악화돼, 걸을 수 없는 지경이었던 것이다. 진현식은 거의 밖으로 나오지도 못했다. 김순자는 어쩌다 친정을 오가며 진현식을 종종 봤다. 어쩌다 한번 진현식의 안부를 묻는 진 씨네 쪽지를 전했었다. 그 쪽지는 나중에 '북한과 내통했다'로 돌아왔다.
진현식이 집을 떠나기까지 두려움과 불안함의 연속이었다. 김순자의 아버지는 이사를 핑계로 진현식을 내보냈다. 그게 끝이었다. 진현식은 진 씨네서 잠시 머무르다 떠났다고 들었다. 아마 진현식 또한 가족들이 해를 입을까 걱정됐을 게다. 진 씨네는 떠난 진현식이 '어디 죽으러 간 것 같다'고 했다.
그러나 진현식을 내보낸 뒤에도 두려움과 붊안함은 끊나지 않았다. 진현식이 사라지고 몇 년 뒤 다른 북한공작원들이 진 씨네, 그리고 김순자의 친정에 찾아왔다. 소식이 끊긴 진현식을 내놓으라고 위협했다.
"혐의 적힌 공소장, 읽지도 못했다"
이 일로 김순자 가족에게 그 당시 호환마마보다 무서운 국가보안법, 반공법 위반이라는 혐의가 씌었다. 간첩방조부터 사상교육, 내란음모 등. 간첩잡기가 최고의 승진 코스였던 그때, 김순자 가족은 좋은 먹잇감이었을 게다.
몇 달을 잡혀 고문당하는 동안 김순자 가족은 혐의가 뭔지도 몰랐다. 구속영장 같은 건 당연히 없었고, 혐의가 적힌 '공소장'이란 건 기소된 후에야 봤다고 했다. '~은/는', '~을/를' 등 조사를 제외한 대부분이 한자로 적힌 공소장이었다.
삼척의 산골짜기에서 걸어서 한 시간은 걸렸던 학교를 2년 남짓 다닌 김순자였다. 말이 2년이지, 농사짓는 집의 장녀인 김순자는 거의 나가지도 못했다. 한자를 읽을 리 없었다. 평생 농사만 지은 아버지는 글을 읽을 줄도 몰랐다.
김순자는 '평생 자술서'라는 것도 썼다. 수사관은 김순자에게 '33년을 어떻게 살았는지 쭉 말해 보라'고 했다. 다른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열두 가족의 삶은 비틀리고 비틀리다 덧칠에 덧칠이 더해졌다. 완성된 시나리오는 "삼척의 일가족이 반국가단체인 '통일혁명당 강원도위원회'를 조직했다는 것이었다.
재판은 일사천리로 진행돼 1년 안에 끝났다. 나중에 보니 공소장에 적힌 오탈자까지 판결문에 그대로 있었다. 화가 나고 허탈했다. '국민을 보호한다'고 철썩같이 믿었던 그 국가였다. 김순자는 아직도 국가를 믿지 않는다.
'간첩 핏줄'이라는 주홍글씨
일가족이 풍비박산 났다. 사형선고를 받은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언젠가 교도소에 있던 순자에게 "너무 원망 말아달라"는 아버지의 편지가 왔었다. 그게 마지막이었 것 같다. 1983년, 동생 태옥에게 편지가 왔다. "누님, 아버지는 세상에 없습니다. 거짓말 같지만 사실입니다."
김순자는 5년 후 출소했다.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갔던 기간까지 합하면 5년2개월이었다. 김순자가 끌려갈 당시 열 살, 일곱 살이던 두 딸과 네 살 아들은 돌봐주는 사람 없이 흩어져 친척집을 전전했다. 아이들의 외가는 줄줄이 감옥에 있었고 친가는 '간첩의 자식'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오래전 헤어진 남편은 이미 딴살림을 차려, 아이들을 나몰라라 했다.
간첩가족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이들은 없었다. 김순자의 삶은 더 어려워졌다. 간첩 딱지가 붙은 중년의 여성, 24시간 내내 보안감찰 붙은 김순자는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다. 어쩌다 여관에서 청소하는 일 구했는데 경찰이 '이 사람 간첩이다'라고 해서 쫓겨났다. 그러다 운 좋게 마음 좋은 주인 내외를 만나 여관에서 기거하며 청소 일을 했다.
밖에 있던 가족도 비극은 피할 수 없었다. '간첩 가족'이라는 낙인은 한 가족의 삶을 사지로 내몰았다. 김순자의 할아버지는 자손을 줄줄이 감옥에 보낸 후 농약을 마셨다. 얼마 후 김순자의 고모도 뒤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
진 씨네도 그랬다. 김순자의 진외당숙 진항식의 장인어른은, '간첩 집안에 딸을 시집보냈다'고 괴로워하다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
고통스러운 나날의 연속이었다. 경찰, 때론 검사라는 사람이 때때로 집에 찾아왔다. 김순자보다 먼저 출소한 어머니는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정화수를 떠놓고 매일 기도했다. '자식이 교도소에 있는데 어미가 어떻게 편하게 있느냐'며 따뜻한 물도 쓰지 않았다.
언젠가 김순자가 어머니와 동생 태일의 면회를 갔다. 간첩은 면회도 못하는걸 사정사정해서 겨우 만날 수 있었다. 비쩍 마른 동생은 되레 어머니와 누나를 걱정했다. "다시 오지 말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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